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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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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의연한 방식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인 에릭 호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책날개에 적혀 있는 저자 소개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일곱 살 때 갑자기 시력을 잃었다가 열다섯 살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후 미친 듯이 독서에 몰두했다는 설명이다. 한참 세상의 신기함을 맛볼 어린 나이에 자그마치 8년 동안이나 암흑기를 겪고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선택한 것이 독서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막 글자를 읽기 시작했을 때 시력을 잃게 되었기에 그 무엇보다도 글자에 대한 욕구가 커졌던 것일까. 어쨌건 수많은 새로운 이미지들을 뒤로하고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은 그가 타고난 학자임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목했을 사실인 떠돌이 노동자로서의 저자의 이력이다. 에릭 호퍼는 열여덟 살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이후 “금 시굴자, 레스토랑 웨이터, 떠돌이 노동자 등으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며 보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이 책 <맹신자들>을 발표하여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상상을 해본다. 변변한 학력도 직업도 없는 49세의 중년 노동자가 자신의 글을 출판하고 싶다고 출판사를 찾아왔을 때, 그의 원고를 진지하게 검토할 편집자는 얼마나 될까. 게다가 흥미 위주의 폭로물도 아닌 ‘대중운동의 본질에 대한 생각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사회철학서를 읽어 줄 독자는 또 얼마나 될까. 여기서 이 책에 대한 한 가지 의문이 시작된다. 

“이 책은 종교운동이 되었건 사회혁명이 되었건 민족운동이 되었건 모든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특징을 다룬다.” 그는 아무리 구체적 형태가 다양할지라도 모든 대중운동에는 본질적으로 가족유사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모든 대중운동은 지지자들에게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는 의지와 단결된 행동 성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며,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대중운동이 “좌절한 사람들”과 이들을 추동하는 “효과적인 전향 기술”, 즉 선동 기술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를 입증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대상은 “광신적 기독교 신자와 광신적 이슬람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 등이다.  

이 목록이 한 가지 힌트가 될 수 있을까.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광신적’이란 형용사가 붙는 것은 모두 소위 ‘미국적 가치’라 불리는 것과 대립하는 사상들이다. 더구나 책이 출판된 해가 1951년이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다시 말해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새로이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는 시기였음을 상기한다면, 호퍼가 다루고 있는 대중운동이란 것이 결국 당시의 미국과 적대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될 수 있음을, 그럼으로써 미국적 가치에 대한 옹호와 국가적 단결을 촉구하는 하나의 선전이 될 수 있음을 편집자가 눈치 챘던 것은 아닐까. 호퍼는 자신의 책이 “일절 시비를 가름하지 않으며 일절 호오를 밝히지 않는다.”고 선을 긋고 있긴 하지만, 흑인민권운동과 같이 자신이 현재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막 태동하고 있던 대중운동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나치나 공산주의와 같은 적대자들을 주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대중적 성공에 대한 음모론적 의심이 싹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찌됐건 이와 같은 자신의 집필 의도를 보여주는 서문 이후 4장 125항으로 이루어진 대중운동에 대한 호퍼의 단상이 펼쳐진다. 사회철학적 저서라고 하지만 대중운동에 대한 엄밀하고 꼼꼼한 자료조사나 치밀한 논리적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이러한 책이 출간되었다면 아마도 저자가 사용하는 ‘대중운동’이라는 개념의 애매모호함이라든지 자신의 주장에 맞는 역사적 사례만을 선별적으로 골라내어 제시하고 있다든지 하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듯싶다. 저자 스스로는 각 항 간의 유기적 연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도 하지만, 니체나 벤야민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선언적인 아포리즘의 형식으로 펼쳐놓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아포리즘 형식을 띤 글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6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순간순간 빛나는 통찰을 보여주는 구절 또한 다수 존재한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사회의 대표적 대중운동인 반MB운동과 그 최전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는 꼼수다>를 생각해보자. 이들은 MB정부가 들어선 후 3년 동안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여긴다. 이전의 두 정부가 10년 동안 쌓아왔던 많은 물질적 정신적 가치들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가 IMF의 구조조정을 받아들인 시기였으며 참여 정부가 비정규직 법안의 통과와 한미 FTA 체결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적극 도입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최하층의 삶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크레인에 올라가 300일 넘는 투쟁을 해야만 했으며, 누군가는 여전히 정리해고의 고통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 운동에 열성적으로 뛰어드는가. “불만으로 인한 소란에 맥박이 뛰는 것은 대개 상대적으로 최근에 가난해진, ‘신빈곤층’이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가 최근 3년 동안 그것을 읽어버린 이들이다. 여기서 ‘가난’을 단지 물질적 차원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는 꼼수다>의 4인방이 MB정부 이후 자신들의 사회적 발언권을 축소당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또한 여기에 열광하는 이들이 대부분 아이폰이나 컴퓨터를 능숙하게 사용하며 일주일에 한두 시간 정도 수다에 귀 기울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호퍼가 지적하는 ‘신빈곤층’과 이들이 묘하게 중첩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게다가 이들로부터 촉발되어 이제 사회적 구호로 자리 잡고 있는 ‘쫄지마 씨바’라는 말에서 호퍼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과도한 유추일까. “대중운동이 사무치도록 좌절한 이를 치유하는 것은 절대 진리를 설파하거나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곤경이나 학대로부터 구제해줘서가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반MB운동을 국민의 지상 명령이라 여기며 ‘닥치고 통합’을 주장하는 이들과 “공동의 증오는 아무리 이질적인 구성원들이라도 하나로 결합시킨다.”는 구절이 등치되는 것도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이처럼 호퍼의 글은 전혀 다른 시간, 전혀 다른 사회에서도 하나의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논증적 형태의 글이 아니라 아포리즘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속담은 수천 년이 지나도 적용가능한 사례를 찾아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호퍼의 분석을 단순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라고 폄하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어떤 속담이 수천 년이 지나도 계속 언급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삶이란 것이 수천 년 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로부터 무언가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호퍼의 통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호퍼의 아포리즘 전면에 흐르는 주된 정서는 대중에 대한 ‘냉소’다. “대중운동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권력은 개인을 신뢰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 자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그런 자들이 득세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을 경시하는 태도로 인해서 얼마든지 무자비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태도가 대중의 주된 정서와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대중운동이 광신과 같은 형태로 귀결되는 것은 결국 대중들이 가진 본질적 속성 때문이라는 비관적 인식이 그에게 깔려있다. 이러한 전제가 옳은지 그른지는 보다 깊이 있게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지금과 같이 ‘집단 지성’이라는 혹은 ‘국민의 명령’이라는 그 실체가 불분명한 이름이 어떤 절대성을 획득하고 있는 시기에 일종의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나 박원순 시장의 당선 후, 많은 지지자들이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감시할 것’이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감시보다는 적대자들에 대한 증오에만 집착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호퍼의 말처럼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대중이 운집한 장관에는 넋을 일게 마련”이기에, 대중이 만들어 내는 장관에 휩쓸리지 않고 항상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맹신자들>이 2012년 정치의 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된다.  

덧붙여 <맹신자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오늘날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광신’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며칠 전 한미 FTA에 찬성표를 던진 151명의 국회의원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새로운 종류의 광신이 현대 사회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호퍼가 말한 “좌절한 사람들”의 광신이 아닌 ‘가진 자들’ 혹은 ‘상위 1%’에 의해 추동되는 광신이라는 점에서, 또한 맑스가 말한 단순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넘어 맹신적 추종자들을 양산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맹신자들>이 담아내고 있지 못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맹신자들의 증오와 적대가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는 지금, 그 내용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맹신자들>이 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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