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ap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는게 취미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작가가 한 사람쯤은 있을 것이다. '저 작가가 책을 내면 무조건 사야해' 라는. 내게 있어 그런 작가는 딱 한 사람.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한때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국에서 열풍에 가까울만큼 큰 인기를 얻었었고, 하루키 특유의 심드렁한 문체를 흉내낸 수많은 아류작가들을 양산해냈었다. 지금은 어느정도 그 열풍이 가라앉아서 괜찮지만 한때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것은 마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좋아한다는 것 만큼이나 흔해빠지고 뻔한 느낌을 줬었다. 그래서 나는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말을 거의 입밖에 내지 않았다.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 내 사랑은 특별한데 그게 남들 눈에는 그저그런 뻔한 유행에 휩쓸린 작태로만 보이고 싶지는 않은거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예전의 나는 참 별것에도 신경을 다 쓰고 살았구나 싶지만 아무튼 그땐 그랬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로 유명해진 사람이지만. 사실 나는 그의 에세이나 산문집 혹은 단편집을 더 좋아한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최고로 뽑히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노르웨이의 숲,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보다는 오히려 단편인 치즈케잌모양을 한 가난이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필기구에게 인격을 부여한 단편이 훨씬 더 재밌었다. 이 책도 내가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이다. 그런데 여느 단편집들과 약간은 다른 성격을 띄고 있다. 에스콰이어, 라이프, 피플, 뉴욕, 롤링스톤, 뉴욕 타임즈 등을 읽고 재밌는 기사를 스크랩해서 그 기사를 가지고 원고를 쓰는 것이다. 무라카미는 책의 서문에 몹시 수월한 작업이었다고 고백을 해 놨었다. 매 회 무엇에 대해 글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스포츠 종합지 넘버라는 곳에 연재했음) 매월 혹은 주 단위로 나오는 잡지를 통해 소재를 얻다니.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며 한편으로는 일본인 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잡지를 상당히 좋아하는 인간인데 어떨때는 잡지를 읽고 나서 나도 저 제목으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때가 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해서 무려 4년간 연재하는 기록을 세웠고. 이 책은 그 중에서 일부를 모은것이다.

하루키가 이 글을 쓸 당시가 80년대여서 그런지 이 책에는 그리운 80년대의 추억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런데 읽으면서 별로 옛날 이야기 같지가 않다. 옛날 이야기란 으례 '맞아 그땐 그랬지' 따위의 감상과 함께 무릎을 치는 분위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그다지 그런게 없다. 내가 80년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기 때문일까? 아무튼 그 시대에 그 잡지를 보고 연재한 글인데도 내게는 별로 80년대라는 화두로 와닿지는 않는다. 제일 마지막에는 LA올림픽이 열렸던 (1984년) 당시에 하루키가 무엇을 하고 지냈는가를 기록한 '올림픽과 별로 관계가 없는 올림픽 일기' 도 실려있다. (좀 아쉬운게 4년만 뒤에 썼으면 88서울 올림픽인데 싶다.)

사실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다지 권할만한 이유가 없다. 할랑한 산문집인데다 뭘 주장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끝내주게 재밌지도 않고 책도 얇고, 읽고나서 그다지 남는것도 없고 등등등.  그래도 나처럼 하루키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더없이 재밌고 소중한 책임은 틀림없다. 해변의 카프카 이후로 하루키의 신작을 무척이나 오래 기다렸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 지금은 하루키의 글이라면 뭐든 다 좋아 하는 정도이므로 이 책이 좋지 않을 리가 없다. 하루키 자신도 이 책에 대해 자기가 스크랩한 기사는 대부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이므로 읽고 난 후에 시야가 넓어진다거나, 인간성이 좋아진다거나 하는 종류의 글은 아니라고 했다. 백번 맞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 하자면 하루키 팬들에게는 반가운 책이 될 것이고 하루키의 팬이 아니라면 굳이 사서 읽을 만한 메리트는 없다. 그래도 나는 어?거나 좋았다. 모처럼 하루키의 일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산문집이 아닌가. 이렇게 남는거 하나 없고 그저 약간 키득거리게 되는 글도 나름대로 무척 좋다. 적어도 나라는 인간에게는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 넷 까지 받을만한 책은 아니다. 허나 안으로 굽는 팔을 어쩔수가 없었다. 별 다섯을 주고 싶은것도 억지로 자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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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5-01-14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를 좋아하면서도 입밖으로 내어 말하고 싶지 않은 그 심정, 너무 이해가 가요.

그런데 저는 하루키에 대한 사랑이 좀 부족했던지...

스푸트니크의 연인 이후로는 이렇다 할 감흥을 받지 못하고, 계속 실망하다보니, 이젠 더이상 읽고 싶지 않아져버렸어요.

누군가를 진득하게 좋아하는 것, 그걸 못하는 내 탓인지,

아니면, 진득하게 질 고른 작품을 써주지 못하는 하루키 탓인지,

분간이 안됩니다요. ^-^;;

플라시보 2005-01-1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흐흐. 한때는 입밖으로 내어 말하기가 좀 뭣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당당하게 말합니다. 하루키 인기도 많이 떨어지고 해서^^

그리고 소설은 저 역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후로는 그저 그렇다고 느낍니다. 근데 저는 하루키 소설보다는 산문집이나 단편을 좋아해서 별로 상관없습니다. 꾸준히 좋아라 하고 있지요^^ 하루키도 제가 보기에는 꾸준하게 잘 쓰는 작가는 아닌것 같아요. 작품의 기복이 심하더라구요. 님 탓이 아닌것 같아요.^^

kleinsusun 2005-01-15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하루키에게 반해서 아저씨가 쓴 책은 다 읽고 동호회까지 가입했었는데...ㅋㅋ
<해변의 카프카>에서 좌절했어요. 아저씨가 늙은건지, 내가 지친건지...
그래도 <먼 북소리>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하루키 처럼 지중해에 살러 가면 얼마나 좋을까....이 추운 겨울에...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플라시보 2005-01-15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leinsusun님. 님도 하루키의 팬이시군요. 저도 어지간한 하루키 책은 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하루키 단편의 경우 출판사들 마다 각자의 이름으로 발간해서 겹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님도 혹시 그런 경험 없으셨는지... 아무튼 하루키는 작가로는 참 행복할것 같습니다. 글 쓰려고 해외도 다니고 본인은 치열하게 썼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글들이 전부 할랑하니..^^

수닐 2005-03-02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요... 글이 쉽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할랑하다는 얘기도 좀 그렇네요. 하루키가 어럽게 쓸 줄 몰라서 어렵게 쓰지 않는게 아닐겁니다. 별로 어려운 얘기도 아닌데, 별의 별 미사여구를 달고선 어렵게 쓰는 작가분들이 계시는데, 오히려 깊은 얘기도 쉽게 풀어쓰는게 더 내공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루키의 80년대의 에세이를 보면 대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만 간단하게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그 시대적 어눌함을 피하고자, 그리고 아무래도 가벼운 잡지의 연재문이라 가볍고 유쾌한 어조로 썼으리라 짐작합니다.

야초 2005-03-04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던 애가 상실의 시대라는 책 제목을 얘기하는 걸 들은 후로 꾸준히 그의 작품들을 읽어왔었어요. 소설중에 읽은 건 상실의 시대와 댄스댄스댄스 그리고 단편 중엔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 등을 읽었었구요. 저도 플라시보님과 마찬가지로 산문집이나 에세이 그리고 단편모음집을 좋아헀습니다. 슬픈 외국어,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빵공장 재습격사건 등등.. 저 같은 경우엔 책을 정말 안읽는 편인데도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 이름이 나오면 일단 들춰보고 왠만하면 구입을 해서 읽곤 했었죠. 이 책도 재미나게 볼수 있을 것 같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