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와 유타카와 고야마 데쓰로의 대담으로 엮은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론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를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 고모리 요이치의 [무라카미 하루키론]의 하루키 비평서( 하루키 작품 비평서 책 한권을 더 봤던 것 같은데 당장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외에 작품론이나 비평론을 별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오후]는 하루키 작품을 좀더 풍성한 얘깃거리를 가지고 볼 수 있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출간 당시 그저 쉽게 읽었던 것에 비하면 생각할만한 몇가지를 건졌다고 할까.  

덩달아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첫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도 내친김에 다시 읽었는데 스치고 지나간 몇가지들도 다시 되새기게 됐다. 


우치다 다츠루의 [하루키씨를 조심하세요]가 하루키의 '아버지'를 새롭게 볼 수 있게 언급했듯이 하루키에게 '아버지'란 의미들이 갈수록 커져가는 건 분명 있는 것 같다. 

[색채가 없는]은 아버지 세대와 그 자식 세대를 의식하고 쓴 소설 같다는 생각도 이번에 하게 됐다. 

(가령 처음 읽을 때 하루키 소설 중 가장 부유한 주인공 등장에 의아해했다. 주인공의 나이가 청년을 벗어나 중장년에 이르면 어느 정도 사회적 안정 궤도에 오르면서 경제적 안정도 이룬다고 하루키는 생각하는 것일까, 라는 아주 멍청한 생각을 하고 지나갔더랬다. 이제와보니 부유한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와 그 아버지(세대)에 걸쳐 말하고자한 것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매우 세밀하게 소설을, 작품을 대해야 하는거다, 모름지기.) 

그건 하루키가 시대에 대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최신작 [기사단장 살인]은 난징학살사건 언급한 걸 두고 일본 우익이 욕하고 있다는 뉴스가 먼저 터졌고 

심지어 노벨상 타려고 중국에 아부한다는 모욕까지 얹혀져 소설 자체보다 더 큰 화제가 됐던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기대작이다. 

사실 이건 하루키에겐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걸 잘 알고 계속 도전하는 영민한 작가이므로 새소설에서 뭔가 시도한 게 있을 것 같다고 짐작할 뿐이다. 



[색채가 없는]이나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이번에 주목한 점은 인간관계에 대한 아릿한 생각이랄까. 

[색채가 없는]은 과거에 자신을 죽음 문턱까지 이르게 한 깊은 상처를 극복했다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마음에 이미 큰 벽이 생겨버린 경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를 질문했다. 

원래 단편으로 생각했던 이 소설은 사라라는 인물의 명령 "당장 나고야로 돌아가 십팔년전(!)에 그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 한다"고 말하면서부터 완전히 궤도를 달리하게 됐다고 하루키는 말한다([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51)

하루키 스스로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 작중 인물 사라를 통해 발설됐고 소설은 장편으로 새롭게 달려야 했다.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봐야 한다. 


왜 다섯명의 조화가 하필 두 여자의 성적 판타지에 의해 깨져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고, 불만스럽지만, 어쨌든 하루키 세계에서는 그렇게 됐다. 

핀란드까지 가서 이뤄지는 두 사람의 포옹이 치유가 되는 건지 위로가 되는 건지 그 역시 언뜻 잘 이해가지 않지만 생각해보려 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 역시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어떻게 보면 닭살돋는 듯한 말의 향연이 이어지지만 한편으론 과연 그런가,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건 가능한 일인가, 

신의 내면과 마주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라이버 와타리 미사키처럼 머리굴려봤자 해결되는 게 없으므로 꿀꺽 삼키고 살아가면 되는 방식도 있다. 

자신에게 뭔가 '맹점'이 있다며 자책하고 전전긍긍하지 말라고 충고할 수도 있다. 


언제나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나로서는 이제와 이렇게 보니 가슴에 닿는 게 있다. 

흔히 하루키의 쿨함을 새로운 시대, 상실의 세계 젊은이들의 특징처럼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키의 쿨함이 내면을 충분히 들여다보지 않은 채 시스템과 적당히 거리둔 채 그럭저럭 살고자 했던 (그럴 수 있다고 믿었기에) 지난날이 빚 독촉처럼 귀환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읽다가 생각난 건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다. 

<드라이브>의 가후키는 아내와 사별했다. 

아내는 아이를 잃은 뒤 바람을 폈다. 

가후키는 내색하지 않은 채 살아갔다. 연기를 한 셈이다. 아내가 죽은 후 가후키는 아내의 내연남 중 한명과 가까워진다. 

몇차례의 만남 후 가후키는 자신이 진정으로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한탄한다. 아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진심은 "깊은 바다 밑에 가라앉은 작고 단단한 금고처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가후키는 어떻게 해야하나.


[플로베르의 앵무새]의 주인공 퇴임한 의사 브레이스웨이트 역시 아내와 사별했는데 아내가 바람을 피웠고 자살했다. 

브레이스웨이트는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쫓아가 본다. 마담 보바리의 부정에 대해서. 

"과거는 포착될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안고. 과거는 해명되고 포착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도 그런 질문이 따른다. 아내의 진실은 무엇인가? 아내는 왜 부정을 저질렀을까? 자기와의 관계는 무엇이었는가? 아내는 왜 자살했을까? ..... 


두번이나 읽었는데 또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시 봐야 할 것 같다. 비교해 볼만하지 않을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결국 나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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