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초기작이 그리웠다.

직접적으로 방아쇠를 당긴 건 시바타 쇼지의 [무라카미 하루키&나쓰메 소세키 다시읽기]였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는 아마도 8년 여 전에 하루키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을 때 읽었을 것이다.

아마도 하루키 소설 중에서도 애정하는 작품에 해당할 것이다. 하루키의 최근작보다는 그의 초기작들이 좋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세계가 숨 쉬는, 하드보일드한 절망과 무심함이 유머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세계.

 

다시 꺼내들고 읽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권은 30여 년의 시간을 버티고, 내가 처음 읽은 후 8년 여의 시간을 견뎌 내게 다가왔다.

1권 15장까지 읽었다. 13장과 15장만큼 더 좋은 장이 나타날까?

'나'에게 찾아온 2인조 침입자.

거구와 왜소한 남자.

수많은 레퍼런스를 들이댈 수 있는 장면. 당연히, ... 왜소한 남자는 리더고, 거구는 행동한다. 

거구는 '나'의 아파트 세간 전부를 아주 세밀히, 성실하게 깨어부수고 짓부수고, 파괴한다.

왜소한 남자는 칼로 '나'의 배를 아주 조금, 얕게 갈라놓고 떠난다. 13장.

 

겨우 치료를 마치고 자근자근 파괴된 아파트로 돌아와 간신히 남겨진 위스키 몇 모금과 맥주를 찾아내 마셔가며 '나'는 투르게네프를 읽는다. 15장의 소제목은 "위스키, 고문, 투르게네프"다.

널부러진 책 속에서 찾아내 집어든 책은 투르게네프의 [루딘](루진). [봄의 물결](봄 물결]을 읽고 싶었으나 폐허의 공간을 헤집어가며 찾기 싫었다고. 

결점을 지닌 인간들. 그 결점을 고칠 수 없다는 것에서 연민을 느끼며 '나'는 계속해서 스탕달의 [적과 흑]도 읽기 시작한다.

이미 열다섯에 결정되어버린 그의 성격적 결점에 동정을 느끼며.

취기와 상황과 소설이 주는 아마도 어쩔 수 없는 절망감 같은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끌어진다.

"투르게네프-스탕달적 인 어둠"에 휩싸인 채 졸음에 겨워한다.

 

"새로운 문제는 새로운 절망감으로 맞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246)

15장.

 

하필이면 이어폰으로는 신해철의 <절망에 관하여>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오기 전 하루키의 이 소설을 읽게 된 건 행운 같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985년에 출간됐으니 올해 30년된 세계.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스트잇 2016-08-15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쓴 페이퍼에 누군가 좋아요를 눌렀다는 알람이 있어, 들어와 읽어봄. ...작년 이미 마음 결정은 내렸고 그야말로 `절망`에 휩싸여 짐 정리하던 때였을 것이다. 이곳에 와서는 휩쓸리듯 살고 있어서 새삼 절망스러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건....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두려움으로 오싹해질때가 있다는거. 주저앉아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