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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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손으로 들고 읽을 수 있는 작은 무게의 책이다. 그러나 심심한 맘에 섣불리 이 책을 펼쳤다간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나는 마음의 무게에 곤욕스러워질 것이다. 두 번째로 만난 헤르타 뮐러의 책. 그녀의 문장은 막힘없이 흘러가는 작은 구슬처럼 여유롭고 또 아름답지만, 그 문장들이 늘어서서 뿜어내는 인간의 생과 사에 대한 이야기는 처절하고 묵직하기만 하다. <숨그네>의 레오에게서 삶 자체를 착취당한 자의 비애를 보았다면,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의 빈디시에게선 현실을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자책하며 선택할 수 없는 내일 앞에 발만 구르는, 무능력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전쟁 후, 전몰자 기념비 주변에 핀 ‘장미’는 아름답지만 연약한 ‘풀들’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다는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 무성하게 자라난 권력은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내일을 억압하고 마음대로 오려내었다.
  ‘빈디시’는 독일로 망명할 수 있는 여권을 얻기 위해 2년 째 이장에게 밀가루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기약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어쩔 수 없었다. ‘모피가공사’는 이미 여권을 받아 떠날 채비를 하고 있고, ‘야간경비원’은 떠날 생각이 없다. 떠나려는 자와 떠나는 자, 남으려는 자가 부딪히면서 이야기는 끊임없이 빈디시의 내면을 헤집는다. 그는 이 마을의 모든 것에서 ‘멈춰선 시간’을 본다. 벗어나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다. 움직이지 않는 것에선 희망도 내일도 없다. 끝이 난 것이다. 바퀴를 잃고 멈춰 선 수레가 길가에 버려진 자신의 큰 덩치를 수치스러워하듯, 빈디시는 남아있는 자신을 수치스러워했고 여권을 얻지 못한다면 생은 끝난 것이라 여겼다. 
  그의 마을엔 생기 있는 것도, 빛나는 것도, 오고가는 미소도 없었다. 안개가 낀 듯 경계가 흐릿한 그곳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건, 죽음의 냄새였다. 흡사 죽은 자들이 사는 내세 같기도 했다. 살아서 먹고, 움직이고, 이야기하지만 시간의 목줄에 이끌려 하루를 지나칠 뿐, 누구도 그 목줄을 팽팽히 당겨 살아내는 이는 없었다. ‘관’은 이름표를 달고 그들의 곁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죽음’은 친근하게 맴돌았고, 사람들은 성당에 모여 떠나는 이를 배웅했다. 뮐러의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루마니아를 알았고, 그곳에 있었던 전쟁과 비극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쉬쉬하며 숨겨야 했던 역사와 감시당해야만 했던 삶의 고단함이 절실히 느껴졌고, 안타까웠다. 차우셰스쿠 정권에 갇혀 마음에 깊은 감옥을 지어야 했던 슈바벤 독일 마을 사람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온전히 자신을 누일 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마을은 생활의 터전도 안식처도 아닌 ‘작은 수용소’ 같았다. 사람들의 재산과 노동, 곡식 등의 것들이 어떤 대가도 없이 정부에게 넘겨졌다. 열리지 않은 곡식과 열매마저도 그들의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훔쳐보았고, 눈길로 조롱했다.


빈디시는 바짓가랑이에 한 손을 올려놓는다. 손은 차갑고, 허벅지는 따뜻하다. “여기 사정은 점점 나빠질 거야.” 빈디시는 말한다. “저들은 닭이고, 달걀이고 닥치는 대로 빼앗아가고 있어. 심지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옥수수까지 빼앗아가는 판이야. 언젠가는 자네 집과 마당까지 뺏어갈걸.” - p.111

 

 그런 마을의 사정에도 떠나지 않으려는 야간경비원을 빈디시는 우둔하게 여겼다. 누가 옳은 것일까. 전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빈디시는 살기 위해 지금의 아내에게 삶을 붙들어 매었다. 전쟁 후 남은 자들에게 사랑의 몸짓은 교환의 가치였고, 쾌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성스러움은 사라지고 그것은 인간의 욕심과 분노로만 그들 곁에 자리 잡았다. 그것은 빵이었고, 옷이었고, 여권일 뿐이었다. 아내는 빈디시를 만나기 전, 러시아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남자들의 철제침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빈디시는 그 때의 아내를 두고두고 이해하지 못했다. 본문 중「풀수프」에서 그녀의 과거를 자세히 만날 수 있다. 그 문장들이 가리키는 한 여자의 잔인하고 고단했던 시간이, 굶주림 앞에 무릎 꿇은 그녀의 마음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섣불리 그녀의 판단을 비난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카타리나를 미워할 수 없었다. 
  처음에 빈디시는 어서 빨리 독일로 망명할 수 있는 여권을 얻고 싶었음에도, 도를 넘는 부정된 방법을 쓰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조급해졌고, 결국 딸아이의 몸을 내어주고 만다. 도시에서 유치원교사로 일하는 아말리에는 부모를 원망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화장을 한다. 빨간 원피스를 입고 하얀 구두를 신는다. 빈디시는 말리지 못하고 망부석이 되고 만 자신을 끝없이 자책했다.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말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딸아이가 돌아올 길을 내다보면서 끝없이 길을 잃었다. 그들의 모든 감정과 판단은 여권에 묶여있었다. 어쩌면 목숨도. 그들은 그 줄을 끊지 못했다. 
  힘을 가진 자들은 그늘에 숨어 약한 자를 탐하고, 제복과 수도복으로 죄를 가리고 있었다. 손도 데지 않고 약한 자를 쥐락펴락했다. 사람들은 권력으로 무장한 그들을 우러러 보면서 원하는 것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권력은 그렇게 그림자만 남은 그들을 삼켰다. 표정도, 입술도, 재산도, 가족도, 내일도 모두 삼켰다. 명명하여 부르기 이전에 그들은 한 개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어둠이 내리면 그 윤곽마저 사라지는 그림자 덩어리. 빛이 닿지 않는 그들은 축축하게 젖은 종이인형처럼 불안했다. 내밀한 삶은 서로에게 바닥까지 드러났지만 지나쳐온 많은 시간들로 모든 것을 알아버린 그들에겐 슬픔도, 동정거리가 되지 못했다. 서로에게 침묵했다.  


 여권이 생긴 뒤엔 빈디시 가족에게도 일상의 대화가 오갔다. 집안의 것들을 팔면서 생기가 돌았다. 비행기 멀미를 걱정하면서 새 옷을 재단했다. 머리를 잘랐다. 아말리에의 잠든 얼굴이 부부의 눈에 보였다. 빈디시의 아내가 웃었다. 그렇게 죽음이 지나가고, 과거가 지나갔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아말리에를 찾아댔다. 빈디시 부부는 아무렇지 않게 아말리에의 약속을 챙겼다. 여권이 생긴 뒤의 빈디시 가족의 모습과 대비되어 이어지는 본문「은빛 십자가」는 그들이 잃은 것과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 힘으로 어떻게 한 인간을 짓밟는지를, 한 사람의 생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모습이 냉정하게 그려진다. 시대를 국가를 잘못 얻은 그녀의 삶이 이렇게 훼손되는 게 안타까워서, 아말리에의 담담함이 안쓰러워서, 당연하게 그녀의 작은 가슴을 움켜쥐는 그들의 손이 두려워서, 나는 잠시 책을 덮어야 했다. 삶의 앞, 뒷면을 한 번에 보아버린 듯 그 극단 앞에 눈이 매웠다.  

  침착하게 이어지는 문장들은 차갑게 그들의 삶을 후려쳤지만 누구도 스스로의 잘못을 알진 못하는 듯 했다. 떠나는 날, 빈디시 부부는 회생 정장을 차려입었다. 때가 묻은 ‘꿩’의 모습으로 그들은 마을과 작별하려 한다. 무언가를 쟁취했다기보단 도망치는 느낌이 강했다. 오히려 그 사이 결혼한 ‘야간경비원’에게서 막 달아오르려는 삶의 냄새가 맡아졌다. 그들은 행복하게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들의 내일은, 오늘과 다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그림자이길 자청한 자이기 때문이다. 안전하게 스스로를 숨길 곳을 위하여, 자신이 삼켜지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 야간경비원은 빵을 씹으며 나지막이 말한다. 빈디시는 밀가루포대를 들어올려 자전거에 싣는다. “인간은 강해.” 그가 말한다. “짐승보다 더 강하지.” - p.15

 

  그림자는 그늘로 들어서면 사라진다. 존재가 없어지고 무의미해 진다. 그것은 안전하게 느껴졌지만, 어리석은 삶의 입구로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땅을 딛고 서서 제 팔과 제 다리를 휘젓고,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면서 살아있음을, 스스로 존재함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면 어쩌면 그들은, 꿩보다는 나은 모습을 갖출 수 있지 않았을까. 인간은 강하게 자신의 삶을 몰아가지만, 결국 결정적인 힘이 가해지는 순간에는 약해지고 무능력해진다. 미래가 위협당하는 순간, 그들은 안전한 곳이라고 느껴지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어떻게든 가야한다. 그토록 분명하게 인간은 강하다고 말했던 빈디시는 아말리에를 권력 앞에 내어주고 다른 사람들의 입술이 두려워 자신의 집을 나서지 못했었다. 스스로를 조롱하듯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야.”라고 말했다. 
  '몸집만 커다란 꿩은 어설프고 무력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상징’한다. 살기 위해선 도덕도 인간다움도 버려야 하는 인간의 비애가 날지 못하는 꿩의 모습과 겹쳐져 인간의 나약함을 비웃음거리로 만든다. 빈디시 뿐만 아니라 분명, 지금 우리의 삶에도 똑같이 비춰지고 있는 꿩의 모습. 안전하게 살기 위해선 권력에 편승해야만 하는 현실. 섣불리 부정하고 틀렸다 말할 수 없는 현실. 두려움이 손과 발을 묶는 현실. 살기위해 그래야만 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스스로 면죄를 받는 잔인한 현실. 그렇게 우리도 빈디시의 마을에 살고 있다.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나는 불현듯 두려워진다. 삶을 팽팽하게 조이는 어떤 무게감에, 내게로 달려오는 내일 앞에 묵직한 책임감을 느낀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빈디시는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안에 살고 있다. 그가 조용히 그곳에 머물 수 있도록, 내 인간다움을 이기고 나의 밖으로 출몰하지 않도록, 팽팽하게 마음을 조율해 본다. 그러나 내 입술은, 보는데로 진실을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은 한 인간을 ‘꿩’으로 전락시킬 수 있지만 그 현실을 박차고 나가는가, 갇히는가, 의 선택은 분명 자신의 몫이다. 삶은 결국 각자가 가진 그릇만큼 담기기 마련이고, 책임은 각자의 몫일 뿐이다. 다행인 건 누구도 서로를 비난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는 사실.  나는 내가 가진 최선을 다해 나의 삶을 그림자 밖으로 꺼내겠다고, 그림자의 꿈을 이루겠다고 다짐한다. 그 희망만이 내가 이 책을 덮을 수 있는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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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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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를 이 책 곁에 두고 싶었다. 

 

  


오래 자다 일어난 것 같은데 어둡다 문득 잠결에 친구의 전화를 받은 기억, 그러나 그 친구 이미 오래 전 스스로 목을 매달고 죽은 기억, 죽어놓고도 생전처럼 또 묻던 그 말; (어떻게 하면 편하게 죽지?) 일어나 불을 켜고 창을 열자 파란불 들어 길을 건너는 인파들처럼 방 안으로 건너오는 눈발들, 눈발들도 (어떻게 하면 편하게 죽지?) 창을 닫자 채 들어오지 못한 눈발들도 창을 치며 창틀에 주저앉으며 (어떻게 하면 편하게 죽지?) 그러다 다행히 새벽 파란불 맞아 다시 촘촘하게 모여 한세상 건너가는 눈발들 새벽빛 스며 새파랗게 마치 풀밭처럼, 아니 적어도 내 눈 속엔 싱그러운 풀밭 소풍을 가 눕고 싶은 새파란 풀밭 다시 창을 열고 받아주기엔 너무나 광활한 풀밭 내가 먼저 달려나가 눕고 싶은 풀밭 그래서 창을 열고 쓰다듬다 손이 빠져 밑을 보니 아주 깊은  

 

깊은


- 신기섭 시집『분홍색 흐느낌』中,「봄눈」전문

짧지 않은 이 시를 여기에 옮기면서 콧날이 시큰하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도, 이 시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도 그랬다. 펑펑 울어버릴 수 없는 슬픔들에 서러웠고, 곳곳에 꽃처럼 만개하던 죽음이 나를 비켜감에 서러웠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면 특별할 것 없이 존재하는 나를 인정할 수 있었을지. 몰아닥치는 삶의 모호함과 내 위로 넘어지던 가족의 무게를 내 몫인 양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덮은 뒤 며칠이 지나 이 시집을 4년 만에 다시 펼쳐 본다. 시인이 등단한 2005년은 내가 대학교 4학년 때였는데 그 해 12월, 새벽 눈길 교통사고로 그는, 평상이며 바닥마다 하얗게 눈을 입고 그를 기다렸을 옥탑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스물여섯, 그의 죽음이 왠지 가슴 깊이 남아 마지막 학기를 정리하던 나를 겨울바람처럼 모질게 흔들었었다. 5개월이 지나 시인을 시집으로 다시 만났다. 죽음으로 다가가는 자신을 위로하듯 펼쳐낸 문장들. 애써 웃는 듯한 그의 문장들 위로 그의 치열했던 생이 겹겹이 베어나고 있었다. 그가 다 누리지 못한 채 놓아야 했던 젊음, 슬픔, 시절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내게 스며들수록 나는 쓸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감정들에 대해 끊임없이 자책했다.
옮겨놓은 이 시가 젊음 안에서 절망하고 분노하고 아파하던 그들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들과 비슷한 시절 안에 쓰인 시인의 시이기 때문일까. 이 두 권의 책을 나란히 포개어 놓는다. 시인에게 조문을 하듯이, 이렇게 하면 그에게 하얀 꽃이 아닌 문장으로, 한 다발의 위로를 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윤, 명서, 미루, 단……  



 그들의 이름을 천천히 적고 보니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이 든다. 저 말줄임표의 뒤엔 내가 있고, 시인이 있고, 작가가 있고, 또 누군가의 젊음들이 빠뜨린 바늘코처럼 줄지어 서 있을 것이다.
젊음이라는 게 기간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살아온 날을 돌아보면 가장 철없이 울고 쉽게 절망하고 분노하고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해 함께 투쟁하고, 무엇에든 치열히 맞서자 했던 때.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고 겹겹이 입은 패배의식에 늘 자책하고, 죽음을 동경했던 때. 그 때가 바로 내가 가장 싱그러웠을 때, 라 회상하게 되는 것 같다. 젊음의 옷이라는 게, 자유라는 게 내 삶을 날아갈 듯 가볍게 만들어 줄 것 같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 공포감으로 몸 안에 뻗어나가는 불안과 괴로움에 스스로를 얼마나 증오하고 분노하게 되는지. 완전하지 못한 꿈과 완벽하지 못한 스스로를 한없이 잃어버리고 싶던 시절.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느낌, 죽음이 오히려 안전하게 느껴졌던 시절.
‘8년 만에……’ 걸려온 전화가 지나쳐온 어느 시간을 몰고 와 윤 앞에 와르르 쏟아낸 것처럼, 그 때를 떠올려 본다. 그것은 좀처럼 담기지도, 닦이지도 않고 물처럼 천천히 바닥의 굴곡을 타고 나아가 내 발 아래 작은 웅덩이를 이루고, 조용히 웅크린다. 이내 파르르, 불안하게 흔들리는 수면에 마음이 애잔해진다. 그 안에 담긴 눈, 오늘을 상상하지 못했던 그 때의 푸르고 가벼운 눈, 스물이란 경계선을 이제 막 넘은 자의 불안정하지만 기대에 찬 눈, 살아있는 눈, 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나는 잘 있노라고, 8년 전의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청춘(靑春),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
손으로 적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활짝 펴지는 푸른 봄의 시절. 모든 것이 가장 아름다운 그 때에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 헤매고 또 헤매여야만 한다는 것. 삶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상처받고 어수룩하고 뭉툭한 자신을 고통을 참으며 깎고 깎아 진정한 자신을 만들어가는 초입 단계. 그 ‘경계의 시간’ 안에 놓인 윤, 명서, 미루, 단의 이야기는 정상을 알 수 없는 산자락의 초입에서 어떤 등산장비도 구비하지 못한 채 이제 막 한걸음을 떼려는 두려움에 찬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타인일 뿐이었던 서로가 조금씩 서로의 고리를 더듬어 찾고 그 고리 안으로 손을, 가슴을 밀어 넣으면서 그들은 한 덩어리의 세계가 된다. 그들이 보낸 시간은 함께 존재하며 서로를 찾던 그 시간은, 과거를 나누고 상처를 나누던 그 시간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유일한 세계였다. 함께 걷고 읽고 쓰는 행위 속에서 건네는 말들, 무언의 행동과 불현듯 쏟는 혼잣말 등을 통해 그들은 서로의 짐을 나눠진다.

여자에게 가장 큰 버팀목일지 모를 엄마를 죽음으로부터 빼앗겨버린 윤. 언니의 죽음을, 너무나 가까이 존재하는 손의 상흔으로부터 매일 확인해야 했던 미루. 그 죄책감에 동요하며 미루 곁을 지킬 수밖에 없는 명서. 존재의 상실감으로부터, 윤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단. 그들은 스스로의 안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를 끊임없이 헤매듯, 길을 걷고자 한다. 윤과 함께 걷기를 자처한 명서와 미루, 이 세 사람의 눈에 들어차는 세계는 조금씩 넓어지고 희망으로, 서로에 대한 갈망으로 채워지면서도 꼭 그만큼 슬픔과 절망도 함께 늘어갔다.
그러나 삶은 어쩌면 타인의 죽음으로부터 새롭게 돋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청춘을 빛내는 ‘사랑’에 관한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려주고자 했다고, 글을 연재하기 전에 이야기한 바 있지만 글의 곳곳에는 그렇게 죽음이 놓여있다. 마음을 나누던, 거울 앞에 서듯 서로의 앞에 서서 말을 나누던 반대쪽 존재가 사라짐으로 그들은 거대한 상실감의 무게로 휘청인다. 끝없이 기억을 퍼올리며 사라진 존재가 있던 시간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러나 처음과 달리 두 번째에는,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에 대면한 죽음 앞에서는 아직 함께 존재하는 누군가의 아픔을 먼저 바라보게 되고, 그 마저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매달린다. 상실은 곧, 사라질까 두려운 또 다른 무언가를 향한 거센 갈망과 욕망으로 뒤바뀐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자신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려는 시련과 고난의 문제 앞에서 가장 강해지 않는가. 시간이, 사람이 나에게서 소중한 무엇인가를 앗아간다고 느낄 때 가장 예민해지고 민첩해진다. 미루의 죽음 앞에서 윤이 그토록 명서를 붙잡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러나 함께 있어 나눌 것보다 서로에게 앗아갈 것이 더 많았던, 각자의 안에 숨겨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재에 대한 벅참이 서로에게 짐이 될 것을 뻔히 알고 있었던 그들은, 각자의 슬픔 안으로 길을 내고 나아갔다. 혼자, 남아서 그렇게, 혼자서.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귀퉁이를 돌아 보이는 낯선 길 쪽으로, 조금은 삶에 고통에 무뎌진 마음으로 한 해, 한 해를 나아갔다. 
 

- 함께 있으면 너와 나는 아플 거다, 흉측하게 될 거다.

함께 있자는 윤에게 명서는 처음 입을 떼고 이렇게 말하는데, 다시 볼 때마다 내 가슴이 다 철렁 내려앉는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데 서로가 흉측하게 변해간다는 것의 진실을, 함께 있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마음을, 그토록 어른스럽게 서로를 놓아야 했던 그 안타까움을 알 것 같아서. 어쩌면, 어떻게든 이 고통엔 끝이 있고,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믿음에 비롯된 이별은 아니었을까.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윤이 8년 전 갈색노트에 남긴 명서의 말 아래 천천히 한 마디의 의지를 새겨 넣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리운 그에게로 달려갔으리라 믿었다. 그래야만 이 책 밖으로 홀가분하게 나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이 그렇게 풀리지 않는 미로 속에서 얽히고 얽히면서도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스스로의 자리에서 8년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윤교수’의 존재, 젊음을 짐으로 지고 살아가는 그들을 끌어주는 그의 존재 때문이었다. ‘윤교수’는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권력과 나란히 있지만 유일하게 그들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이었다. 소란스러운 시대 안에서 그들에게 사대 밖의 꿈을 꿀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런 그의 죽음은 어쩌면 이젠 스스로 나아가야만 하는, 청춘의 시절을 벗어난 윤과 명서의 현재를 보여준다. 그들은 이제 용서할 순 없어도 이해할 순 있는, 그런 삶으로 근접해가고 있을까.

나는, 그럼 나는……

미루를 보내고 온 윤과 명서에게 윤교수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 인간은 불완전해. 어떤 명언이나 교훈으로도 딱 떨어지지 않는 복잡한 존재지. 그때 나는 뭘 했던가? 하는 자책이 일생동안 따라다닐걸세. 그림자처럼 말이네. 사랑한 것일수록 더 그럴 거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 그 절망에 자네들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라네. 


학교를 그만두면서 학생들에게 남긴 윤교수 편지의 마지막 부분, 


-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있으라  


어쩌면 지금의 나는, 청춘을 벗어나는 그 목전에 서서 마지막 걸음을 떼지 못하고 종종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벗어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들을 어설프게 살아내면서, 못다 채운 것과 잃어버린 것과 하지 못한 것에 끝없이 연연하면서 매일 어제를 잊자, 하고 살진 않는지. 그래도 다행히 그 시절은 내 안에 고스란히 쌓여있었고 그렇게 윤과 함께 찾아와 내 지나온 시간들을 위로해주었다. 거기서 고독을 딛고 나아가려 발버둥치던 내 곁의 사람들과 꿈과 강의실에서 맡아지던 풀냄새 같은, ‘언젠가’에 대한 설렘들을 내 안에 다시 ‘보이는 곳’으로 옮겨 둘 수 있었다.

이 글이 연재될 당시는 내가 출산 후 7개월에 접어들 때였다. 청춘소설이란 말에 왠지 모를 거리감을 두었다. 몸이 많이 지친 상태였는데, 그 밝음에 눈이 부시고 내가 더 작아질까 두려웠던 까닭이다. 누군가는 내가 결혼과 아이 모든 것을 채웠으니 청춘의 끝자락을 망설임 없이 놓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의 기쁨만큼이나 상실의 아픔을 통과’해야 하듯이 아직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그 형상을 바라보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있다. 일년이 지나 이 책을 다시 만나면서 나는 다시 확인한다. 여전히 고독하다는 것, ‘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나눠보지 못했다는 것, 여전히 이해하는 것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것.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기다리기로 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아직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일들이 남아있다는 생각. 그것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될수록 나는 성장할 것이며 그것이 언젠가 내게 추억이 되고, 이야깃거리가 되고, 언젠가 꿈을 이루게 해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졌다. 오늘의 무거웠던 시련이 내일의 시련을 가볍게 하고 언젠가 모든 무게가 사라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리라 기대하고 싶어졌다. 그 믿음 속에서 절망과 분노와 슬픔의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기대감이 오늘에게 지는 마음으로 돌아서는 스스로를 다독여 내일로 건내주는 것 아닐까. 돌아가고 싶었던 그 시간을 만나면서, 혼자이고 싶은 이 마음이 어쩌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 나를 고독으로부터 나아가도록 하는 것은 다가오는 시간, 나를 항해하게 하는 아이, 가족.
 

책의 마지막 장을 읽은 뒤 앞으로 돌아가 에피소드를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달리 윤의 한 줄의 망설임이, 한 줄의 슬픔이, 한 줄의 진실이 알아버린 그들의 이야기와 얽혀 고스란히 읽혔다. 그리고 다시 이별 앞에서 책을 덮었다. 그들이 다시는 헤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누구도 젊음이 남긴 상흔 앞에 휘청이지 않았으면 한다. 강물을 두려워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건널 수 있기를. 내가 나의 가족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줄 수 있기를. 늘 ‘언젠가’를 꿈꿀 수 있었으면 한다.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이들의 얼굴이, 동그란 알전구처럼 머릿속에 빼곡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한다. 그들도 지금 이 시간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내고 있겠지. 그리움 속에서 그들이 알게 모르게 나를 이곳으로 밀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 번의 모든 재생이 끝나고, 다시 첫 트랙으로 돌아가 음악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 낯익듯, 낯설듯 그렇게 다시 시작되는.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손끝을 산뜻하게 한다. 계절이 또 다른 계절에게 자리를 내어주듯이, 나는 오늘을 떠나보내고 또 다른 오늘을 기다린다. 다시 그 때의 푸른 봄철 같은 시간을 껴입고서, 조금은 담담하게, 지금을 살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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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을수록 무지함은 잔인하게 드러났고, 나를 괴롭혔다. 열일곱의 그가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오를 무렵을, 그곳에서 5년을 보내고 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가늠할 길은 내게 없었다. 그를 가둔 수용소의 모습과 양배추 수프의 정체를, 날아가는 시멘트 가루의 불길함을, 안타까움을, 스스로를 구궐하게 하는 배고픔을 글로만 읽을 뿐. 그것마저도 금세 부끄러워졌다. 그가 견딘 시간을 그저 한 권의 책으로 읽어 내려간다는 게, 어쩌면 그의 삶의 전부였을 ‘뼈와가죽의시간’을 이렇게 가만히 앉아 읽는다는 게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렇게 조금씩, 이야기를 내 안에 담았다 덜어내길 반복했다. 한 달 가까이 책을 붙잡고 있었다. 그 사이 우리에게 일어났던 전쟁도 떠올렸고, 세계를 뒤흔든 ‘2차 세계대전’과 다른 전쟁의 역사마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에 대해 처음으로 ‘감정’을 갖게 된 것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세대가 바뀌는 사이, 지금과는 먼 이야기가 된 전쟁의 비극은 점점 ‘없었던 일’이 되어가고 있다.

올해 한국전쟁이 60주년 되었다. 그러나 매체와 사람들은 월드컵 열기로 가득 차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때 우리의 영토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 곁엔 어떤 삶이 존재할 수 있을까. 60년 전, 가족을 잃고 어디로도 닿지 않은 길 밖으로 내몰린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꿈을, 수많은 목숨들을 희생하고 얻어낸 ‘지금’을 너무 당연하게만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우연히 보게 된 한국전쟁 60주년 특집 다큐, ‘소련으로 끌려간 국군 포로 - 그 이송설의 진실’ 편은 내가 이 책을 끝까지 보게 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전쟁 당시 북한군에 억압된 한국군이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넘겨졌다는 내용이었다. 그 진실을 취재하는 기자를 따라 아직 러시아에 남겨져 있는 수용소의 모습을 보면서 ‘레오’가 있던 곳을 떠올렸다. 글로만 읽어 더듬던 풍경을, 차갑고 냉정한 그곳의 시간을 마주보고 있으니 절로 코가 시큰해졌다. 여러 곳에 나뉘어 있던 강제노동수용소는 폐허가 되거나 여전히 남아 교도소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철책이 삼중으로 되어있고, 총을 들고 보초를 서는 군인의 모습이 오래전 그 때를 선명하게 재연하고 있었다. 한국전쟁당시 북한에 잡혀 그곳에 넘겨진 우리 군이 있었다는 말은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한국군 포로로 소련에 넘겨진 그는 수용소에서 탄광 일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을 하루 종일 해야만 했다. 80세를 넘긴 노인된 그는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며 서럽게 눈물을 쏟아냈다. 이제 두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그에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참혹한 과거는 늘 또렷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새벽 6시, 종이 울리면 어서 일어나 조반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앞에 놓인 건 배춧잎 몇 개 뜬 말간 물 한 그릇이었다고 한다. 견딜 수 없는 배고픔에 수용소 주변의 풀을 뜯어먹었고, 그 풀마저도 많은 사람들의 배고픔으로 인해 깨끗이 동이 났다고 한다.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한국군이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들을 인적 없는 곳으로 몰아 사살하고 한꺼번에 묻어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10년, 그는 비인간적인 수용소 생활을 견디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또 한국군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인적 없는 마을로 숨어 지내야 했다고 한다. 인터뷰에 응한 또 다른 분은 그 시절, 그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참혹한 일들을 제발 러시에 정부에 말해달라고 했다. 밝혀서 사과를 받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고 우리나라 정부는 선뜻 그때의 기록을 보여 달라는 입장마저 표명하지 못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레오와 비슷한 나이에 전쟁으로 내몰린 그의 모습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포로가 되었고, 가족에겐 소식 한 장 알릴길 없이 먼 타국으로 끌려간 삶들을 고스란히 당한 자의 몫으로만 돌려야 하는 것일까. 운명이 그랬다고, 운이 없었던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가족은 돌아오지 않는 그가 당연히 전쟁 중 사망한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무고하게 죽었고, 거리엔 살아있는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았다. 최근 한 국회의원이 6·25 당시의 실제 상황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다. 인터넷을 통해 짧게 보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한복 차림의 여인이 무수한 시신들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가족을 찾고 있었다. 교회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불을 질러 버린 자리에 남은 새까맣게 탄 시신들. 억울하고 괴롭고 공포에 어린 표정들이 고스란히 읽혔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뜨거운 불길 안에서 그들의 고함이, 이름이, 육신이 타들어가는 동안……. 전쟁이라는 그 불길 같은 시간 안에서 죽지 못하고 살아남아 배고픔을 느끼고, 삶의 극단에 치닫는 감정을 느낀다는 건 또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을까.

 

레오가 수용소로 떠나기 위해 짐을 싼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처한 현재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에 기대감을 품고 있다. 열일곱의 그는, 어디로 튈지 모를 공을 품고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은 짐짓 비장해 보이기도 두려움에 떠는 듯도 하고, 모든 걸 자포자기 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러시아로 끌려가 오 년간 수용소 생활을 한다. 인권이란 없었고, 모두가 일하는 기계처럼 움직였다. 죽음을 선택할 수조차 없는 삶, 온갖 해충들이 난무하고 서로가 가진 빵을 탐하며 늘 ‘배고픈 천사’에 붙잡혀 죽음 앞까지 내몰리다 결국은 살고 마는 사람들. 소금과 설탕 한 줌이 절실한, 그로 인해 극도의 분노와 살의를 느끼는 사람들.
다른 곳에서 왔지만 같은 처지에 내몰린 그들은 그들만의 군락을 꾸린다. 그들만의 규칙과 방법을 가지고서 조금씩 수용소 생활 속에 스며간다. 사람이 가진 무서운 힘이란 게 이것 아닐까? 닥친 상황에 휘둘리다가도 끝내는 인정하고 적응해 간다는 것. 쉴 틈 없이 밀려드는 일과 감시, 배고픔 속에서 그들은 춤추고 숨어 사랑을 나눈다. 아이가 태어난다. 시멘트가 날아가 강제노역자들을 도둑으로 모는 사이로도 권태는 찾아오고, 고향에 대한 향수는 피어오른다. 죽은 자의 주머니를 뒤져 빵을 갖고 옷을 벗겨 입는다. 누구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들만의 암묵적 동의. 서로는 ‘배고프다는 것 말고는 자신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각자의 처지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그들을 버티게 한 것은 지난 날 자신에게 새겨진 추억 같은 것, 되새김질하며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억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 레오의 귓가를 맴돌며 그를 붙잡아준 할머니의 한마디 말처럼. 그리고 한곳에서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과 나누는 몇 마디의 대화, 잠시나마 형성되는 공감대 같은 것이 그들을 죽지 못하게 했다.
한 편, 한 편의 일기를 읽듯 문장들은 그때의 절박했던 심정과 상황을, 눈물도 쉽게 나지 않을 만큼 혹독하게 일상에 훈련되어 가던 사람들의 갈등과 혼란을, 처연하고 담담하게 그려낸다. 자국어를 가지고 글을 쓸 수 없었던 뮐러의 마음과 스스로 기록할 수 없었던 동료 오스카 파스티오르가 강제추방을 당한 자신의 이야기가 맞물려 이 소설은 탄생했다. 그들은 모욕적인 상황의 극한을 경험하기도 했고 기관의 박해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 왔다. 동료의 용기가 없었다면, 또 그가 스스로 글을 썼다면 이토록 절제된 이야기로 더 많은 독자를 만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이 든다.

수용소에서 해제되어 집으로 돌아온 레오는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혼란을 겪었다. 자신을 죽은 것으로 여겨 대리형제를 대려다 놓은 집과 할아버지의 부재, 변한 것은 없는데 그에겐 입안에 모래가 서걱거리는 것처럼 역겹기만 했다. 이제 충분히 먹고 잠들 수 있지만 그에겐 여전히 ‘배고픈 천사’가 떠나지 않는다. 가족들과 나누는 말은 나가고 들어옴에 대한 인사뿐이고, 그마저도 할머니가 먼저 건넸다. 그는 끊임없이 ‘배고픈 천사’와 함께 거리를 돌아다닌다. 궁핍했던 겨울, 수용소의 생활을 그리워하면서. 레오는 끝내 노트를 사서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외면하고 놓임 받고 싶었던 5년 전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넵툰수영장’으로 향하기도 한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갖고 있었지만 지난 5년의 시간동안 ‘약탈당한’ 자신의 시간을 ‘아무도 다시 만들어줄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이전의 ‘피아노’일 뿐이었다. 이젠 소리가 나지 않는.
레오는 돌아와 보낸 육십 년의 시간 동안 ‘나의 귀향이 수용소의 행복을 누그러뜨리지 못했음을 안다.’고 말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먹는다’는 것의 행복을 배웠다고 말한다. ‘입의 행복’,

입의 행복은 혼자 있고 싶어하고 말이 없으며 몸속에서 자란다. 그러나 머리의 행복은 어울리기 좋아하고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방황하는 행복이며 질질 끌리는 행복이다.

- 『숨그네』, ‘수용소의 행복에 대하여’ 부분

그리고 수용소에서 그를 간절하게 만들던 ‘행복’에 대한 그리움은 이 장의 마지막에 드러난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매일같이 다른 허기가 생겨나 채워지기를 기다리지만 나는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나는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줄 수 없다. 나는 배고픔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자부심이 아니라 겸허 때문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전쟁, 이라고 할 때 우리는 싸우는 자들만을 생각한다. 강한 자와 약한 자 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 뒤에 가려져 스스로의 삶을 갉아먹으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비참함은 떠올리지 못한다. 차마 죽지도 못한 그들에겐 사라진 집과 삶의 터전을 잃은 현실밖에 남은 것이 없다. 그 먹먹함이란 어디에도 하소연 할 수 없는 것이리라. 가족의 끼니를 채울 수 없는 생활, 강한 자에게 착취당해야 하는 노동력, 남겨진 사람들조차 죽음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갔다. 전쟁 후 남게 되는 여파는 전쟁만큼 강한 것이다. 수용소로 강제 추방된 사람들 역시 그랬고, 소집 해제 후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 역시 그랬다. 외상후증후군처럼, 그곳의 시간은 시도 때도 없이 살아내려는 사람들을 흔들어 댔다. 그들은 스스로 삶을 놓았고 알코올에 의지했으며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폭력적이 되거나 반미치광이가 되어갔다. 그러나 더욱 그들을 절망으로 내모는 건, 그들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덮으려는 국가의 태도일 것이다. 그들을 위로하고 알아주어야할, 포용해야할 자국이 외면으로 돌아설 때 그들은 더욱 혼란스러움에 격양된다. 흐르는 시간 사이로 과거가 스며들고 흐릿해지면서, 불운했던 사내는 어느새 노인이 되었다. 서로가 쉬쉬하는 역사를 등에 숨기고 그가 보낸 삶이란 다 타고 남은 재처럼 위태로웠을 것이다. 레오는 그 시간을 ‘숨그네’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끔 수용소의 물건들이 무더기로 자신을 덮쳐 자신을 강제수용소로 돌려보내려 하는 환상에 휩싸인다. 헉헉거리며 그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지만 그 시간은 또 다시 그를 덮쳐온다.


어찌 됐든 밤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검은 트렁크를 꾸린다. 나는 그 점을 강조해야만 한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해야만 한다.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내 의지라 할지라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 ‘명아주’ 부분


‘검은 트렁크’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들이 불운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던 시간에 넘겨받은 것일 뿐이고 지금 그것의 주인은 바로 ‘우리’여야 한다.
처음엔 가늠하기 어렵던 레오의 일들이 이제는 선명히 느껴진다. 그것은 그 나라만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의 역사이기도 하다. 어쩌면 나는 이 책을 TV를 통해 본 한국군의 이야기로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에는 어느 한 페이지 접힌 부분이 없다. 그냥 마음으로 따라가 그 페이지를 연다. 그곳엔 여전히 수용소를 벗어나지 못한 레오가 있고, 자국(自國)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제 노인이 된 한국인의 모습이 있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처음으로 느꼈다. 교과서를 통해 매일 언급되었던 역사는 머릿속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데, 우연히 읽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내 치부를 밝혔고, 죄책감에 휩싸이게 했고,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먼 과거에 까지 ‘감정’을 갖게 했다. 그들이 보낸 시간을 잊는 것만큼, 그들에게 잔혹한 일은 없을 것이다.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수용소에 징집되었던 수감자로만 이름을 남긴 한국군의 일을 러시아 정부가 어서 인정하고, 그들의 삶을 애도해 주길 소망한다. 그들의 억울하고 고통스런 삶으로 이어진 오늘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우리와 더불어 가야 한다. 그것이 사라져 스스로의 삶을 피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노고가 잊혀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의 과거가 사라질 때, 우리는 뿌리를 잃은 식물처럼 싱싱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하게 길러질 것이다. 그렇게 늙어 다시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무의미한 삶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새삼 헤르타 뮐러 작가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써 내려가야만 했던 소설들의 이유가 또렷이 느껴진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과 국가의 외면 속에서 스스로를 위해 글을 썼다고 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국가를 비방한다고 여긴 루마니아는 그녀를 끝까지 제압하려 했지만 세계는 그녀를 주시하고 그녀가 쓴 소설을 인정하며 그 뜻을 드높이 샀다. 그것은 그녀의 책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오명을 반복하지 않고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뮐러의 글은 분명, 그녀의 나라를 살릴 것이다. 사라져가는 역사가 우리 앞에 놓일 때, 그 시간이 우리와 더불어 다음 세대에게로 끝없이 흘러들어갈 때 역사는 현재를 바꾸는 윤활제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책을 펼친다. 나와 더불어 가야할 역사를 위하여, 내가 다른 이에게 전해야 할 모든 말들을 위하여.    

이 책은 나를 '시작'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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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능성이다 - 기적의 트럼펫 소년 패트릭 헨리의 열정 행진곡
패트릭 헨리 휴스 외 지음, 이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매일 꿈꾸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좀더 특별하기를. 나를 행복하게 할 무언가가 짠, 하고 나타나 주기를. 그렇게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20대 후반이 되었고, 한 사람의 아내이며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은 건 어떤 힘으로부터의 끌림이었을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한 문장도 되지 않는 짧은 단어, 혹은 숫자로부터의 시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열정’, ‘120cm’에 숨겨진 기적 같은 이야기. 이 책을 스치듯 처음 대면했을 때 제목만으로 어느 유명인사의 성공담일 것이라 추측하며 가볍게 넘겨버린 일이 있었다. 그렇게 이 책을 놓쳐버렸다면 나는 내게 이루어진 수많은 꿈을 보지 못하고, 그 축복들에 일일이 감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함과 동시에 나는 부옇게 흐려진 안경을 닦고 이제 막 하늘을 본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었다. 책을 덮으면서 이 책이 나를 찾아 온 것 또한 커다란 축복처럼 느껴졌다.

 패트릭 헨리 휴즈. 나는 어떤 매체에서도 그를 만나본 적 없으며,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우연히 내게 작용한 그의 ‘힘’으로 나는 이 책을 만났고, 그의 이름을 가슴에 새겼으며, 그를 응원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나보다 5살이 어린 그를, 일상생활을 하는데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요하는 그를, 하지만 나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그를 이렇게 만나게 된 건 분명 내게도 ‘가능성’이 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늘 갖고 있던 패배의식과 불만으로 눌려있던 가능성이 드디어 내 안에서 꿈틀거리며 그와 나를 대면시켰다.     

 그와 나를 비교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나는 두 발로 설 수 있고, 식탁 위의 포크를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아 찾아 쥘 수 있고, 비가 오는 날 거실 한 켠에서 휠체어의 바퀴가 마르길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모른 채 삶이 준 레몬들에 분노하고 실망하면서 나는 매번 내일을 맞이했다. 어떤 순간에 ‘집중’하는 힘도 없고 무언가를 바꾸려는 노력도 없이 시간에 채찍질 당한다고만 생각했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을 보내고 저녁이 되면 내게 근접했던 불행과 손해들을 가슴에 켜켜이 쌓은 채 잠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행복을 마음에 담기에 얼마나 인색했는지 모른다.
 삶은 내게 레몬보다는 더 많은 달디 단 과일을 주었던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사고는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저녁 10시경, 부모님은 함께 식당 일을 마치고 차를 몰아 집으로 오는 길이셨다. 집에 근접한 도로에서 좌회전을 위해 차선을 변경하고 있을 때 덤프트럭이 중앙선을 넘었다. 아버지는 트럭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오른쪽으로 세게 틀었고, 그 속도에 부친 봉고차는 인도를 넘어 달리다 전봇대를 들이받고 멈춰 섰다. 모두가 운전자가 사망했을 거라 판단했고, 중환자실이 부족했던 병원 때문에 부모는 각자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 시간, 나는 늦은 퇴근길로 버스 뒷 자석에 앉아 머리를 유리창에 기댄 채 모자란 잠을 자려던 참이었다. 핸드폰의 낯선 번호, 그리고 누구의 보호자 되시냐는 말. 나는 누구든 망치로 내 머리를 내리쳐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게 수화기 너머에서 전달된 구급대원의 말을 다시 해주었으면 싶었다. 내가 부모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을 그때까지 한 번도 인식해본 적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팔과 다리, 손가락에 골절을 입었지만 한 번의 수술과 치료로 빠르게 회복해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얼굴과 양팔, 양다리, 머리까지 전신 골절을 입었고, 의식까지 없던 상태였다.
 사건을 수습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빚들이 나를 압박해왔다. 집을 담보로 쓴 빚은 당장 우리에게서 집을 빼앗을 것처럼 으르렁댔다. 스물다섯의 나를 사람들은 무시하고 깔보았다. 사람이 그토록 무섭고 죽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내게 떨어진 레몬들은 내 통장을 모두 갉아먹었고, 내 자존심을 갉아먹었다. 나는 그 시간을 견디며 강해졌다. 삶에 대해 ‘악’을 쓰며 이겨보겠다는 억지마음이 생긴 것이다. 물론 그 마음이 행복했을 리 없다. 여전히 불행했고, 사람이 싫었고, 내가 책임져야 할 가족으로 인해 혼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 시간을 지나와 다시 떠올려 보는 지금, 그 때의 나는 혼자이지만은 않았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외숙모, 이모, 고모께서 어려운 형편에도 조금씩 돈을 모아 급한사정을 도와주셨다. 그리고 내가 1년이나마 직장생활을 하며 고스란히 모아놓은 돈이 있었고, 보험과 아버지가 의식을 찾고 조금씩 쾌차해 가고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내가 간절히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로 돌이키려 노력했던 만큼 크고 작은 문제들은 천천히 제 자리를 찾아갔다. 아버진 지금도 병원 생활을 하고 계신다. 여전히 불편한 몸이시지만 사고가 일어나기 전 바쁘게 보내던 시간들로 어색했던 나와 아버지 사이에 마주보고 웃는 일이 잦아졌다. 아버지는 어서 스스로 걸어 집으로 돌아가길 꿈꾸신다. 스스로 걷는 일은 어렵겠지만 아버지는 지팡이에 의지해 곧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고가 있었던 그때만큼 간절하게, 매일 닥쳐오는 각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 순간에 몰입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울고불고 하면서도, 내게 이런 시련을 준 모든 것들이 원망스럽기만 하면서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그래야 우리 가족이 지켜질 수 있었으니까. 그래야 살 수 있었으니까. 당장의 것들을 인정하고 해결하려 노력하자 시간은 흐를수록 내 편에 서서 움직여 주었다. 삶이 내게 조금씩 틈을 주고 또다른 희망을 꿈꾸게 했다.

 그즈음 지금의 남편을 만나 힘들었던 시간을 함께 견뎠고, 내 전부인 ‘아들’을 얻었다. 헨리의 아버지가 그랬듯 이제 15개월이 된 나의 아들은 내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나를 성장시켰다.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이, 하루를 잘 보내고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는 일이, 함께 잠드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알게 했다. 내 마음에서 버려야 할 욕심과 간직해야 할 꿈을 구분할 수 있게 했고,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 오늘을 얼마나 값지게 살아야 하는지도 깨닫게 했다. 처음엔 육아에 빼앗기는 시간이 아까워 억울한 마음도 들었고, 아이가 때쓰거나 우는 일에 화내며 엄하게 굴기도 했다. 그 행동에 스스로 실망하며 자책도 했다. 지금도 끝없는 집안일을 하다보면 그런 마음이 들지만 헨리의 부모님을 통해 좀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이가 내 곁으로 온 것만으로도 무엇과 비할 수 없는 큰 ‘축복’이라는 것을.  

 이젠 좀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내게 이뤄진 많은 꿈들을, 그 특별함을. 누군가는 갖지 못한 ‘축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그 뒤로 나는 내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적어도 준비자세를 취할 마음가짐은 갖게 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소명’과 내가 할 수 있는 ‘한계’에까지 부딪혀 볼 용기도 얻었다.

 누구나 갖고 있지만 볼 수 없어 그 힘을 모르게 되는 ‘마음’. 패트릭 헨리가 스스로의 가능성을 키우고 천천히 자신의 꿈에 다가가게 된 건 스스로를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특별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 보다 덜 가진 무엇에 절망하지 않고 남들과는 다르게 자신에게만 주어진 축복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 패트릭 헨리는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을 다해 희망을 길어 올렸고, 그 희망을 가득 담아 꿈을 이뤘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다. 패트릭 헨리와 가족이 노력으로 일궈낸 그들의 당연한 결과물인 것이다.
 처음엔 부모의 마음으로 읽었지만 어느새 나는 스스로를 잃어버린 한 사람으로 이 책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 온 시간 속에 여전히 있는, 떠올리기 싫었던 아픈 시간들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 곁에 함께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운 ‘힘’과 ‘축복’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가능성’으로 만드는 힘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걸 누구에게든 전하고 싶다. 내 손에 꼭 쥐고 있으면서 마지막까지 그 힘을 쓰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패트릭 헨리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저마다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가능성’을 깨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가 자신의 삶에 보여준 진심과 삶이 그에게 내어준 ‘축복’은 누구의 힘을 빌려서가 아닌 그가 스스로 만든 것이었고, 지금처럼 꿈꾸며 희망하고 노력하는 이상 그에게 기적 같은 일들은 계속 될 것이다. 축복은 희망을 꿈꾸고 오늘을 감사하는 마음의 꼬리를 물고 온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가 갖지 못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곧 가까운 시간 안에 멋진 일들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 기대한다.   

  패트릭 헨리가 끝없는 희망의 연주를 시작한 것처럼.   

  나에겐, 나의 아이가 몸을 뒤집고 기고 걷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엄마’라고 나를 부른 것처럼. 너무 커서 내 몫이 아닌 듯했던 그 축복들이 불과 아이를 키운 15개월 안에서 모두 일어난 것처럼.  

 부족한 내가 쏟은 작은 마음과 사랑으로 내가 얻은 것은 너무 많다는 걸 알았다. 가진 것에 감사하고 더욱 나누며 나의 가족과 스스로에게 더욱 멋진 내가 되고 싶다. 그리고 꼭, 나의 아이가 자신의 ‘가능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엄마의 몫을 다할 것이다. 그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지. 
 

 내일이 기다려진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행복해 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는데
지혜로와 지라고 가난함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다.

구한 것 하나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을 들어 주셨다.
 

하나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맘속에 진작에 표현 못한 기도는 다 들어 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 성프란체스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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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프랑스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드니 디드로 외 지음, 이규현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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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니 표지의 물음표와 쉼표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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