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잃어버린 책들의 묘지라는 독특한 곳으로 새벽안개를 뚫고 가는 부자의 발걸음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결코 읽기 만만한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재미있다 또는 재미 없다로 논할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관점은 일관되게 미스터리만을 따라갔다. <바람의 그림자>의 저자를 찾아 나서는 어린 다니엘의 모습만을 쫓다가 나는 이 책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잃고 말았다. 그것은 인생이다.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것은 반복되는 인생과 역사다.

 

그것들은 때대로 쓴 담즙이 올라오는 역한 느낌을 주지만 또 그런 것들의 다른 나머지가 있기에 우리의 삶이 이어지는 것이다.

 

한 남자의 인생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두 남자의 인생이야기이고 모든 사람들의 인생이야기이기도 한 이 작품은 가장 안 좋은 시기에, 가장 안 좋은 인연을 맺어,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마지막에야 비로소 후회하게 되는 바로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을 조각조각 살펴보면 이 작품의 시기에 대한 감상이 있을 수 있다. 전쟁과 역사를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잊는 다고 말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과 독재라는 같은 길을 걸은 우리의 모습을 본다. 전쟁과 역사의 반성과 청산 없이 후세 사람들의 인식이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우리가 지금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 아무리 자판기 뒤에 한 남자를 기리는 기념패를 가리고 있다고는 해도 그가 거기 있는 것처럼 말이다.

 

또 부모와 자식이라는 세대간 소통의 감상이 있다. 두 아들이 있다. 한 아들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어둡고 슬프게 자라 어른이 저지른 과오로 인생을 망친다. 또 다른 아들은 비록 어머니를 일찍 여의였으나 아버지의 속 깊은 사랑 속에 자라난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의 사랑은 모두 비슷한 속정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나쁜 사람은 없는 법이라고... 하지만 나쁘지는 않지만 자식에게서 자신들의 미래를 바라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과오는 남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내 아버지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라 느낄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인 아버지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다니엘의 아버지 같은 아들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주변인들의 삶이 있다. 그들 하나하나의 각기 다른 모습의 삶이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소년이, 소년에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 한 사람이 아닌 아주 많은 좋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바람의 그림자는 극중 미스터리한 작가의 책 제목이기도 하고 우리 인생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린 모두 어디서 불어오는지도 모르는 바람에 날리고 휩쓸리고 그림자 속에 갇히는 존재 아니던가... 인연이라는 바람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두가 책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다니엘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 갔을 때 아버지는 말한다.

 

"이곳은 신비한 곳이야, 다니엘. 일종의 성전이지. 네가 보는 책들, 한권 한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말이야. 한 권의 책이 새 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 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 때마다, 그 영혼은 자라고 강해진단다. 벌써 오래 전에 아빠의 아버지가 나를 이곳에 처음 데려왔을 때도 이곳은 이미 오래된 곳이었지. 아마 이 도시만큼이나 낡았을 거야. 이곳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누가 이곳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 네 할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셨던 걸 네게 말해주마. 도서관이 하나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책 한 권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알고 있는 우리의 수호자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지. 가게에서 우리들은 책을 사고 팔지만 사실 책들은 주인이 없는 거란다. 여기서 네가 보는 한권 한권의 책이 누군가에겐 가장 좋은 친구였었지. 지금은 단지 우리들만 있지만 말이다....“

 

내 영혼이 담긴 책들은 내 손을 거쳐 누군가에게 가기도 하고 또 내 영혼만을 담기도 하고 누군가의 영혼이 담긴 책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활자만을 소유한다는 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 그보다 더 무의미한 것은 그것마저 소유하지 못하는 것, 공유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

 

아마도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책에도 영혼이 있다는 것, 우리가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는 것 아닌가 싶다. 이것은 중세 금서들의 불태움과 다르지 않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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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4-16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방에 가면 그런 생각을 해요. 이 책의 주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에게" 선물한 사람의 글씨가 또박또박 써 있는 책을 보면서...
또는 책을 읽다가 낙서한 글들을 보면서....
전...가끔 보다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2년 전에 제가 차를 팔았는데요, 그 차는 어떤 주인을 만났을까? 어떤 운명이 되었을까?

물만두 2005-04-1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책에서 나는 알싸한 책특유의 냄새를 맡으면 그 속에 혹 전 주인의 체취가 담겨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을산 2005-04-16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너무 멋진 페이퍼였습니다.

물만두 2005-04-16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야요 ㅠ.ㅠ;;;

moonnight 2005-04-16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ㅠㅠ 책들이 각자의 영혼을 간직한 채 숨을 죽이고서 새로운 인연을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 정말 가슴에 와닿습니다. 역사를 바탕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이리라 생각했었는데 만두님의 리뷰를 읽으니 그 외의 플러스알파가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물만두 2005-04-16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감사합니다. 책은 리뷰보다 백배는 낫습니다. 읽고 판단하시길...

인터라겐 2005-05-1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요...문학과 지성사의 자체 이벤트인줄알았어요... 음 저도 보고있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의견을 보이는게 참 재밌어요... 축하드려요...물만두님..

비로그인 2006-11-10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땡스투^^

물만두 2006-11-10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 글 지금 봤어요. 감사합니다^^;;;
주드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