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고 나서 어떤 작품은 한번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또 읽을 기회란 좀처럼 갖기 힘들다. 너무 많은 책들이 나오고 그 책들을 한번 읽기에도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주 운 좋게 예전에 읽었었다. 읽고 나서 하라 료라는 작가, 사와자키 탐정에게 반하고 말았다. 이런 작품을 나오게 해준 레이먼드 챈들러와 필립 말로에게 감사했을 정도였다. 재미있다거나 대단하다는 것만으로 모자라는 대단한 작품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명작이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모든 하드보일드 탐정의 시작은 필립 말로부터고 레이먼드 챈들러가 추리문학에 끼친 영향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하고 그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 하라 료가 레이먼드 챈들러에서 벗어나 대가가 되었음을, 사와자키 탐정이 필립 말로와 같이 시니컬하고 고독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그만의 독특함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를 일본의 레이먼드 챈들러가 아닌 일본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거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작품은 제 102회 나오키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나오키상을 수상한 작품 가운데 추리 소설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은 권위 있는 문학상에서 추리 소설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우리와는 참 많이 다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 처음 등장한 사와자키 탐정이 두번째 등장하는 이 작품은 하라 료라는 작가, 사와자키라는 탐정의 이름을 독자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키게 되는 작품이다. 전작보다 더 치밀함을 보이고 하드보일드와 본격 미스터리를 절묘하게 구성한 작가의 뛰어난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일본에 한 획을 그은 걸작이기 때문이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각광받던 한 소녀, 마카베 사야카가 유괴된다. 공교롭게도 범인은 탐정 사와자키를 미끼로 이용을 한다. 그리고 그에게 돈을 운반하게 시키는데 사와자키는 돈을 운반하다가 두 명의 오토바이 폭주족같은 이들에게 맞고 쓰러져서 다음 운반 장소로 가지 못하게 된다. 설상가상 돈은 그때 누군가 훔친 뒤였다. 훔친 자가 범인인지 아닌지고 경찰은 판단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범인은 연락을 끊고 그것이 경찰에서 사와자키를 더욱 공범으로 의심하게 만들게 된다. 죄책감이 든 사와자키는 이 일로 사건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즈음 소녀의 외삼촌으로부터 자신의 아이들에 대한 알리바이 조사를 의뢰 받는다. 조사를 하던 중 또 다시 범인의 전화가 걸려 오고 그 장소에서 사와자키는 소녀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동료 탐정이었던 전직 경찰 와타나베가 야쿠자의 돈과 경찰에게 넘길 각성제를 들고 도망간 이후 사와자키는 경찰과 야쿠자와 미묘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사와자키를 공범으로 봤던 것이다. 그 사건은 언제나 사와자키를 따라다니고 와타나베는 이따금 종이 비행기를 접어 그에게 근황을 알린다. 사와자키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없다. 그가 독신이라는 것 말고는. 하지만 점점 이 독특한 탐정 사와자키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냉철한 모습 뒤에 감춰진 따뜻한 감성이 작가의 하드보일드에는 어울리지 않는 문장들과 함께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공들인 문장, 세밀한 묘사가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작가의 느림의 미학을 느끼게 하고 있다.  

작품은 사와자키의 끈질긴 탐문 조사를 따르고 있다. 경찰이 헛다리를 짚는 동안 사와자키는 사건의 본질을 꾀뚫어보고 마지막에 탐정 특유의 권리인 모든 진상을 밝힌다. 이 작품은 1980년대 말에 발표된 작품이다. 하지만 모든 걸작이 그렇듯이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왜 독자들이 이 느리게 글을 쓰는 작가의 작품을 끈기있게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지를 알려준다. 그것이 바로 장편 단 4권으로 거장이 된 하라 료가 지닌 힘이다. 그나저나 와타나베는 언제까지 사와자키의 주변만을 맴돌건지, 언제쯤 사와자키는 와타나베의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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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07-0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헉 하게 만드네요 ^^

물만두 2009-07-09 11:36   좋아요 0 | URL
정말 헉하게 좋은 작품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7-09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좋아너무좋아요
읽어야겠어요.

물만두 2009-07-09 11:37   좋아요 0 | URL
당근당근입니다.

카스피 2009-07-09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라 료의 작품은 읽는이를 즐겁게 하지만 4편밖에 없어서 좀 안타깝다고들 하더군요^^

물만두 2009-07-09 11:38   좋아요 0 | URL
네, 안타까운만큼 더 좋은 것 같아요.
단편집까지 몽땅 출판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7-09 11:41   좋아요 0 | URL
아니 네편 밖에 없다구요!
아쉬워라..

물만두 2009-07-09 19:09   좋아요 0 | URL
계속 더 쓰시겠지요.
나온 것만 장편이 4권입니다.

Koni 2009-07-1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면 제목이 더 짠해요. 1편 보고 꽤 쿨한 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라 료의 장편이 4편뿐이라니 너무하군요! ㅠ_ㅠ 그거라도 빨리빨리 번역되면 좋겠어요.

물만두 2009-07-13 11:27   좋아요 0 | URL
쿨하면서 감성적인 탐정이죠.
3편은 나올겁니다. 내년쯤에 나오려나요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