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와 불멸의 오랑우탄
루이스 페르난두 베리시무 지음, 김라합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보르헤스라는 제목만으로도 알았어야 했다. 이 책을 읽기에 내 이해력이 부족할 거라는 것을. 물론 추리적으로 접근하면 처음에 범인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런 트릭이야 너무 흔하기 때문에 이젠 신본격 추리소설을 쓰는 일본 작가들을 빼면 누구도 이런 구식 트릭을 구사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제목에서 나와 있듯이 보르헤스라는 작가가 추구했던 사실적 환상 문학이다. 남미 작가들 대부분이 이런 식의 구성을 좋아하다보니 아주 제대로 그 사실과 환상 사이의 늪에 빠져버렸다. 책의 시작이 보르헤스에 대한 편지처럼 펼쳐지는 것도 흥미롭다. 여기에 보르헤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포우를 연구하는 클럽이 등장하니 포우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고 그와 비교되는 러브크래프트는 아주 이 작품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 이 작품을 보기 전에 보르헤스와 포우,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읽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들만 존재한다면 이 작은 책이 너무도 뻔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들과 함께 역사를 넘나드는 보르헤스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존 디와 그의 도서관과 불멸의 오랑우탄에 대해서 말이다. 보르헤스를 작가가 등장시켜 독자를 어지럽게 만들다니 이제 보르헤스는 내게 멀미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것만 같다.


보르헤스의 추리, 보르헤스를 탐정으로 등장시키는 대담함을 보이다니 작가의 배짱에 놀랐다. 보르헤스의 그 머리를 다 담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을 어떻게 견디었는지 아무튼 그로인해 보르헤스가 들려주는 포우와 러브크래프트와 쟁윌, 그리고 존 디와 보헤미안의 도서관과 신비주의 종교와 문자가 가지는 신비한 힘, 거기에 암호까지 등장시키고.

 

여기서 우리는 알게 된다. 작가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말이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것도 글로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쓴 글은 허구라 할지라도 나중에 그것이 진짜로 뒤바뀌는 경우도 발생한다. 오랑우탄이 글로써 불멸하려 했던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허구는 허구여야 한다. 그것이 독자에게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기를 작가는 간절히 바라지만 그것이 불멸의 진실성으로 남아서는 안 되고 그렇게 각인되어 왜곡되어서도 안 된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라 생각된다.

 

허구와 왜곡은 다르다. 작가는 자신이 불멸의 오랑우탄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보르헤스가 거울을 두려워한 것도 이런 뜻은 아니었을까. 거울은 같은 것을 만들어내지만 사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비춰주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거울을 보고 거꾸로 보이는 상을 진짜라고 믿게 된다면 그것을 보르헤스라 믿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작가는 그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작가가 꼬리를 잡아서도 잡혀서도 안 된다는 얘기다.

 

작가는 단순한 플롯의 작품 속에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한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제목에 뚜렷이 나타나있다. 보르헤스라는 거울과 불멸의 오랑우탄이라는 있어서는 안 되는 글 쓰는 이들의 자세다. 이렇게 명쾌하고 단순하게 그것을 말하는 작가의 실력이 놀랍다. 다음 작품이 정말 기대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좋은 작가를 만나게 된다. 독자로써 정말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다음 작품은 좀 쉽게 나왔으면 좋겠다. 아이고, 어지러워라... 그 놈의 오랑우탄 꼬리 한번 빙빙 우주적으로 잘도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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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2-16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작가론, 글쓰기론에 대한 인식이 마음에 듭니다.
추천 누르는 손 막지 마시어요^^

물만두 2007-02-16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늘 저만의 해석이라는 거 아시죠^^;;; 읽어보세요. 꽤 근사합니다.

mong 2007-02-2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마저 읽었어요!
아...좋던데요~~ ^^

물만두 2007-02-20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님 저도 좋았어요^^

파란여우 2007-02-20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심오한 '거울의 상'까지!
음, 여우꼬리도 조심해야겠구려

물만두 2007-02-20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성님 꼬리는 늘 잡고 싶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