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라이징
토머스 해리스 지음, 박슬라 옮김 / 창해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를 읽지 않은 나로서는 작가가 무라사키 시키부와 <겐지 이야기>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한니발의 숙모로 일본 여인 이름을 무라사키 시키부라고 한 것에 대해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그것이 한니발이 어린 시절에 겪은 2차 대전이라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 때문에 그의 비극은 시작된 것이라고 말하려는 의도였다면 명백하게 실패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레이디 무라사키는 한니발과의 만남에서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의 고향 히로시마도 큰 피해를 입었다고. 피해를 입은 사람끼리 도우며 살아보자고. 작가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공부를 좀 더 했더라면 그냥 <겐지 이야기>라는 좋은 작품을 쓴 작가에 대한 충분한 보답이 되었을 텐데 거기에 일본인도 피해자라는 시각을 입혔으니 그렇잖아도 불쾌한 작품이 더 불쾌하게 되고 말았다.

 

처음 이 작품에 내가 기대했던 것은 그래도 어린 한니발에 대한 슬픔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였는데 순식간에 그런 감정은 사라졌다. 마치 한니발이 처음에는 여동생을 잃은 마음에 실어증에 걸리고 복수심에 불탔던 것이 나중에는 살인 그 자체를 즐기게 되는 괴물로만 남게 되는 것과 같이 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한니발에게 복수가 중요했던 것은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그루타스의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쁜 인간의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작품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 그들이나 얍삽한 인간들은 자신의 신분을 잘도 숨기고 유리한 쪽으로 재빠르게 붙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붙은 쪽은 돈과 권력이 있는 곳이다. 어디나 이것은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다.

 

한니발은 자신을 잡으려는 경찰에게 그가 잡은 죄수가 사형당하기 전에 그에게 한 말을 들려준다. “그때 경찰들은 어디에 있었나요?” 어린 한니발과 여동생 둘이서 짐승만도 못한 이들에게 붙잡혔을 때 그 누구도 없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실어 나를 때도 그 누구도 없었다. 종군위안부들이 끌려갈 때도 그 누구도 없었다. 그것 또한 한니발이 인간이기를 스스로 벗어던지게 만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여기에 레이디 무라사키의 포필 형사에 대한 의존이 결정적으로 한니발에게 그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아닌가 싶다.

 

작가는 좋은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좋지만 역사에 대해 쓸 때는 좀 더 알아보고 써야 한다. 픽션도 정도껏이다. 우리와 상관없는 이조차도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으니 책을 단지 책으로만 봐야 한다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다.

 

한니발이 괴물이 되기까지를 너무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딴 생각을 하고 말았다. 우리 옆에도 그런 괴물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방치한 잘못을 어떻게 할지... 한번 만들어진 괴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니발도 결국은 유유자적 도망가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무리 어린 시절의 상처가 컸다고 할지라도 같이 겪은 다른 사람은 그렇게 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한니발 자체의 문제가 된다. 그는 스스로 인간이라는 사회적 관습과 도덕적 책임을 벗어던졌기 때문이다. 전쟁 때는 묵인되는 것이 개인에게는 왜 묵인될 수 없느냐고 말하는 것 같지만.

 

나는 아직도 <레드 드래곤>에서 한니발이 프로파일러에게 한 일을 용서하지 못한다. 누구도 자신의 과거의 삶 때문에 타인의 삶을 망가트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괴물의 탄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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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7-02-15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자출신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네멋대로 풀어라'인가보네요.
'한니발', '검은 일요일' 등 '양들의 침묵'을 말고는 거의 실망스러웠는데.. 어째 후속작도 느낌이 영~ -ㅗ-

물만두 2007-02-15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요나라님 음... 한니발보다는 낫습니다. 제 사견이 제 객관성을 떨어뜨렸지만 저두 사실은 그저 그랬습니다. 단지 한권으로 나왔다는 점이 제일 맘에 드네요.

soyo12 2007-02-15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한권으로 나온 것이 정말 좋아요.^.^ 그런데 점점 필력이 약해지는 느낌이 들어, 아 그만쓰셔야겠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물만두 2007-02-15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요님 이 책 최대의 장점입니다^^ 저두 미툽니다요^^

다락방 2007-03-0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을 하지 않을수가 없어요. 정말 제 맘에 쏙 드는 리뷰예요. 물만두님, 화이팅!!

물만두 2007-03-0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감사합니당.^^

sayonara 2007-04-1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방금 다 읽었습니다. 아아~ 도저히 좋은 리뷰는 못 쓰겠습니다.
'죽음의 키스'라는 엄청난 작품으로 데뷔해서 계속 헤매다가 결국 '슬리버'따위나 끄적였던 아이라 레빈이 생각납니다. ㅠㅠ

물만두 2007-04-1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요나라님 좀 그렇죠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