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는 이름이 없는데, 이는 우리의 어휘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을 큰 소리로 전하는 것은, 
이야기꾼이 그렇게 이야기를 전하는 행위를 통해 이름 없는 어떤 사건을 익숙하고 친숙한 것으로 
바꾸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밀함을 가까움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고, 또한 가까움은 함께 나누었던 경험의 양과 연관시키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 
서로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도 친밀함을 공유할 수 있다. 주고받는 눈빛에 담긴 친밀함, 끄덕이는 고개, 미소, 어깨를 으쓱하는 행동에 담긴 친밀함. 
몇 분 동안 노래 한 곡이 불리고, 거기에 함께 귀를 기울이는 시간 동안 지속되는 가까움. 
삶에 대한 어떤 합의, 아무런 조건도 없는 합의, 노래 주위에서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공유되는 어떤 결론.

대부분의 공식 담론과 논평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겪고 상상하는 일들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미디어는 그렇게 생겨난 침묵을 채우기 위해 보잘것없는각적인 여흥을 제공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침묵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부당한 세상에 대해 서로 질문을 던지게끔
자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지도자나 미디어에 등장하는 논객들은 우리가 겪고있는 일들에 대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이야기한다. 그건 무슨 닭들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고급 금융용어들이다.

오늘날 살아있음, 혹은 무언가 되어 가고 있음을
산문으로 표현하거나 정리하는 일은 어렵다.
담론의 형식으로서 산문은 최소한, 확립된 의미의 연속성이 있을 때 가능하다.산문은 주변의 서로 다른 관점이나 의견들 사이의 교환이며, 공통의, 설명적인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그런 공통의 언어는 대부분의 공적 담론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일시적이지만, 역사적이기도 한 상실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래는 이러한 역사적 순간에 살아 있는 경험, 혹은 무언가 되어 가는 경험을 표현할 수 있다. 심지어 옛날 노래라고 해도 가능하다.
왜일까. 노래가 자족적이기 때문이며, 노래는 역사적 시간을 두 팔로 감싸 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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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시인 가르시인 로르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대중 강연에서 엘 두엔데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든 예술은 두엔데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음악이나 무용, 혹은 시 낭송회에서는 그것을 해석하는 살아있는 몸이 필요합니다. 
그런 예술들은 영원히 새로 태어났다 사라져 가는 형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눈앞의 현재에만 그 윤곽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엘 두엔데는 모래 위에 부는 바람처럼 
무용수의 몸에 작용합니다. 그것은 마법처럼 평범한 소녀를 황홀경에 빠진 여인으로 만들고, 술집 앞에서 구호품을 구걸하는 상심한 노인의 볼에 소년 같은 생기가 떠오르게 하고, 여인의 머리칼에 한밤의 항구 냄새를 심어 줍니다. 

매순간마다 엘 두엔데에 사로잡힌 공연자의 
손짓은, 모든 시대 모든 춤의 모태가 된 
그 동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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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를 추는 사람들은 ‘엘 두엔데 el duende‘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엔데는 어떤 질質, 공연을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울림이다. 

그것은 공연자가 자신의 바깥에서 일련의 충동에 사로잡히고, 그 영향력 안에서 움직일 때 나오는 것이다. 

두엔데는 과거에서 온 유령이다. 유령은 현재에 찾아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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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인들, 로비스트들, 다국적 투기 자본이 지구촌의 갈 길을 정하는 최고 결정권자가 되었다. 
그게 ‘세계화‘다.
신자유주의의 독단은 전통적인 정치학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렸다.
의회 정치인들은 무력해졌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뿐이다. 
미디어도 똑같이 공허하고 텅 빈 언어를 이어받았다. 유럽, 국제적 연대, 독립 같은 용어는 
쓸모없고, 내용도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국제적인 뉴스를 전할 때 약어들을 남발하는 것 역시, 이 내용 없음을 향한 큰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제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것은 눈앞에 닥친 다음 차례의 습득들뿐이다. 다음 거래, 다음 융자, 
소비자들의 경우에는 다음 구매.

역사에 대한 어떤 감각, 과거와 미래를 잇는 그 감각은 완전히 말살되었거나 있더라도 주변화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일종의 역사적 외로움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프랑스어에는길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 S.D. F Sans Domicile Fixe ( 일정한주거지가 없는 이라는 뜻 옮긴이)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는역사적 S.D.F가 될지도 모른다는 끊임없는 압박 아래 살고 있다. 죽은 자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를 받아들이는 인정된 의식이 이제 더이상 없다.

 매일매일의 삶은 있지만 그걸 둘러싸고 있는 건 공백이고, 그 공백 안에서 수백만 명의 우리는 오늘 홀로 있다. 그리고 그런 고독은 죽음을 벗 삼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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