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최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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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우울한 것은, 버리기에는 충분히 낡지 않은 그녀의 옷가지와 장신구, 필수품과 기념품, 몇 년간 책장에서 머리맡으로 응접실에서 다시 책상으로 자리를 옮기며 그녀를 따라다녔음에도 결국 끝까지 읽지 못한 서너 권의 책들, 죽기 전에는 꼭 읽기로 자신과 약속 했기에 벌써 두 번을 잃거나 잊어 세번째로 다시 구입한 책들, 오래전 그녀가 고향을 떠날 때 투명한 비닐봉지에 넣어가지고 온 이래 한번도 다시 꺼내본 적이 없는 빛바랜 사진과 편지들, 불안과 격정, 기쁨과 실망, 미움과 사랑, 감동과 예감의 이름으로 특수한 날들을 어눌하고 단순하게 기록한, 결국 간헐적일 수밖에 없는 인생의 보고서인 일기장, 첫 면에는 10년전의 어느 날이 표시되어 있으나 글씨가 채워진 마지막 면은 수 달 전의 하루에 멈춘 채 비어있는, 그래봐야 여전히 공책의 반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점점 더 역력히 짧아진 기록들로 채워진, 가장자리에는 때가 묻고 겉장은 무참히 늙어버린 두꺼운 일기장...

- [시설(詩設) - 우울한 날 집어탄 막차 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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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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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자는 나나와 나에게 그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 뒤, 언제고 그런 식으로 중단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덧붙였다.
너희의 아버지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가 특별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은 아니란다.
그게 인생의 본질이란다.
허망하고.
그런 것이 인간의 삶이므로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단다.- p.12

그녀는 세계란 원한으로 가득하며 그런 세계에 사는 일이란 고통스러울 뿐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자초해서 그런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필멸, 필멸, 필멸일 뿐인 세계에서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애쓸 일도 없고 발버둥을 쳐봤자 고통을 늘릴 뿐인데.
난리법석을 떨며 살다가도 어느 순간 영문을 모르고 비참하게 죽기나 하면서.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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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미래 Kong's Garden K-픽션 6
황정은 지음, 전승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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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하다. 여전히 직장에 다니고 사람들 틈에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의 수치스러운 일을 겪는다. 못 견딜 정도로 수치스러울 때는 그 장소를 떠난 뒤 돌아가지 않는데, 그런 일은 물론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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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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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통해 소개를 받은 남자들은 대체로 65점을 넘어서지 못하는 외모에, 정찰가격 표시제처럼, 저울위에 올리면 누경과 팽팽하게 겨룰만한 몇 가지 현실적 조건을 갖추었으며, 드러난 성격은 무던했지만 가식적이었고 특기는 과대망상, 취미는 착각, 내면은 굳건한 계산속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그렇듯, 남자들 역시 자신에게 과분한 행운을 기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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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죽길, 바라다 소담 한국 현대 소설 4
정수현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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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잘도 첫사랑이 오빠 되고 아빠 된다는데, 재희의 첫사랑은 원수가 됐고, 두번째 사랑은 사기꾼이 됐고, 얼마전까지 현재진행형 이었던 마지막 사랑은 카드 할 부값만을 남겨주고 곧 자신의 친구와 결혼을 한단다. 도대체 왜! 재희의 머릿속에 문득 ‘이상한 선택’을 했던 기억이 솟아올랐다.
"맞아.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 내가 ‘무미건조하지만 긴 인생’을 선택했던 게 분명해. 바보같이."

하지만 세상은 마치 주연은 하나고 조연은 차고넘치는 연극 세계와도 같다. 실제로 세계인구 99퍼센트의 사람들이 조연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조연들은 협박 같은 알람 시계의 기계음과 더불어 아침을 맞이한다. 비몽사몽 샤워기 앞에서 잠을 깨고, 허기 품은 배를 움켜쥐며 대중교통에 몸을 싣는다. 그렇게, 누군가를 비판하며 나 자신을 보호하고, 누군가를 위로하며 정작 나 자신을 안심시키는 편 협함으로 무장한 채 각자의 전쟁터로 향한다. 반나절동안 너덜너덜해진 그들의 몸과 마음은 친구, 애인,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한 끼와 커피 한잔으로는 완벽하게 재충전 될 수 없다. 마치 점차 수명을 다해가는 배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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