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재와 관념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의 두 번째 각론 하나

 하이데거를 잘 모르고 ‘존재’와 ‘존재자’를 잘 모릅니다. 철학이나 수학(물리학)이 어려운 이유는 용어의 개념을 명확하게 잡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논리의 ‘또는 or (논리합)’과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또는’은 다릅니다. ‘운동량’도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물리량이 아닙니다. 따라서 힘이나 에너지보다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둠’ - 김춘수

 촛불을 켜면 면경의 유리알, 의롱의 나전, 어린것들의 눈망울과 입 언저리, 이런 것들이 하나씩 살아난다.
 (이하 생량)


 김춘수님의 어둠에 한정해서 이야기 하면 저는 위의 시詩를 존재와 관념의 인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에 대한 저의 최초의 독서는 <철학의 초대> (‘진리와 지각’ ; pp 73~89)이고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에서 책의 처음에서 오랫동안 설명이 이어집니다.

 자연 과학적인 입장에서 실재가 없다면 그 연구 대상이 허망한 것이지요. 하지만 실재를 알게 된 것은 지각과 사고(기억을 통해 변형된)를 통해서입니다. 장자의 호접몽이나 영화 매트릭스의 경우 지각을 초월한 실재가 있을까 고민을 하지만 이미 과학에서는 결론이 난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전자기를 느낄 수 있는 감각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기가오리가 전기장을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합니다. 알 수 있는 직접적 방법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간접적인 방법은 있습니다. 청각장애가가 음악을 볼 수 있습니다. 음계는 색깔로, 박자는 점등과 소등을 통해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직접 듣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에 궁금했던 것이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빨간색이 다른 사람도 똑 같이 느낄까? 혹시 나는 빨간색을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은 파란색으로, 내가 파란색을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은 빨간색으로 느끼는 것을 아닐까? 한참 뒤에 답을 얻었지만 의문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문학적 관점에서는 위의 논리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여성을 택해서 그녀는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정되고 나면 대체가 불가능합니다.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정자와 난자가 우연에 의해 누군가의 아이가 되지만 그 아이는 다른 우연에 의해 생긴 아이와 다르게 특정됩니다. 철학을 보편성을 지향하지만(이것을 거시 철학?) 개인을 조명한다면 (그렇다면 이것은 미시철학?) 청각장애자에게 소리가 실재하지 않는 것과 동치겠지요.

 ‘꽃’ - 김춘수
 일부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으면서 느낀 또 하나는 제가 서양철학의 매력을 느꼈던 이유가 자연철학이 중심이었다면 (제가 잘 모르는) 근대 이후의 철학이 인문철학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립간 2010-03-08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blog.aladdin.co.kr/maripkahn/2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