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언니가 운영하던 옷가게를 대신 봐주던 시절, 무언가를 사고 싶지만 뭘 골라야 할지 몰라 한참 고민하는 손님들이 가끔 어느 게 좋아보이냐고 묻곤 했다. 그럴 때 나는 대체로 이제껏 시도해보지 못한 옷을 한번 사보라고 권하곤 했다. 내 권유대로 안 입어봤던 무언가를 사는 손님은 적었다고 기억한다. 대체로 익숙한 디자인과 색상을 고른다. 그게 더 편할 것이고 모험에 대한 부담도 적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가끔 그런 작은 곳에서의 일탈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는 더 중요하고 더 큰 문제에 대해서 쉽게 일탈하기는 더 어렵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런 작은 부분에서라도 좀 변화를 줘 보라는 의미였다. 몇 해 전 내가 일년에 한번 내지 두번도 겨우 신을까 말까 한 빨강색 샌들을 샀던 것처럼. 


앞서 말했듯이, 인생의 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훨씬 더 안전한 패를 고르려고 할 것이다. 결혼을 생각할 때, 진로를 결정할 때.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하고 난 다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한다. 누가 궁금해하는 것이 아닌데, 사실은 나 자신을 납득시키고 인정시키는 과정이 필요해서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나름의 면죄부를 준다. 그렇게 타협을 해가기 때문에, 젊어서 진보적인 태도를 보이던 사람도 나이 들어서 보수적인 관점으로 변해가는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조앤을 보면서...


조앤은 바그다드에 있는 딸을 만나러 다녀오는 길에 사막의 호텔에서 발이 묶인 영국 부인이다. 평생 제법 돈을 잘 버는 남편 덕에 호강하고 살았고, 자식들도 그만하면 잘 키웠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는, 그리고 팽팽한 얼굴과 교양으로 무장한 습관까지 스스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부인이라고 여기는 그녀다. 그러나 폭우로 생긴 와디 덕분에 기차는 오지 않고, 갖고 있던 책도 다 읽어버려서 도무지 '생각'말고는 할 게 없는 상황에 떨어지자 그녀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절대 알고 싶어하지 않던 자기 자신의 진면목에 대해서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 없는, 지금껏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자신이라는 사람의 진실에 접근해 갔다. 본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 얼마나 이중적인 얼굴을 했는지, 그 때문에 가족들조차도 얼마나 외로웠는지......


조앤은 바버라에게 애정이 없었다.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었다. 조앤은 딸의 취향이나 요구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아이에게 좋을 만한 일을 자기 흥에 겨워 이기적으로 결정해버렸다. 그녀는 바버라의 친구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고, 그 아이들의 기를 죽였다. 바버라에게는 바그다드로 가는 것이 탈출구처럼 보였을 것이다. -203쪽


세 자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집에 고용된 하인들은 칭찬이라곤 없는, 마음에 안 드는 것에 대한 지적질만 가득한 고용주가 힘겨워 그만두기까지 했다. 그녀의 일관된 태도였다. 


바그다드로의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아픈 딸을 돌보러 온 것이라고 명분을 들이댔지만 진실은 거기서 멀었다.


여행을 한다는 데 마음이 끌렸던 건 아닐까? 신선함에, 새로운 세상을 본다는 사실에? 헌신적인 엄마 노릇을 한다는 데 끌렸던 건 아닐까? 아픈 딸과 심란한 사위에게 환영받는, 매력적이고 모험적인 자신을 기대한 건 아닐까? 이 먼 데까지 달려와 주다니 정말 좋은 분이세요 같은 말을 듣고 싶어서? -204쪽

남편은 그녀가 딸의 집에 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렸다. 딸은 이제 영국으로 돌아간다는 엄마를 형식적으로 안타까워 했지만 그녀가 집에 더 머물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녀의 침범(?)은 오히려 딸 부부의 연대를 돈독히 하게 만들었으니 그녀의 공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농부가 되어 농장을 운영하고 싶던 남편을 설득해서 변호사로 주저앉힌 것이 조앤이었다. 그 덕분에 아이들은 안정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그녀도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고단했고 외로웠다. 아빠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를 아이들은 이해해줄 수가 없었다. 그녀만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녀가 몰랐던 건 당연하다. 알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을. 그러나 그녀만 만족스러웠다. 그런 그녀를 떠나고 싶어서 일찍 시집가버린 딸이 있고, 그런 엄마를 피해 멀리 아프리카 대륙까지 건너가 살고 있는 아들이 있다. 그녀는 자기만의 성에서 홀로 행복하고 홀로 만족해 했다. 지금처럼 그녀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이, 기회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그런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가족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책은 꽤 많은 지면을 덜어서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을 차곡차곡 보여준다. 스스로를 이타적인 인물이라고 여기는 그녀의 지극히 이기적인 삶을, 늘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남에게 보여지는 체면만 챙겼다는 것을, 자신의 기준으로는 비루해 보이는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동정하는 그녀가, 사실은 누구보다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예리한 통찰력을 담아 보여준다. 조앤 말고도 조앤의 친구인 블란치와 로드니가 마음을 준 레슬리 셔스턴 캐릭터도 무척 인상 깊었다. 조앤과 대조적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더 돋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필력이란 이런 것인가 싶어 읽는 내내 감탄했다. 추리 소설의 여왕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꿰뚫어 보는 섬세함이 돋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을 수년 동안 구상했지만, 완성하는 데는 단 삼일만 걸렸을 뿐이고, 단어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출간했다고 한다. 세상에, 천재잖아! 


작가가 주장했듯이, 또 나 역시 동의하듯이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모두들 인정하지만, 정말 그런 시간을 만난다면 누구라도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나와 만나다니, 나를 알아차리다니... 세상에, 그건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닌가. 한발자국 밖에서 들여다 보는 나라는 인간이, 나의 기대와 달리 아주 후지다면 뒷감당이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떨치고 일어나 더 나은 나로 발돋움해야 마땅하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내지 그건 다 이유가 있었던 거야! 라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되돌이표를 걷게 되지 않을까.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인공 조앤이 답답하고 한심하다가도 연민을 느끼게 한다. 봄에, 나 역시 그곳에 없었을까 봐. 앞으로도 거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닐까 봐 두려워서. 조앤처럼 그런 그녀라도 지켜주려고 애쓰는 사람조차도 없을까 봐. 독자를 자기성찰하게 만드는 작가라니, 애거사 크리스티는 괴물이다. 그녀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항복!

당신은 외톨이고 앞으로도 죽 그럴 거야. 하지만 부디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르길 바라. -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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