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13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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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책방 카페에는 이동진이 직접 고르고 한줄 평을 쓴 책들이 꽂혀 있다. 제일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이 책이었는데, 나를 흠뻑 빠지게 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이란 표현은 시인의 것이었다. 그래서 따옴표가 있었던 거구나!

마침 내 가방 속에는 이 시집이 있었다. 


시에 한자가 포함되어 있는 게 좋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 덕분에 천천히 읽을 수 있었다.

너무 쉬운 한글로만 쓰여 있었다면 휙휙 지나쳤을 문장들을 조금 더 음미하면서 다가갈 수 있었다. 

좋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더 무엇을 보태기 어려운 게 바로 시집이다. 

그래도 역시 좋았다는 말은 남겨 본다. 


덧글) 의도하지 않았는데, 좋다고 표시해둔 시 세 편이 모두 '그'로 시작하는구나. 하하핫!

그 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63쪽

그해 가을

그해 가을 나는 아무에게도 편지 보내지 않았지만
늙어 군인 간 친구의 편지 몇 통을 받았다 세상 나무들은
어김없이 동시에 물들었고 풀빛을 지우며 집들은 언덕을
뻗어나가 하늘에 이르렀다 그해 가을 제주산 5년생 말은
제 주인에게 대드는 자가용 운전사를 물어뜯었고 어느
유명 작가는 남미기행문을 연재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여기 계실 줄 몰랐어요
그해 가을 소꿉장난은 국산영화보다 시들했으며 길게
하품하는 입은 더 깊고 울창했다 깃발을 올리거나 내릴
때마다 말뚝처럼 사람들은 든든하게 박혔지만 햄머
휘두르는 소리, 들리지 않았다 그해 가을 모래내 앞
샛강에 젊은 뱀장어가 떠오를 때 파헤쳐진 샛강도 둥둥
떠올랐고 고가도로 공사장의 한 사내는 새 깃털과 같은
속도로 떨어져내렸다 그해 가을 개들이 털갈이할 때
지난 여름 번데기 사 먹고 죽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후미진
골목길을 서성이고 실성한 늙은이와 천부의 백치는
인골로 만든 피리를 불며 밀교승이 되어 돌아왔고 내가
만날 시간을 정하려 할 때 그 여자는 침을 뱉고 돌아섰다
아버지, 새벽에 나가 꿈 속에 돌아오던 아버지,
여기 묻혀 있을 줄이야

그해 가을 나는 세상에서 재미 못 봤다는 투의 말버릇은
버리기로 결심했지만 이 결심도 농담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떨어진 은행잎이나 나둥그러진 매미를 주워
성냥갑 속에 모아두고 나도 누이도 방문을 안으로
잠갔다 그해 가을 나는 어떤 가을도 그해의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아무것도 미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비하시키지도 않는 법을 배워야 했다
아버지, 아버지! 내가 네 아버지냐
그해 가을 나는 살아 온 날들과 살아 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벽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가족들이
이장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해 가을. 가면 뒤의 얼굴은 가면이었다

-66쪽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이성복



어느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벼는 잠들지
못한다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高官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 어느날 갑자기 새는 갓낳은 제 새끼를 쪼아먹고
카바레에서 춤추던 有婦女들 얼굴 가린 채 줄줄이 끌려나오고 어느날
갑자기 내 친구들은 考試에 합격하거나 文壇에 데뷔하거나 美國으로
발령을 받는다 어느날 갑자기 벽돌을 나르던 조랑말이 왼쪽 뒷다리를
삐고 과로한 운전수는 달리는 버스 핸들 앞에서 졸도한다

어느날 갑자기 미류나무는 뿌리채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어느날 갑자기 꽃잎은 발톱으로 변하고 처녀는 養老院으로
가고 엽기 살인범은 불심 검문에서 체포되고 어느날 갑자기 괘종시계는
멎고 내 아버지는 오른팔을 못 쓰고 수도꼭지는 헛돈다


어느날 갑자기 여드름 투성이 소년은 풀 먹인 군복을 입고 돌아오고
조울증의 사내는 종적을 감추고 어느날 갑자기 일흔이 넘은 노파의 배에서
돌덩이 같은 胎兒가 꺼내지고 죽은 줄만 알았던 삼촌이 사할린에서 편지를
보내 온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옆집 아이가 트럭에 깔리고 축대와 뚝에
금이 가고 月給이 오르고 바짓단이 튿어지고 연꽃이 피고 갑자기,
한약방 주인은 國會議員이 된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갑자기, X이 서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주민증을 잃고 주소와 생년월일을까먹고 갑자기,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풀섶 아래 돌쩌귀를 들치면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이
꼬물거리며 죽은 지렁이를 갉아 먹고 얼마나 많은 하얀 개미 알들이 꿈꾸며
흙 한점 묻지 않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지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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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4-07-23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시집인데 갖고 있군요~
이성복 시는 가슴에 콕콕 박히면서 아파요.ㅜ

마노아 2014-07-23 08:23   좋아요 0 | URL
한글자 한글자 콕콕 박으면서 읽게 되더라구요. 좋은 시들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시들은 아픈 시들이 많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