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달리기 푸른숲 역사 동화 7
김해원 지음, 홍정선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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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이라고 늘 찬사받기 일쑤였던 '오월'이 핏빛으로 기억되는 것은 광주의 학살 흔적 때문이었다. 오월의 달리기라는, 운동회를 연상시킬 법도 한 이 책의 제목에서도 서늘함을 느꼈던 것도 바로 책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광주였기 때문이다. 


소아마비 아버지를 둔 명수는 뜀박질을 잘해서 할머니의 자랑거리였고 아버지의 한풀이를 해주는 아들이었다. 전국소년체전 전남 대표 달리기 선수로 뽑힌 명수는 '다크호스'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그 이름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멋진 거라고, 명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합숙소에서 운동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너무 지쳐서 다른 무언가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도 호기심 많고 장난끼 많은 악동들이 몰려 있으니 사단이 아니 날 수가 없다. 몰래 만화책 빌려오기 내기를 하다가 코치님께 딱! 걸려서 단체를 벌을 서기도 했던 아이들. 명수는 자기보다 앞서 달려 결승선을 통과했고, 이후로도 내내 자기를 앞지르는 황정태를 이기는 게 목표였다. 어린이다운 목표이자 나름의 꿈이었다. 라이벌을 이기고, 만화책을 마음껏 빌려 보고, 군것질도 좀 하는... 딱 그만큼의 목표를 이루고 싶던 아이들 앞에 1980년의 광주는 그야말로 지옥의 문이었다.



작품은 광주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단지 그 학살의 순간의 끔찍함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이들 각자가 갖고 있는 내면의 목소리를 끄집어 내었는데, 명수가 시장에서 불편한 다리 때문에 망신을 당한 아버지를 외면했던 부분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머지 않아 아빠를 잃게 될 이 아이가 그때 아버지를 외면했던 자신의 죄책감을 어떻게 견디며 살지 암담했기 때문이다. 



합숙소 6호 방 친구들이 머리를 맞대어서 시내로 나갔던 날이 시작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군인들이 시민들을 구타했고 죄없는 학생들이 군홧발에 사정 없이 짓밟혔다. 한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고,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끔찍한 일들이 눈앞에서 재현되었을 때 아이들이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나가 아까부텀 생각혔는디, 아무래도 저 군인들은 우리나라 군인이 아닌갑다. 북한 김일성이가 보낸 인민군이 분명허당께. 우리나라 군인이믄 한나라 사람을 복날 개 잡드끼 두들겨 패겄냐?"
진규가 몸서리를 쳤다. 명수는 뒤를 돌아봤다. 광주천 건너 멀리 한 무리의 군인들이 뛰어가는 게 보였다. 그라믄 우리나라 군인들은 워디 있는 겨? -96쪽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자국민 지키라고 가 있는 군대에서, 그 국민들 세금으로 만든 총 들고서 자국민을 해칠 수 있을까. 그런 명령을 내린 사람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혼란스럽고 두렵고 무서웠다. 이런 와중에 작가님은 잠시 쉬어갈 틈을 주시니, 이런 문장은 웃으면서 웃게 만든다.


"니들은 내 비밀을 알믄 깜짝 놀랄 거신디?"
진규 말에 셋 모두 윗몸을 일으키며 그게 뭐냐고 물었다.
"긍께 그기...... 나는 로보트여. 인조인간 로보트 마징가 제트 맹키로. 팔이 무쇠라 던지기 선수가 된 거랑께."
진규의 터무니없는 말에 셋은 어이없어 하면서 도로 자리에 누웠다. 진규는 다리까지 무쇠였으면 저기 밖에 있는 악당들을 다 물릴칠 텐데, 아쉽게도 박사님이 다리를 빼먹었다면서 입맛을 다셨다.
"그랑께 군인들이 악당인 거여라?"
성일이 아주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제. 만화서 보믄 나쁜 로보트를 조종허는 진짜 악당은 뒤에 숨어 있잖여. 군인들은 악당헌티 조종당허는 로보트인거제."


미국에서 월남 전에 파병되었던 군인들이 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많이 앓고 자살도 많이 했다는 글을 보았다. 우리나라 가스통 할배들 중에도 파월 군인이 많을 터인데, 그 후유증의 한 반동이 아닐까도 싶다. 다른 나라에 가서도 그럴진대, 자국민을 상대로 그랬다면 그 폭풍은 더 심하지 않을까? 그 의문과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서 더더욱 상대방은 빨갱이가 되어야 하고 종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 아닐까? 


명수는 나주 출신이었다. 이렇게 위험할 때에 아버지가 합숙소로 아이를 데리러 오신다고 했다. 길이 막혀서 접근하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버지는 기어이 광주 시내로 들어오셔쏙, 그 바람에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다. 불편한 다리로 시계를 고치며 열심히 사셨던 아버지, 시장 바닥에서 넘어져서 빨간 사과와 함께 뒹굴었던 아버지, 무뚝뚝하시지만 대회 나갈 아들을 위해서 제일 좋은 운동화를 사주셨던 그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를, 어머니를, 또 아들을 딸을 잃은 사람이 그곳에 얼마나 많았던가. 아직도 그치지 않는 눈물을 가슴에 품은 채 살고 계신 많은 분들이......


여기까지는 이 책의 배경을 알면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은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간다. 그곳에서 사람 냄새 나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의 이야기, 그리하여 사죄하기 위해서 발품을 팔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마치 액자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서럽고 고통스러운 이야기 속에서 자그마한 희망 한줄기, 옅은 미소 한자락 지을 수 있게 만드는 마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작가님의 이름을 눈여겨 보게 된다. 이렇게 뭉클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님은 꼭 기억해 둬야지...


광주에서 이리 참혹한 짓을 저질러 놓고, 정부는 태연하게 전국 체전을 열었다. 3S정책이 실감난다. 그게 33년 전에만 그랬을까? 지금은 어떤지 돌아보게 된다. 



광주의 슬픈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 어린이 친구들에게는 간략한 정리 목록이 도움이 될 것이다. 더불어 '26년'이나 '화려한 휴가'를 같이 보면 좋겠다. 잔혹한 내용이 있으니 어른과 같이 시청하거나 읽으면 좋겠다. 의외로 차분히 일러주면 아이들은 귀를 기울이고 또 지극히 상식적인 반응으로 이해를 한다. 



민중 항쟁의 역사와 같은 시기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났던가도 정리해 주었다. 진지한 눈으로 들여다 본다면 더 깊은 이해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소중함도 함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지켜야 하는 지도... 그 소중하고 귀한 기회와 가치에 대해서 차분하게 이야기 해보자. 아이들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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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12-08 0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계절청소년문학상을 받은 '열일곱 살의 털>과 <우리는 가족입니까>를 쓴 김해원 작가, 나도 주목하고 있어요.
오월에 출간되자마가 사서 읽었는데 리뷰는 못 썼어요.ㅠ

마노아 2013-12-08 23:35   좋아요 0 | URL
이 책을 보고 나니 말씀하신 책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가요. 작가님 이름을 기억해야겠어요. 롱런하실 분 같아요.
이 책 저도 그쯤 산것 같은데 한참 뒤에 읽었네요. 오월에 읽었다면 더 뜨겁고 더 벅찼을 것 같아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