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 3번 안석뽕 - 제17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 수상작(고학년) 창비아동문고 271
진형민 지음, 한지선 그림 / 창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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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진이 기호 3번으로 전교 학생 회장으로 출마하게 된 것은 순전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다. 교실에서 단짝 친구 조조와 기무라와 시덥잖은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반장 고경태가 한무리의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는 중요한 얘기 해야 하니까 교실을 비워달라고 했던 게 출발이었다. 슬쩍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고까워진 기무라가 우리도 중요한 얘기가 있다고 한 것이다. 그 중요한 얘기가 부풀고 부풀어서 1번으로 출마한 고경태에 이어 3번으로 안석진이 회장 선거에 나가게 된 것!

 

욱하는 심리도 있었고, 경태 옆에 있던 부반장 서영지가 신경 쓰였던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그렇게 다짜고짜 회장 선거에 나가게 됐으니 이것저것 할 일이 많다. 후보 등록서를 내기 위해서 친구들의 추천서도 내야 하고, 선거 운동에 각 반을 돌며 유세도 해야 했다. 어째, 판이 점점 커진다.

 

좀 전에 조조와 기무라라고 했는데, 추천인 명단을 보니 이해가 간다. 조지호의 이름을 빠르게 발음해서 조조, 김을하의 이름을 연음으로 읽어서 기무라가 된 것이다. 이름도 재치 있다.

 

얼떨결에 회장 선거에 나가게 되었지만, 칼을 뽑았으면 최소한 지우개라도 찔러야 한다는 각오로 석진이도 열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깐! 왜 석진이가 안석뽕!이 되었는가! 그것은 석진이네가 떡집을 하기 때문이다. 떡하면 한석봉이 떠오르기 마련. 그래서 시장에서 석진이의 별명은 석뽕이다. 석진이는 그게 싫지만, 늦게 출마해서 여러모로 시간이 없는 이쪽에서는 기억에 남을 한방이 필요했고, 그래서 싫어하는 별명이지만 써먹기로 했다. 그런데 이 이름 덕분에 여러모로 인기를 끌었다.

 

붓글씨를 잘 쓰는 석진이가 한석봉 역할을 하고, 조조는 할머니 고무줄 치마를 입고 얼굴에 연지곤지까지 찍고는 가래떡 휘두르며 막춤을 추고 있다. 그리고 펼쳐든 선거 구호!

 

 

마치 호 같다. 석뽕 안석진! 근사한 이름이다. 1번 후보 고경태가 지나치게 성적을 강조한 것에 대비되는 구호다. 이쯤에서 앞의 후보들 공약도 같이 보겠다.

 

 

고경태의 이미지가 확 그려진다. 모두가 공부를 잘 하는데 일렬로 줄을 세우는 체계에서 어떻게 1등이 다 나오겠는가. 아마 고경태 자신이 다같이 일등하는 건 제일 싫어할 것만 같다. 학생회장에는 관심 없지만 게임 팩 사준다는 엄마의 감언이설에 출마한 기호 2번 방민규는 네 가지가 없는 학교를 만들겠다고 했다. 작가님 의도인지 모르겠는데 보는 순간 싸가지 없는...으로 바꿔 읽히게 된다. 싸움 없고 왕따 없고 거짓말 없고 쓰레기 없는 학교야 금상첨화지만, 이렇게 '안티'를 강조한 선거는 이기기 어렵다는 걸, 민규가 알기는 어렵겠지?

 

아무튼,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인공 안석뽕이니, 석뽕이의 공약도 보러 가자.

 

시험을 일 년에 한 번만 보자고 하겠습니다. 그게 안 되면 한 학기에 한 번. 그것도 안 되면 제발 문제라도 쉽게 내 달라고 하겠습니다.

 

아, 굉장히 구체적이다. 시험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아이의 입장이 잘 보인다. 참고로, 석뽕이 파는 이 공약을 직접 아이들을 만나서 물어보고 만든 것이다. 그러니 석뽕이와 조조와 기무라만의 바람은 아닌 것이다. 대다수 어린이들의 바람이라는 것!

 

기분 나빠서 공부가 더 안 된다고 말하는 당참까지! 국영수가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나도 참 싫다. 나는 제발 역사 수업 좀 늘리자고 하고 싶지만... ^^

 

의무교육이라면 수학여행도, 준비물도 모두 학교에서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그럴 만한 재정이 없는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써야 마땅한 돈이 엉뚱한 데서 새고 마땅히 걷어야 할 세금을 안 걷으니 문제라고 여긴다.

 

그리고 5번은 아주아주 크게 공감한다. 이건 직무유기다. 툭하면 학부모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다. 학교에 올 수 있는 엄마나 못 오는 엄마나, 그 엄마들의 아이가 모두 불만이다. 도우미나 할머니나 이모라도 보내라는 문구도 있던데 정말 열이 화르륵! 내 비록 학부형 아니라 급식도우미 참여해본 적은 없지만, 이건 정말 아니라고 본다. 이런 인력 창출은 학부모의 몫이 아니라 역시 국가와 교육 당국의 몫이라고 본다. 대한민국 갈 길 아직 한참 남았다.

 

일등만 좋아하는 학교 너나 가지라고, 모두가 좋아하는 학교 만들자는 아이의 말이 재밌으면서도 콱! 박힌다. 우리 아이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학교가 싫은 공간이 되었을까.... 서글프다.

 

석뽕이를 학생 회장으로 미는 친구 조조는 거의 책사 역할을 맡고 있다. 이름과도 잘 어울린다. 조조의 분석은 이랬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선거 때마다 공부 잘하는 애를 찍는 이유는 그런 애들만 후보에 나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부분도 크게 공감간다. 물론, 공부 못하는 학생이 출마해도 뽑아준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네 선거를 보시라. 서민들일수록 돈있고 권력 있고, 그래서 서민 삶에는 별로 관심 없고 약속도 지킬 생각 없는 여당만 죽어라 찍어주지 않던가.

 

이 작품이 매력적인 것은 학생회장 선거를 통해서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해주며 동시에 어른의 이야기도 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석뽕이네 담임 선생님은 정말 폭탄이었다. 6학년에 올라온지 한달이 되어가는데, 이 아이들이 자신이 맡은 반 아이라는 걸 몰랐다. 공부 못하는 애들은 아웃 오브 관심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같은 반에서 후보가 두 명이나 나왔으니 후보를 통일하는 게 낫지 않겠냐며 대놓고 석진이에게 압력을 넣는다. 석뽕이는 그걸 자신에 대한 관심을 착각하지만. 그 착각이 독자는 더 가슴이 아프다.

 

"후보가 없는 반도 많은데 한 반에서 후보가 둘이나 나가는 게 좀 그렇기도 하고, 같은 반 친구끼리 적이 되어 싸우는 건 아무래도 좋아 보이지가 않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안석진?"

 

"또 우리 반 애들을 생각해 봐라. 도대체 누굴 찍어야 할지 얼마나 고민이 되겠냐, 석진아?"

 

"남북이 분단되어 사는 것도 가슴 아픈데, 우리끼리 가랄져서 꼭 이래야 되겠냐? 우리가 앞장서서 통일하는 마음으로다 후보 통일을 하는 건 어떻겠냐, 안석진?"

 

아, 정말 욕나온다. 자기 반 학생 얼굴도 못 알아본 자격미달 교사가 편파적으로 학생 회장 후보를 밀고 있다. 이럴 때만 그럴싸하게 써먹는 통일도 역겹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나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샘이 떠오른다. 2학기 시작한 첫날에 복도에 있던 우리 반 학생한테 너는 몇 반이냐고 물었다. 자기네 반 학생을 한학기가 지났는데 모르고 있다가 몇 반이냐고 묻는 무신경함과 뻔뻔함이라니. 그 선생이 자기 기분 나쁠 때 애를 줘 팼던 것도 기억난다. 에잇!

 

학생회장 선거만 너무 오래 얘기했다. 이야기에는 두 개의 축이 있다. 학교 하나, 시장 하나다. 석뽕이네 집은 시장에서 떡집을 하고 조조네 할머니는 시장에서 순댓국집을 한다. 그 밖에 슈퍼집 딸 백보리도 있고, 동네에는 시장에서 장사하는 집이 많다. 그런데 시장 앞에 떡하니 대형 마트가 들어선 것이다. 대형 마트 영업 규제를 피해서 서둘러 등록부터 해버린 이 업체에는 구청과 경찰서까지 모두 의기투합한 흔적이 보인다. 시장 사람들이 사색이 된 것은 당연하다. 아직 어리고 철도 없는 석뽕이 등은 새로 들어선 피마트가 자기네 집에 드리울 어두운 그림자는 짐작도 못하지만, 커서 슈퍼 사장이 되겠다고 벌써부터 다짐한 백보리는 걱정이 한가득이다. 저 어둠의 세력을 색출하기 위한 백발 마녀 백보리의 활약도 이 책에서는 큰 몫을 차지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어린이 책이라고 해서 어린이 이야기만 담지 않았고, 어린이와 어른의 세계 모두에 걸쳐서 무척이나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진지하지만 유머 감각을 절대 잃지 않으면서!

 

다시 회장 선거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각 반을 돌면서 하는 선거 유세해서 조조와 기무라의 조합이 재밌었다.

 

"우리 쭝국 살람은 기호 3번 찍는다해. 석뽕 선생 가라사대 꼴찌한테도 박수를 쳐 주라 했다해. 이 반 꼴찌 누구냐해? 다같이 박수, 박수 쳐 주자해!"

 

조조에게 밀릴 기무라가 아니다.

 

"아노, 우리 일본 사람도 기호 3번, 남바 쓰리, 안석뽕을 찍스므니다. 1등은 1번 찍고, 2등은 2번 찍고, 3등부터는 무조건 3번을 찍어야 하므니다. 그래야 아리가또, 아리가또 보재기마쓰!"

 

문득 또 다시 기억 하나를 건드렸다. 중학교 3학년 졸업여행 때의 일이다. 우리 반에 배정된 방은 두 개였고, 원하는 방을 숙소로 쓰라고 했다. 아이들은 알아서 들어가고 싶은 방에 가방을 풀었는데, 나와 같이 방에 들어간 내 친구가 이 방 싫다고, 옆 방으로 가자고 했다. 왜 싫다고 하는지 이유를 몰랐지만 꼭 그 방을 고집할 필요도 없어서 친구 따라 옆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옆 방에 들어서고 나서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첫번째 방은 공부 잘하는 애들만 들어가 있었고, 옮긴 방에는 반대로 공부 못하는 애들만 들어가 있었다. 누가 일부러 나눈 것도 아닌데 그렇게 갈라서 방을 쓰게 된 것이다. 내가 첫번째 방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던 것과, 내 친구가 그 방을 불편해했던 사실들이 입맛을 쓰게 했다. 옮긴 두번째 방에서 내가 불편했냐고? 그럴 리가. 아주 재밌게 놀다가 왔다. 그렇지만 방에 들어섰을 때 알아차린 그 차이점에서 받은 서늘한 감각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아이들의 세계건 어른들의 세계건 줄 세우고 나누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는 깨달음으로...

 

괜히 심각해졌다. 즐거운 이야기 속으로 다시 가보자.. 이 책은 '차례'도 재밌다. 이 재밌는 제목들을 보시라.

빨리 저 소제목들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꿈틀대지 않는가? 다짜고짜 금요일을 지나서 정 그러시다면 월요일을 향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어디가 어때서 목요일이 무척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그 날 연극 당첨되어서 볼 것이므로...^^

 

이야기의 마무리도 훈훈했다. 선거 과정에서 석뽕이가 좀 더 성숙해졌고, 깨달음도 많아졌다. 무척 불공정한 어른들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럼에도 공정한 세상의 이치를 읽은 기분이랄까. 문제 많은 교사도 나왔지만, 관록을 무시할 수 없는 멋진 교감 선생님도 나왔고, 굉장히 찌질해 보이지만 사실은 슈퍼영웅일지도 모를 거봉 선생도 등장했다. 첫사랑에 눈을 뜰 법한 아이의 설레는 감정도 잘 표현되었고, 우리 사회에서 땀흘려 노력하며 열심히 가정을 꾸려나가는 서민들의 소박하고 애틋한 삶 이야기도 잘 드러났다. 이 책이 대상을 받은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공감하게 만들어 주었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을 보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이 작품이 첫 작품이다. 첫번째부터 홈런을 쳐준 기분이다. 이후의 후속작도 기다릴 테니 열심히 써주세요~

 

마지막에 나온 작가의 말은 이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어른들 마음을 대변한 것만 같다. 그래서 위로가 되었다고, 고맙다는 말도 남기고 싶다. 중간 부분만 옮겨 보면 이렇다.  

 

나중에는 세상을 좀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괜히 언짢고 싫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맨주먹으로 용을 쓰다가 주눅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화난 얼굴을 했지만 속으로는 혼자 무서웠던 겁니다. 나는 그렇게 겨우 어른이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착하지 않은 어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의심이 많고, 때때로 거짓말을 하고, 매일매일 눈을 홉뜨고 세상을 째려봅니다. 이런 얘기 창피하지만, 아직 겁도 많습니다.

 

겁많은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와 달리 용감하고 씩씩한 석뽕이와 친구들. 그들의 또 다른 도전을 기대하며, 응원하며, 그리고 격려하며 축복하겠다. 결국은 나 자신을 향한 위로이며 도전이며 성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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