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 - Guzaarish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최고의 마술사에게 주어지는 호칭 '멀린'이라 불리던 사내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튼. 불의의 사고로 최고의 마술사 자리에서 사지마비 환자로 떨어진지 어느덧 14년이 흘렀습니다. 그의 곁에는 지난 12년 동안 단 하루의 휴가도 없이 헌신적으로 곁을 지켜준 간호사 소피아가 있습니다. 그녀는 이튼을 씻겨주고 약을 먹여주고, 식사를 챙겨주고, 욕창이 덧나지 않게 몸을 돌려줍니다. 뿐입니까. 그가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DJ 방송의 음향기사 역할도 해주지요. 소피아 없는 이튼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각별했던 그녀는 기사를 통해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이튼이 자신의 안락사를 허용해달라고 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한 것입니다.  

안락사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인도의 법원에 청원서를 제출한 것은 이튼의 친구인 변호사 데비아니입니다. 수많은 여론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이튼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이제껏 제시해 주었던 희망은 모두 거짓이었냐는 거지요. 또 다른 사지마비 환자들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힘을 내라고 격려를 합니다. 종교 단체에서는 안락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또 반기를 들었지요. 누구 하나 그에게 지지를 보내주지 않습니다. 소피아 역시 데비아니에게 화를 내지요. 하지만 데비아니는 누구보다도 이튼이 원하는 것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참 우정이라고 믿고 있지요.  

누구라도 당신의 가족이, 혹은 친구가 육신의 장애가 힘이 겨워 자신을 죽여달라고 청원한다면 일단 그 사람을 말리고 볼 겁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아직도 빛나는 존재임을 강조할 것이고, 그가 받고 있는 사랑의 크기를 앞다투어 보여주려 들 겁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떠남으로 인해 주위 사람이 받게 될 상처를 말하겠지요. 하지만, 살아있음으로 해서 그가 받고 있는 거대한 고통의 크기에 대해서 우리는 대개 무감각합니다. 이해하고 공감하고 안타깝게 여길 수는 있어도 그 고통을 실제로 감당해내며 사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니까요.   

영화는 계속해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붙잡고 있는 그 끈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말이지요. 진정 가엾은 그 사람을 위한 것인지, 혹은 상처받기 싫고 괴롭기 싫은 나를 위한 것인지 말입니다. 한동안 '행복전도사'라 불리던 여성의 자살로 시끄러웠던 때가 있습니다. 그가 늘 '행복'을 전도하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지만, 정작 자신의 고통 속에 함몰되어 스스로 목숨을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위선을 떨었다 하며 입방아를 찧었습니다. 과연, 그런 걸까요. 그가 제시한 희망이 그 자신을 구원해주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주려고 했던 희망의 메시지가 거짓이었을까요. 오죽하면 스스로 생을 버렸을까 되짚어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위안부 할머니들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조차도 사실은 그분들 입장에선 '저항'이라고 말이지요. 이튼은 지금 존엄한 죽음을 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고, 천장이 새서 빗방울이 밤새도록 얼굴 위로 쏟아져도 몸을 틀 수조차 없는 그입니다. 그가 살아내고 있는 세상은 이토록 거대하고 이토록 역동적이고 이토록 아름답건만, 그 안에서 그는 반경 1cm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소피아와 같은 도움의 손길이 없다면 말입니다.

 

항소심 때문에 법원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들른 바닷가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이튼의 얼굴입니다. 14년 만의 외출이었습니다. 법원은 그에게 자신을 설명할 단 2분의 기회도 주지 않았지만, 이제 주변 사람들과 그의 재판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가 원하는 죽음의 의미에 동조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인간답게 살고 싶은 것처럼 인간답게 죽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과연 그 사회가,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죽음을 인정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어할까요? 인도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안락사와 마찬가지로 낙태에 관해서도 더불어 생각하게 합니다. 생명의 존엄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 드높인 목소리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사랑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이튼의 어머니와 간호사 소피아, 변호사 친구 데비아니와 의사 친구 나야크, 또 이튼의 집에서 일을 해주는 고용인과 그의 제자 오마르가 그랬습니다. 이튼의 청원은 그들의 가치관과 결심, 그리고 사랑을 바꿔줍니다. 진정 누구를 위한 사랑인지를 돌이켜보게 했으니까요. 그의 첫번째 마술이 엄마를 웃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마지막 마술은 사람들을 웃게 합니다. 그는 진정 '멀린'이었던 겁니다. 

영화는 또 '용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 용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는 용서가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세상엔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도 분명 있으니까요.

영화는 빼어난 영상미와 음악성을 자랑합니다. 사지가 마비된 이튼의 현실과 그가 마술사로 화려한 명성을 쌓을 때의 대조적인 모습이 환상적인 영상 속에서 재현되었습니다. 특히 이튼이 유연하게 춤을 추는 모습은 우아한 발레리노의 춤사위를 보는 듯했는데, 이렇게 이기적인 몸매를 지닌 배우가 사지를 못 쓰는 역을 맡으니 거기서 오는 부조화가 나름의 옥의 티라면 티일까요. 김명민처럼 멀쩡한 몸을 그렇게 말려놓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여기진 않지만 말이지요.  

 

매력적인 간호사 소피아는 내내 긴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관능적인 라인을 자랑했고, 진한 화장과 화려한 악세사리 등은 이튼뿐 아니라 관객에게조차도 생기를 줄 것 같았습니다. 클럽에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은 또 얼마나 신이 나던지요. 볼수록 매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그녀가 내린 결정과 헌신은 가슴을 오래오래 울렸습니다.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여고생 세 명이 영화 중반부터 끝까지 한 시간이 넘도록 훌쩍이는데, 휴지가 있었다면 내주었을 겁니다. 본인들은 또 얼마나 갑갑했을까요. 

올드 팝과 인도 고유의 음악이 잘 어우러진 것도 큰 재미였습니다. 놀랍게도 영화를 만든 감독이 음악 감독도 같이 했다고 하네요. 재주가 많은 사람입니다. 감독의 전작 '블랙'도 꼭 챙겨보고 싶습니다.  

드라마로서도 훌륭한 영화이지만, 존엄사에 대해서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생명'과 '인권'이라는 고결한 이름을 앞세워서 혹시 간절한 외침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단지 내 손에 찝찝한 무엇을 묻히지 않으려는 것은 아닌지 묻고 또 물어야 했습니다.  

영화의 원제는 Guzaarish, 소원이라고 합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에 귀를 한 번 귀울여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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