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 광해군일기 - 경험의 함정에 빠진 군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광해군을 떠올리면 정조와 마찬가지로 늘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앞장 선다.  그들의 치세가 좀 더 오래 갈 수 있었더라면, 혹은 그들이 다른 신하들과 일을 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역사에 있어서 늘 의미 없어지는 IF가 따라오곤 한다.  그들의 다음 대에 왕이 된 사람들의 면면을 떠올리면 그 안타까움은 더 짙어진다. 그러나 어쩌랴.  그게 그들의 운명이었고 조선의 숙명이었으니...

광해군은 16년 동안 울분의 세자 시절을 보낸 만큼 '준비된' 임금이었다.  온 나라 곳곳을 그의 두 발로 안 다녀본 곳이 없고, 전쟁을 겪으면서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알았으며, 쓸모 없는 명분보다 현실적인 실리를 더 추구했었던 인물이다.  실제로 대동법을 실시하고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짓게 하고, 무엇보다도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해서 조선의 안녕을 지킨 것은 그가 아니면 해내기 힘든 과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따라오는 법.  그는 출발부터가 불안한 왕이었고, 그 불안정은 아버지 선조카 한껏 키워놓은 참이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번다고... 아비 선조는 임금 체면도 지키지 못한 채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제 한 몸 살리기 바빴으나 광해군은 목숨을 걸고 분조를 이끌며 전쟁의 위기 속에서 조정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비교체험 극과 극!) 자신과는 너무도 반대되었던 아들의 업적.  권력은 부자 사이에도 나누지 못한다고 했던가.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선조는 아들을 자신의 정적처럼 여기게 된다.  숱한 양위 소동으로 진을 다 빼놓고, 명나라가 조선을 향해 점점 더 강한 입김을 내뿜는 것을 막지는 못할 망정 그것을 이용하여 아들 가슴에 못 박기를 서슴지 않는다.



영창대군이 태어나고 광해군의 입지가 얼마나 난처해졌을 지는 상상이 간다.  하다 못해 선조가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죽으면서 only 영창대군을 부탁한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네는 죽으면서까지 화근을 남겨두었다!  미련하기로는 인목대비도 마찬가지였다.  임금보다 9살이나 어린 새 엄마.  재산을 부정축재하는 데에 올인할 것이 아니라 영창대군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도록 몸을 낮췄어야 했다. 광해군이 어린 이복 동생을 죽인 것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역사 속에서 왕권을 구축해 가는 가운데 그같은 일은 비일비재했다.  특별히 광해군만 욕먹을 사건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컴플렉스를 안고 있었던 광해군은, 왕권에 위협이 될만한 요소는 철저히 쓸어버리기를 원했다.  그리고 간교한 신하들은 왕의 그 심리를 제대로 이용해 먹었다.  광해군의 치세 동안 있었던 숱한 옥사들.  '역모'의 '역'자만 들려도, '모반'의 모자만 들려도 광해군은 바로 추국에 들어갔다.  왕은 의심이 많았고 소심했으며 사특한 이이첨을 너무 신뢰했다. 

저자의 허균에 대한 표현도 인상적이었다.  허균이 역모죄로 능지처참 된 것은 사실이지만, 흔히 허균을 이상론자로 묘사하면서 그의 역모는 남다르다고 평가해 왔다.  전부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역모 사건은 기존의 사건들과는 확실히 달랐으며, 마지막 진술도 받지 않고 서둘러 형을 집행하게 한 것은 그에게도 어떤 억울함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지만 소설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이이첨과 손잡고서 갖은 추태를 부린 것까지 미화시키지는 않는다.  기존의 사서와 구분되는 점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있는 그대로 표현해 주되 의문부호는 남겨두기.  이를테면 허준의 시침 거부 사건이 그랬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명의 허준은 선조가 죽을 당시 시침을 놓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이가 대신 침을 놓는 장면이 나온다.  세상에 그 허준이?  허준의 말년을 보여준 것도 미화된 드라마와는 비교된다.  그의 업적을 폄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과장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광해군에 대해서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 장면은 무리한 궁궐 공사이다.  설령 그가 '재조지은'을 배신했다는 명분으로, 또 '폐모살제'의 명분으로 쫓겨났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에게 진정 훌륭한 군주였다고 한다면 역사는 그를 좀 더 후하게 평가했을 것인데, 임진왜란과 후금과의 전쟁 등으로 백성의 편에서 생각했던 광해군은 미신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켰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말았다.  혹은 궁궐을 짓더라도 초기에 지었던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까지만 손을 댔더라면 나라의 위상을 세웠다.... 정도로 이해했을 터인데, 역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했던 것이다.

이이첨을 위시한 대북파를 너무 일으켜 세운 나머지 왕권마저도 위협된다고 여긴 광해군.  그리하여 그 동안 외면했던 서인과 남인을 등용하기 시작하지만, 이미 그들은 그의 신하들이 아니었음을, 불행하게도 임금은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역모 고변이 들려왔을 때에도 한 귀로 흘려버리고, 결국 그 대가로 폐위되어 쫓겨나는 불운을 겪고 만다.  초기에 '역'자만 들려도 마구 오버하던 그때와 어쩌면 이다지도 다를까. 

오이디푸스 왕을 떠올리면, 항상 신탁에 대한 반감이 생긴다.  그때 그 아버지가 신탁을 믿지 않았더라면, 혹은 신탁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들 모두의 운명은 달라졌을 터인데... 하는 마음.

광해군이 미신에 흔들리지 않고 꿋꿋이 소신을 지켰더라면 하는 아쉬움.  아버지 선조가 물려준 악업의 힘이 크긴 하지만, 그것을 극복해내지 못한 광해군에게도 슬픈 실망이 깃든다.  그를 그토록 몰아친 시대의 힘도 야속하고......

연산과 마찬가지로 폐주로 몰려 슬프게 생을 마감한 광해군.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인조가 감히 '仁'자를 붙일 수 없는 진짜 패륜 임금이었다는 것이 죽은 그에게 혹여나 위안이 될 것인가.  그러나 어쩌랴.  그 모두는 조선의 손해고 불행인 것을.

다음 편 인조실록은 꽤나 속이 거북해져서 보게 될 듯하다.  조선의 여러 임금 중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임금이기 때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그 이야기는 기다리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처럼 승정원 일기도 이렇게 쉽고 재미나고 유익한 책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보다 훨씬 광대한 작업이 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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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08-02-07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더 간절해지네요~
저희 아이에게는 좀 이른 것 같아 천천히 구입하려고 했는데, 제 욕심에 조만간 질러버릴 것 같은 예감이 ... ^^;

마노아 2008-02-07 19:00   좋아요 0 | URL
제 기억에 어린이용 조선왕조실록이 따로 나와 있을 거예요. 박시백씨 작품으로요~
찾아보니 만화 조선왕조실록이 있는데 알라딘은 품절이네요. 다른 곳은 있을 지 모르겠어요^^;;;

순오기 2008-02-08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1권 구입했는데, 아직 민경이도 안 봤어요. 나는 님의 리뷰로 귀동냥이나 하고 있고요! ^^
곧 날 잡아서 봐야 할 일인데~~ 2월에도 힘들 듯해요!

마노아 2008-02-08 11:45   좋아요 0 | URL
인명사전 받으려고 가격 맞춰 주문했는데 인명사전은 심심해서 패스했어요. 나중에 심심할 때 보려구요.
뭐 봐야 할 책은 아직도 구만리지만 그냥 천천히 보려고 해요^^

스카이 2009-05-07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기억 나시려나 몰라요? 진짜 오랜만입니다..우연히 지난해 한권 구입했어요.. 아이가 역사 만화는 도통 읽으려 하지 않아서요..초등 5학년 말에 의하면 도통 재미가 없다나요..1년을 책꽂이에 꽂아 뒀더니 약 열흘전 쭉 읽더라구요..너무 잼있다고 시리즈로 사달라는데 생각 하고 있습니다 구매를요..휴 휴 한숨 나오네요..이번에 학교 도서 바자회때 강추 하렵니다..님의리뷰 도움 많았습니다.. 하지만 시리즈 다살려면 님의 책임 있어요 ..아참 이번 역시 4급봅니다.23일날요..

마노아 2013-07-27 16:04   좋아요 0 | URL
세상에, 몇 년이나 지나서 댓글을 보았네요. 죄송합니다. 그때 우리를 열광시켰던 조조록이 드디어 완성되었네요. 더 가열한 추천을 해보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