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다 / 황지우 지음 / 2015년 1월 16일 발행




1987년 처음 출간된 황지우의 시집. 절판된 후 오랜 시간 독자를 만나지 못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R시리즈로 새롭게 태어났다. "詩들을 정리할 때마다 두렵다. 마음이 체한다. 이제 어디로 빠져나갈까? 없는 길을 찾아 나가기가 이렇게 버거울까?"라고 말하던 1896년의 시인. 그는 미워하고 사랑하고, 다시 사랑하고 미워하며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나는' 이렇다는 말, '너는' 이렇다는 말.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된다. 이 구절처럼.



 18.


수많은 '너'안에서 나는 '나'를 증언하게 된다.





1987년, 세련됨의 시대는 이제 원숙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규칙과 합리의 세계에서, 황지우는 시대를 날카롭게 인식한다. 그가 인식한 풍경들은 낯설지 않다, 새롭게 시들을 만나며, 오히려 너무도 같은 과거에 흠칫 놀라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순간들. 내일 아침 내가 꺠어날 수 있을까?



148.


아침에 내가 깨어날 시간을 下達받은 自鳴鐘시계를 머리맡에 놓고 눕는다. 잠이 안 온다. 하루살이는 一生을 다하여 하루를 산다. 내일 아침 내가 깨어날 수 있을까? 心室의 두근거리는 時限爆彈.



마치 매춘 같은 노동 행위.


164.


하루 종일, 견습공 김석만은 그것을

샌드 페이퍼로 문질렀다. 끝도 없는, 사막 같은 일.

청소도 하고 경리도 보는, 月給 13만 원짜리 미스 리가

미결재 서류를 잔뜩 갖다 놓는다.

나의 노동은 매춘 행위인가.

사방 데서 악쓰는 소리, 들린다.

내 몫, 내 몫,

내놔라.

내가 터억하니 앉아 있는 이 데스크는

말하자면, 나의 위장 취업이다.


도시에 별안간 구멍이 뚫린다. 버스에서 내리다 별안간 지하로 가라앉을 수도 있다. 물리적인 몰락의 공포, 혹은 수사에 가까운 몰락의 공포가 늘 도사리고 있지만, 도시인의 삶에는 그 어떤 안전 대책도 없다. 개연성 있는 공포 앞에 서서도 그저 내가 아니길 바라는 신경질적인 무감각뿐.


67.

“南山 제1호 터널, 붕괴 직전“이라고 해도

차량들은 여전히, 태연히,

어쩌면 붕괴될지도 모를 개연성이 있는, 남산을 통과할 수 있게 하 하는 제1호 터널, 그 칙칙하고 컴컴하고 매캐하고 긴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다 뒈져도 나만은 九死一生으로 살아남을 거야

하는 심정으로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건지. (...)


서울 사람들을 세련되게 하는 것은 신경질과 무감각이다.




불안과 공포, 새로운 세게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저 위장할 뿐이다. 다친 곳은 아물어 간다. 그리고 곧 다시 상처가 날 것이다.



9.

나는 내 생(生)을 척하고 있소.

다친 데가 아물어 가오.





황지우의 시는 현실을 명확하게 인식한다. 이 현실 속에서 '나'는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무엇을 찾으려 했던 것일까. 소나기 속으로 뛰어가는 나, 글자가 안 보이는 나, 두 눈을 꽉 닫아버리는 나. 이런 '나'가 접했을 1987년의 속도감을 상상하면 꼭 그처럼 막막해진다.


61.


태어나자마자, 나는

부끄러웠다.

깨복쟁이 때 동네 아줌마들이 내 고추를 따먹으면

두 눈을 꽉 닫아버렸다.

국어 시간이 젤 싫었다.

얼굴이 시뻘게지고 국어가 안 보였다.

여러 사람은 나의 공포였다.

처음으로 수음을 실시한 사춘기 때부터

이 부끄러움은 약탈, 동성연애감정, 광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변성기 안 온 앞 좌석 놈을 꼬여 입을 맞추고

다음 날 그놈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다.

미루나무 숲 소나기 속으로 뛰어갔고

내가 싫었다.






이 시대에 '감전'된 나는 너를 향해 나간다. 긍정하고 부정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며 항해를 계속하는 '나'. 황지우의 시를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은 이러한 '나'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질서가 더 안 좋은 쪽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그러한 '나'들의 '너'를 향한 타전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늘 현재를 말한다.




33


나는 다만 이 시대에 感電된 것이다.

새까맣게 타버린 오장육부.

이건 한 시대에 헌납한 아주 작은 정세에 불과하다.

나는 나를 부르는 곳으로 나갔었다.

너는 거기에 없었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














황지우, 나는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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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 김사인 지음 / 2015년 1월 15일 발행


김사인 시인은 등단 후 세 권의 시집을 냈다. 1987년 <밤에 쓰는 편지>, 2006년 <가만히 좋아하는>, 2015년 <어린 당나귀 곁에서>. 조심스러운 시력만큼, 그의 시 역시 무척이나 섬세하다.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낱말이 시인을 만나 시가 된다.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그런 문장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만들어내는 울림. 그가 그리워하는 이들, 그가 시에 담은 이들의 모습도 꼭 그렇다.




3

슬픔 너머로 다시 쓸쓸한

솔직히 말해 미인은 아닌

한없이 처량한 그림자 덮어쓰고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듯 다닌

소설 공부 다니는 구로동 아무개네 젖먹이를 맡아 봐주던

순한 서울 여자 서울 가난뱅이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 꽃다지의 순한 풀밭.

응 나도 남자하고 자봤어, 하던

그 말 너무 선선하고 환해서

자는 게 뭔지 알기나 하는지 되레 못 미덥던

눈길 피하며 모자란 사람처럼 웃기나 잘하던

살림 솜씨도 음식솜씨도 별로 없던


태정 태정 슬픈 태정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

(김태정, 부분)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달팽이처럼, 시는 말을 거르고 또 거른다. 드문드문 이어지지만 멈추지 않는다. 고요한 시의 길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져도' 계속될 서정이 이어진다. 애처롭고 마음이 쓰이는 풍경들이다. 동료 시인 김태정은 1963년 태어나 2001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넋을 거둔 미황사를 떠올리며 시인은 태정에 대한 기억을 추억한다. 사람 드문 뒷길로만 피하고 다니던, 조금만 먹고 거북이처럼 조금만 숨 쉬었을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던 사려 깊은 시선.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바짝 붙어서다, 부분)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의 모습처럼, 그렇게 달팽이처럼 멈추지 않고, 최선을 다해 밀차를 밀며 살았을 할머니의 삶을 상상하면, 어린 염소처럼 할머니의 발꿈치를 따를 밀차의 바퀴에 이입하게 된다. 밀차라도 그곳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생각, 할머니의 졸아든 몸을 발견한 시인이 있어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부터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 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화양연화, 부분)


시인은 떠난 이를, 떠날 이를 반복해 곱씹는다. 그가 자신의 '눈멀고 귀먹은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압도적 비감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속절없음을 속절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것은 흘러가고, 그렇게 떠난 이들을 시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집을 통해 애도한다. 품격있는 애도의 풍경은 결정적인 애도의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의 어머니에 관한 시.



2

어디 가 계신가요 어머니.

이렇게 오래 전화도 안 받으시고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세요.

콩국수를 만들어주세요.

수박도 좀 잘라주시고

제 몫으로 아껴둔 머루술도 한잔 걸러주세요.

술 잘 하는 아들 대견해하며,당신도 곁에 앉아 찻숟갈로 맛보세요 나는 이렇게만 해도 취한다 하시며.

어머니, 머리도 좀 만져봐주세요 손도 좀 잡아주세요 그래, 너희는 살기 안 힘드니 물어봐도 주세요.

너 피곤한데 내가 자꾸 붙잡고 얘기가 길다, 멋쩍게 웃으시며, 그래도 담배 하나 더 태우고 건너가세요 어머니.


3

혹시 머나먼 고비사막으로 가셨나요 어머니는.

낙타들과 놀고 계시나요.

꾀죄죄한 양들을 돌보시나요.

빨갛게 그을은 그곳 아낙들의 착한 수다 들어주고 계시나요.


그럼 저는 어디로 흘러가야 할까요.


꼭 당신을 다시 만나자는 건 아니지만

달아나는 돌들과 자꾸만 뒤로 숨는 풀들과

봉분 위로 부는 바람 하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고비사막 어머니, 부분)




콩국수, 수박, 머루술 같은 일상의 소박한 음식의 이미지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별한 날만 만날 수 있는 독하고 화려한 맛이 아니었다. 오래 기억에 남을 맛처럼, 그렇게 어머니의 기억은 일상이 되어 머무를 것이다. 몹시도 작았을 어머니의 몹시도 작은 찻숟갈을, 작은 웃음소리를 시인은 조용히 불러본다. 사막을 건너는 어머니의 '고개 하나 넘으며 뼈 한자루 내주고 물 하나 건너면서 살 한줌 덜어주며' 고비사막을 건너 이 세상을 떠났을 어머니에게 건네는 나직한 인사 '어디 가 계신가요 어머니'에 이르면 슬픔을 참기가 어렵다. 이토록 서정적인 시인이 어머니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반칙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깊고 수수하고 능청스럽다. 어떤 시는 매섭고, 어떤 시는 절로 웃음이 난다. 고맙고 서러운 생에 대해 드믄드문 말하는 시들이 담아낸 섬세한 이미지들이 이어진다. 당나귀의 걸음처럼 터벅터벅 이어지는 글을 읽다보면 꼭 시처럼 고요한 시인의 음성이 떠오른다. 모국어를, 한국어를 육십여 년 가까이 쓰고서도 이정도 밖에 쓰지 못해 부끄럽다고 말하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그런 그가 몹시도 고민하며, 더듬더듬, 먼길을 한없이 느리게 그리며 놓았을 시의 길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김사인, 어린당나귀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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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두리  / 유은실 지음 / 2014년 11월 28일 발행


"그리고 너처럼 씩씩하게 선지를 받으러 갈 수 있으면 좋겠어."

거짓말 같았다. 선지라면 냄새도 못 맡는 언니가 선짓국 귀신인 나를 부러워하다니! 선지를 받으러 도살장에 가고 싶다니!

"나는 니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나도 그러니까 사, 사실은 나도 가기 싫어. 그, 그러니까..... 도살장 냄새 싫어."

"하기 싫어도 너는 해내잖아. 그래서 대단해."

"아."

싫어도 하는 게 대단한 거라면 나는 대단한 게 맞았다. 한 번도 선지를 사러 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수원아,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별로 대단하지 않아. 내가 지금 여기 숨어 있는 것처럼."

"......"

언니의 말을 다 이해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언니가 아주 귀한 얘기를 내게 마음을 담아 털어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변두리 156-157쪽 中)



 "낡은 부엌살림, 선짓국 끓이는 냄새, 화장실에 가는 것.... 담 없는 이 집에선 숨길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소녀 수원은 그렇게 변두리를 자각한다. 1985년 서울 변두리 동네 황룡동, 소녀는 원피스를 입고 케이크를 먹는 대신, 도살장 옆에서 선짓국과 소 간을 받아먹고 자란다. 몸집이 크고 말을 더듬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 수원. 아빠는 자주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한다. 술에 취해 남의 집 팬티를 훔치기도 하고, 동네 하천에 넘어져 똥을 지리고 크게 다치기도 한다. 늘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엄마의 목소리 역시 자주 담장을 넘는다. 이 '변두리'에서 수원은 자신의 이름처럼 '동구밖 과수원길'을, 대도시 '수원'을 상상한다.


변두리의 삶의 남루함은 눈에 보일만치 명백하다. 소풍 날 싸가야 할 김밥의 밥마저 가늘고 누리끼리하고, 들통에 선지를 받아오다 건널목에서 미끄러져 피범벅이 되어 돌아온다. 아카시아 나무 뿌리처럼 가늘게 금이 간 벽은 또, 누런 뻐드렁니와 충혈된 눈은 또. 이야기는 이 풍경들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비감도, 동정도, 위안도 없이. 그저 정확하게 바라볼 뿐이다.



도살장은 백정들의 공간이다. 아빠는 어린 동생 수길에게 도살장 너머에는 초원이 있어 소들이 뛰놀고, 죽을 때가 된 소들이 초원으로 실려오면 카우보이들은 그 소를 향해 묵념을 하고 고기로 파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백정과 카우보이 사이, 소녀 수원은 어린 동생이 진실을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동생은 모르길 바라는 사려 깊음에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성장이라는 것은 '나'를, 나를 둘러싼 '세계'를 자각하는 일이다. 내 세계에 밴 비린내를 자각하게 하고, 고개를 숙이게 하고, 말을 더듬게 하는 고통스러운 성장의 과정을 소녀는 묵묵히 통과한다.


이 소설은 아주 귀한 것에 관해, 마음을 담아 털어놓는다. 자기 자신의 삶을, 그 변두리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태도'는 누구나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멀쩡한 이유정>,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유은실이 쓴 첫 청소년 소설. 청소년 소설로 묶여있지만, 청소년에게만 권하기엔 아쉬운 소설이다. 성장은 누구에게나 현재형이어야 하고, 누구에게나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변두리를 끝내 내 삶의 중심으로 인정하기까지의 여정. 수원의 씩씩한 성장을,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변두리의 풍경을 정직하게 들여다본 작가의 움직임을 응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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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  / 김근 지음 / 2014년 7월 21일 발행


글로리 홀 / 김현 지음 / 2014년 7월 31일 발행


   1973년생 시인은 세 권의 시집을 엮었다. 평론가 송종원의 말대로 김근의 시집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 때>의 어디를 펼쳐도 우리는 '기이한 영상'을 만나게 된다. 시인 스스로가 고백하듯 ("자주 길을 잃었다 / 자주 나는 울었던가. 다시 읽으러 간다. / 가고 가고 가는 수밖에." 시인의 말 中) 불길함을 내포한 단어가 시의 안을 서성댄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연약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시. 


혹 그대가 아니었나 몰라 어젯밤 어두운 벌판에서 베었던 수많은 꽃모가지들 아무리 칼을 놀려 베어도 잘린 그 자리에 끝없이 돋아 피던 그 밤의 꽃들이 실은 그대가 아니었나 몰라 (...) 지난 밤 벌판에서는 벌거숭이로 낯선 짐승 한 마리가 실은 꽃을 지어뜯으며 먹고 먹다 토하고 토하고 다시 먹고 하였던 것인데 정녕, 아니었나 몰라, 그 붉음이, 실은, 그대가, 자꾸 부스러지는 공기의 지층 위 그대라는 달콤하고 슬픈 종족이 새겨놓은 희미한 암각화에 홀려 나도 짐승도 꽃모가지도 바람도 벌판도 가득 붉어지지는 않았는지, 몰라,

(허허 中)

시는 애절함을 무협서사의 외피에 담아 표현해낸다. 수많은 무협소설에서 부모의 원수를 베듯, 그렇게 처단한 꽃모가지 같은 사랑. 흐드러져 떨어저 휘날리는 붉은 그대의 이미지. 풍성한 감각의 서사가 시 한 편을 오래 붙들고 있게 한다.




1980년생 시인은 등단하며 "세상에 없을 수밖에 없는 시를 쓰겠다." 라고 마음먹었다. '없을 수 밖에 없는' 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김현이 엮은 첫 시집 <글로리홀>은 이 시집의 해설처럼 시집, 소설집, SF, 포르노그래피, 하드코어 야오이물, 팬픽, 비트 혹은 히피의 경계를 넘나든다. 대중문화의 영상문법이 일상적으로 인용되고, 수많은 각주와 인용, 맥락이 하이퍼텍스트로 작용한다. '씨발'이 아닌 '퍽'을 외치는 무국적의 소년들. 이들이 선보이는 난폭함과 현란함. 쉬이 읽히진 않지만, 쉬이 잊히지도 않는다.


일렬횡대로 젖은 운동장을 행군해 오는 두꺼비 떼의 구령에 맞춰, 녀석은 힘껏 달렸네. 나는 녀석의 반짝이는 드리블을 떠올렸지. 골을 넣을 때마다 퍽을 내뱉던 입술은 퍽 신비로웠어. 침으로 범벅이 된 감정은 부드럽고 미끄덩하고.

곧 줄줄 흘러내렸네. 감정의 불알을 감추고, 녀석은 황량하고 사랑스러운 발길질로 나를 걷어찼지. 유리창 안에서 시간에 좀먹은 내가 늙은 신부처럼 나를 나처럼 바라볼 때. 녀석은 똥 묻은 팬티를 끌어올리고 사라지고 아름답고. 나는 면사포처럼 속삭였어. 안녕.


(늙은 베이비 호모 中)


순하지도, 편하지도 않은 이미지들. 어떤 게이 소년의 실패한 첫사랑은 마치 자기비하 같은 난폭한 이미지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이 소년의 '자줏빛 여름' 같은 감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축구화를 구겨신고 자줏빛 여름에게서 도망치고 있을 누런 뻐드렁니 호모들의 감정'에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표현 너머의 정서, 이미지 너머의 마음이 느껴지는 안타까운 순간, 개성적이고 독특한 시의 질감이 한 인간의 감정으로 구체화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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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 / 안현미 지음 / 

 2014년 5월 21일 발행




안현미의 시집 <곰곰>에서 그가 묘사한 사랑은 독하기 짝이 없었다. 동맥을 오리고 삭발을 감행하는 사랑.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건 사랑도 아니었지 그냥 지상에서 가장 높은 방에 서로를 모셔두는 일이었지" (옥탑방 中)이라고 회고하는 사랑의 모습. 독하고 처연했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거짓말을 타전하다 中)라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밤을 보내야 했을지를 상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 안현미가 "저 파랑, 저 망망!"(최치언 추천사 중)이라고 소개되는 시집을 엮었다.


누나......나...... 내일부터 꽃을 준 여자랑 연애할 거예요 밑바닥에서 사랑까지 생을 바꾸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사랑 묵묵부답인 사랑 마네킹 같은 사랑...... 위상공간 같은 지옥과 싸이버 같은 천국을 하루에도 수십차레 왔다 갔다 하는 사랑 꽃이, 꽃이, P지 않는 사랑...... (중략) 그러니 누나...... 봄이나 기다리며 생을 낭비하자던 약속 같은 건 종량제 쓰레기 봉투에나 버려줘요......


(이별수리센터- P에게 中)


청자를 특정한 연서, 아마도 마지막일 편지는 단정하고 경쾌하다. 꽃을 준 여자와 연애를 하고, 꽃을 준 여자와 여행을 할 거라는 화자의 다짐은 즉흥적이고 가볍고 쾌활하다. 그가 경험했을 사랑은 수리해야 할 사랑이다. 수리가 필요한 지점에 "변증법적인 단게를 거쳐 서른이 되고 싶다"고 했던 헛된 말이 있고, "우리 모두 미래의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라는 텅 빈 말이 있다.


<꽃이, P지 않는> 사랑이라는 재치있는 수식은 경쾌하다. 자신의 사랑이 열매맺지 못함을 인식하기까지, 도저한 사랑이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달구어야 했을까. 괴로움이 없는 상태의 경쾌함이 아닌, 괴로움을 뛰어넘은 경쾌함이라 더욱 마음을 울린다. 그리하여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는 화자의 추신은 이 경쾌한 화법에도 불구 일종의 선언처럼, 예언처럼 들린다. 



포도나무가 있는 여인숙에 홀로 투숙한 여행객의 고독처럼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라고 매일 아침 자신을 속이는 어떤 허무처럼 일인용이고 일회용인 한개도 재미없는 삶처럼 그리하여 죽음처럼 글렌 굴드를 듣는다 출근과 퇴근, 누가 만든 미로일까? 당신은 무거울 필요도 가벼울 필요도 없다 당신이 없는 겨울을 거울처럼 들고 사랑의 부재 또한 사랑 아니겠는가 


(그도 그렇겠다 中)


고통도 지나가고, 슬픔도 지나가고, 잊지 않아야 할 것을 잊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이렇게 한 해의 절반이 갔다. 무거울 필요도 가벼울 필요도 없는 나날. 어느날 수리될 나날을 기약하며 다음 어느날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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