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6』- 공간이 내게 주는 짧은 단상


- 윤진영


시작. 


- 너 지금 뭐하고 싶어?

그녀가 물었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하얀 손가락을 살며시 들어 귀 뒤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두 눈을 반짝였다. 콩. 콩. 콩. 반짝이는 그녀의 두 눈이 새빨간 광채를 내며 툭, 튕겨 올랐다.

- 지금?

나는 쌜쭉한 표정으로 뭉툭한 손가락을 살며시 들어 인중을 긁어 내렸다. 시커먼 먼지가 딸려 나오고, 먼지 속에 숨어있었던 찌든 냄새가 코끝을 재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쿵. 쿵. 쿵. 찌든내가 지나간 자리마다 손가락이 저려왔다.

- 나......서른여섯 살이 될래.

엄지와 검지를 세게 비비자 돌돌 말려진 먼지가 뭉치 채 딸려 나왔다.

- 서른여섯? 왜?

툭, 튕겨 오른 새빨간 광채가 시커먼 손가락에 쿵, 박혔다.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이마에 갖다 댔다.

- 응. 서른여섯 살. 내가 아는 멋진 사람들은 다 서른여섯 즈음이야. 나도 서른여섯 즈음엔 뽀대나게 살고 있을 걸?

서른여섯. 내가 꿈꾸는 세상이다. 시커먼 먼지가 딸려 나오지 않는 서른여섯 살, 찌든 내가 지나가도 저리지 않는 서른여섯 살의 손가락, 새빨간 광채 따윈 박히지 않는 서른여섯 살. 그 즈음엔 나도 내가 아는 누군가들처럼 서른여섯개의 세상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을 것이다. 서른여섯의 세상을 꿈꾸니 찌든내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뭐, 그 땐 내 세상일걸? 그렇지 않아?


- 서른여섯......?......지랄한다.

탁. 나는 보고 있던 거울을 엎어버렸다. 새빨간 그녀의 눈동자가 탁, 엎어졌다.



요즘 나는 이상하다. 이상하다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내뱉을 정도로 이상하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봐도 잘 모르겠다. 스물여섯이 된 후 처음으로 울어도 보고, 잘해주는 누군가에게 자꾸 어리광도 부리게 된다. 이렇게 이상해진 내가 요즘 들어 자꾸 서른여섯을 꿈꾼다. 열여덟에 스물을 꿈꾸고, 스무 살에 서른을 꿈꾼 것처럼. 스물여섯에 서른여섯의 세상을 꿈꾸게 된다. 아직 서른이 되어 보지 못한 내가 서른하고도 여섯을 더 꿈꾼다.

서른? 서른여섯? 서른이라는 경계가 무섭다. 서른이 뭐 별거라고, 생각해 봐도 아직 스물하고도 여섯밖에 안됐으니까. 서른이라는 줄 건너편 그 곳에는 뭐가 있을지 도통 알 수 없으니까. 아직 어리다고도 다 컸다고도 말하지 못하겠다. 아는 것도 무서운 것도 많은 것을 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스물여섯은.

어제 오랜만에 최영미의 시를 읽었다. 최영미의 시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의 대표작은 자주 읽게 된다. 오래 전에 서른을 넘겨버린 최영미의 시를 서른이 되려면 4년이나 더 살아야 하는 내가 읽었다. 10대에는 스무 살이 되고 싶었고, 20대에는 서른 살이 되고 싶은 내가 시를 읽고 어른을 생각했다. 아직 어른이 되기에는 삶의 찌든 경험은 해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아이로 남기에는 삶의 어두운 이면을 조금이라도 맛보았기에 아주 살짝 어른을 생각했다. “어른”이라는 것은 동시에 “서른을 넘긴다”라는 뜻 같다. 참 삶이 무섭다. 서른을 넘기자, 그간의 잔치는 쫑나버렸고, 옆에서 같이 울고 같이 웃던 사람들은 삶에 치여 고개 숙인 채 하나 둘 떠나버리고, 남은 것은 서른을 넘겨버린 나이뿐이다. 30이라는 숫자가 삶의 경계라도 되듯이 말이다.

내가 있는 공간에는 서른여섯 즈음의 사람들이 많다. 범접할 수 없는 위화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이 내게 보여 준 서른에서 서른여섯 즈음의 나이가 너무나 낯설다.

낯설고 낯설어서 갖고 싶을 만큼.


어쨌든 지금의 내게는 서른이라는 나이가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언가의 나이인 것 같다. 서른여섯이 되면 지금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만 같다. 물론 서른여섯의 그들은 이런 내가 우습겠지만. 여전히 나는 10대 시절에 20대를 꿈꾸었던 것처럼 지금 서른여섯을 꿈꾼다. 대학을 떠나 사회로 나와 서른은 더 치열하고, 더 회색빛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이제 그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서른여섯 즈음의 사람들과 함께 살 부대끼며 살고 있는 이 공간의 하루하루를 낯 설은 문체에 담아 스물여섯의 내게 보내려 한다. 사랑하며 사랑하는 삶의 공간에 조그마한 관심을 표하며.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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