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6』- 그날, 나에게 일어난 일




그 날, 나에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시작은 여느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전 8시. 나는 아직 졸음이 떨어지지 않은 눈을 부비면서 사무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휙 열리면서 낯익은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 어? 일찍 왔네요.

키가 큰 그가 똑바로 선 자세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척 말을 걸었다.

- 뭐야, 새벽별 보기 운동하는 거야? 왜 이리 일찍 와.

- 안녕하세요.

나는 대충 인사를 건네받았다. 책상 바로 옆 거울 위 시계가 막 8시 10분을 지나려던 참이었다.

거기까지는 어제도 그제도 똑같았다. 늘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자리에 앉아 있으면, 똑같은 그들이 동시에 나타났다. 그렇지만 8시경, 그들이 가방을 들고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어제와도 다르고 당연히 그제와도 다른 감정을 맞이해야만 했다. 내일을 미리 볼 수 있다면 내일과도 물론 다를 어떤 것. 나는 먹다 만 커피를 한꺼번에 쏟아 부은 뒤, 생각했다.

뭔가 이상한 것이 내 안에서 생겨날 것만 같아.

그 뿐이었다. 밑도 끝도 보태고 빼고도 없는 그 뿐. 36의 그들이 오전 8시 경 나타나자 내 마음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뭐라 말하든 어찌 되었든 8시경에 만난 그들이 자기 자리로 가 앉았고. 다시 우르르 일어나 담배 한대 피러 빠져나갔고. 바로 그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술렁거리고 요동치는 내 상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들을 따라 강당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예전의 감정을 기억해 냈다. 너무너무 닮고 싶었던 그들의 모습과 나의 감정을 기억해냈다. 쿵쿵쿵 튀어 올랐던 가슴과 콩콩거렸던 내 발걸음을 기억해 냈다. 순간, 아찔했다.

나는 강당으로 가려던 발길을 다시 돌렸다. 저 문만 지나면 그들이 내뿜는 담배연기와 웃음과 허탈함과 열정과 그 모든 것들과 함께 할 수 있을 테지만 거기까지 갈 수가 없었다. 술렁이는 눈과 마음이 나를 다시 자리에 가 앉게 했다. 예기치 못한 감정이었다. 요동친다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다짐이라도 받듯. 크고도 단호한 그 감정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낯설고 돌연한 어떤 이물질이 내 몸에 박힌 것이다. 불순한 물질이 박힌 내 마음은 어색했고, 뭔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목격한 것처럼 스스로 죄스런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마음을 멈추기가 힘들었다. 아침 바람은 서늘했고, 빛은 적당히 밝은 기운으로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흠, 따뜻해. 오늘은 별로 안 춥네.

옆자리로 다가오며 그들이 말을 건넸다.

-오늘 추운데요? 난 얼어 죽는 줄 알았어요.

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따뜻하기는 무슨, 나는 이렇게나 서늘한데. 그러고 보니 벌써 겨울이 시작되려 한다. 봄에 이곳에 와서 여름과 가을을 버티는 동안 36을 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다가 26의 겨울까지 다다랐다. 애 쓴 보람도 없이 날은 서늘했다. 날이 차가워지자 창  밖의 나무들이 따뜻한 기운을 뿌리 끝부터 끌어올리려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손바닥보다 더 큰 잎사귀들은 누렇게 탈색되어 가고 있었다. 잎을 털어낼 수록 나무들은 제 안의 열기를 뽑아 올려 겨울을 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발끝에서부터 열기를 끌어올려 겨울을 나야 하는 걸까. 나는 왼손으로 만지작거렸던 핸드폰을 책상위에 살며시 올려놓고 바쁜 척 파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일 없이 뒤적이는 손길이 영 어색했다. 이 공간은 온통 자판 소리로 넘쳐 났고, 몇몇 사람들은 빠르게 담배를 피기 위해 들락날락 했으며, 16개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전화기들은 쉼 없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나는 팔목에 감긴 시계를 내려다 봤다. 9시. 시계에서 눈을 거둬 뒤를 돌아보았다.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세 명의 사람이 똑같은 포즈로 꼿꼿하게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양 손은 날카롭게 자판을 쥐고 있을 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들의 앞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세 개의 크고 작은 등이 동시에 숨을 쉬고 있었다.

-뭐해?

뒤 돌아 멍하니 있던 몸을 돌리는데, 턱, 하고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에? 

나는 옆을 쳐다보았다. 장난기 가득한 모습의 그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고.

나는 그들의 흔들리는 손을 보며 온 몸의 감각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왜 이러지? 술렁이는 눈과 떨리는 손가락과 요동치는 마음을 또다시 느낀 순간, 눈앞에 섬광이 번쩍였다. 짧은 폭발이 내부에서 일어난 것 같았다. 이야말로 내가 알지 못하는 것.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부에서 일어난 작은 폭발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또, 또!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안 좋아.

걱정스런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비교적 온순하고 평탄하게, 소심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내가, 내부에 숨은 작은 불꽃을 그렇게 강하게 터뜨리게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나는 갸웃거렸다. 그런데 왜 하필 이 곳, 이 시간일까. 문득 아직도 손바닥에 미열로 남은 아까의 뜨거운 열기가 두려워졌다. 여전히 아침 햇살은 기분 좋게 비쳐들고 있었고, 책상 옆 시계는 10시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10시, 책상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핸드폰이 드르륵거렸다. 나는 양손을 가지런히 비비며 핸드폰에 오른손을 갖다 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온 몸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조용히 슬라이드를 밀어 올리고, 문자 버튼을 꾹 눌렀다.

『......그렇다고 대답할거야. 넌 어때?』

이것이다! 나는 요동치는 마음을 또다시 느끼며 문자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메뉴버튼을 눌러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했다. 설령 핸드폰을 버리게 되더라도 이것만은 지워지지 않도록.


......

자, 정리를 해보자. 불순한 물질이 박힌 가슴을 따로 떼어 내 구석구석 살펴봐야 할 일이다. 그 날, 내게 박힌 불순한 물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리 요동치고 있었는지 세밀하게 조사해 봐야 한다.


그 날, 오전 7시 40분이었던가. 횡단보도 옆에서 살짝 몸을 틀면 사방에서 불어오는 파란 물줄기가 가로로 긴 대형 빌딩 꼭대기 위 더 높은, 회색 빛 하늘로 스카이 스크린처럼 떠올랐다. 허공을 질주하듯 거리에서도 하늘거렸던 나의 마음은 무거운 발을 이끌고 더 높은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차오르는 숨을 내 쉬고 사면체 커다란 상자 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닦여진 도로 위에는 각양각색의 차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온 거리는 차가운 푸른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어찌 보면 흡사 날카로운 칼 같은 빛이 두 눈을 강하게 찌르고 있었다. 천천히 두 발을 건물 안으로 들이밀었다. 두 눈을 쳐대던 시퍼런 빛이 발끝을 휘감고 따라들어 오려는 묵직함이 느껴졌다. 나는 정문 앞에 서서 퍼런 빛줄기를 탁탁 털어 냈다. 발끝을 감고 있던 빛줄기를 걷어 내고 문안으로 들어갔다.

지워지지 않는 문자로만 채워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심호흡을 했다. 혹시라도 또 올지 모르는 그것을 위해 핸드폰을 가지런히 주머니에 넣었다. 하나, 둘, 셋.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살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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