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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붉은 로자. 불꽃의 여인.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두뇌.
레닌, 한마디 덧붙인다.

"그녀는 혁명의 독수리였으며,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순정한 혁명주의자의 이름.  
급진적이었고, 극좌라는 표현도 잘못된 건 아닐 것이다.
폴란드 출신 독일의 사회주의자인 그녀는,

타협을 모르는 불굴의 혁명가였다.

엊그제 장원봉 교수의 협동조합 강연,

로자 누나의 이름이 언급됐다. 반가웠다.
뜨거운 수정주의 논쟁을 펼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과 협동조합과 관련해 펼친 논쟁의 일부.

 

로자는 협동조합을 수정주의로 인식했다. 그녀는 주장했다.
"협동조합에게서 무슨 사회성을 발견할 수 있지? 결국 그것들은 개인주의적인 것뿐이야. 결국 개인주의 기업으로 퇴행할 거야."

베른슈타인은 반박했다.
"생산자협동조합은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소비자 협동조합의 구매를 위해 생산한다고!"

다시 로자는 공격했다.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세상을 봐. 거대한 제조산업이 성장하고 있고, 그것이 협동조합으로 가능할까?"

베른슈타인, 뜸을 다소 들이며,
"하지만 우리는 산업자본은 노동조합이 통제하고, 상업자본은 소비자협동조합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


100년 전이었다. 결과적으론 로자의 주장이 옳았다. 
급격한 시장화와 제도화가 진행되면서 이전에 발흥했던 사회적경제는 퇴조했다.
복지국가의 도래도 협동조합이 약해지는데 한몫했다. 국가가 협동조합의 몫을 대신했으니까.

로자는 어쨌든 대처 이전 '철의 여인'이었다. 물론 대처와 판이하게 다른 철학과 사상으로 실천한.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 로자의 신념과 이상은 그에 기반했다. 실패도 그녀에겐 자극일 뿐.  

로자가 마지막에 남긴 글은 이랬다.
"그러나 혁명이 가진 특수한 생명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거듭되는 패배를 통해서만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말, 바꿔말하면, "씨바, 쫄지 마!"
즉, 패배는 혁명의 '스펙'이다. 스펙을 그만큼 쌓아야, 승리도, 혁명도 가능하다는 법칙.

결론은 이렇다.
나로선, 로자 룩셈부르크와 커피의 친연성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순정한 혁명주의자였기에 그녈 떠올린다면 1월15일의 커피는 '리스트레또'.
커피 향과 맛을 좌우하는 성분 중심으로 뽑는 리스트레또가 맞다.
잡맛을 가능한 제거한 순정한 에스프레소의 엑기스.  

로자는 93년 전인 1919년 이날,

살해당했다. 비극, 그 자체였다.
한때의 동지가 집권한 가운데, 군인의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고 확인사살당했고 강에 버려졌다.

그 죽음,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노래했다.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 그녀의 몸이 쉬는 곳마저 알 수 없으니/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고/ 그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이 그녀를 처형했다네."  


한명숙
1월15일. 1919년 로자는 죽었고 2012년 한명숙은 민주통합당 당대표가 됐다.
한 여성이 죽고, 한 여성이 일어났다. 1월15일의 커피가 '리스트레또'가 돼야 할 또 하나의 이유.

아 물론, 로자와 한명숙은 너무도 다른 인물이다.
'무죄녀' 한명숙 대표, 청렴한 행정가일 수 있겠다. 반MB정서를 업고 야당 대표로까지 올라섰다. 잘된 일이다. 그것도 여성이. 격하게 찬성!

그러나, 냉정하게. 한 대표가 정권을 바꾸게 하는데 일조할지는 모르겠다. 
한명숙(으로 대표되는 세력)이 인민의 삶을 바꾸진 못할 것이다. 혁명은 없다.   
지금 엄혹한 1대99 시스템을 바꿀 정치인, 아니다. 나는 그들의 개혁(가능성)조차 회의한다.
근본적 모순에 대한 언급도 없고, 반성도 미미하다. 그 모순을 해결할만한 콘텐츠도 미약하고.

더 냉정하게 투표로 이들 세력에게 권력을 준들,
그들이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반성과 성찰, 깨달음을 통한 실천을 못한다면,
우리는 투표 기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투표만 하면 뭐든 바뀐다고? 조까라 마이싱. 내가 보기엔 그들은 로자가 아니다.
결국 인민이 말을 하고 행동해야 한다. 투표보다 직접 액션을 통해 점령해야 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월호, 세르주 알리미 발행인의 말을 담아둬야 할 이유. 
"만약 올 한 해 동안, 권력을 휘두르는 금융자본을 제어할 적절한 수단과 정치적 의지가 표출되지 않는다면 모든 선거는 쓸데없는 짓이 될 것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독일 베를린의 지하철 한 역 이름이 '로자 룩셈부르크'라더라.
그 언젠가 1월15일엔 로자 룩셈부르크 역에서 리스트레또 한 잔을.

아 물론, 강철 여인, 혁명의 독수리에게도 사랑은 있었다.
리투아니아 출신 사회주의자 레오 요기헤스. 로자의 오랜 스승, 동료, 연인이자 사실상 남편.
고종석에 의하면, "독립 여성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로자가 레오 앞에서만은 순한 양이 되었다." 로자가 레오에게 보낸 연애편지, 참으로 달큼하다. 로자라는 한 여자안에서 나온 것인지, 우와~

혁명은 사랑과 함께다. 커피도 사랑과 함께라면, 이날의 리스트레또는 달금하다.  


룩셈부르크
로자 '룩셈부르크' 얘기기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룩셈부르크의 속담 중 하나. (으응?)
"룩셈부르크인은 혼자 있을 때 장미밭을 가꾸고, 둘이 모이면 커피를 마시고, 셋이 모이면 악단을 만든다." 그렇게 커피를 들입다 마시니, 이런 통계도 나온다.

2010년 기준 27.2kg.
룩셈부르크 한 사람당 1년에 소비하는 커피의 양이다. 세계 최대란다. 한국? 
같은 해 기준 1.9kg이다. 전 세계 34위. 그래봐야 룩셈부르크의 1/14이다. 


루니 마라(루느님!) 
여자 얘기 또 안 할 수 없는데, 나, 한 여자한테 단단히 뿅 갔다.
이토록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라니! 일은 물론이요, 자기 앞가림도 끝내주게 잘한다.  
용 문신한 여자가 이리 치명적일 줄이야. 격하게 애정할 수밖에 없는 여자, 루니 마라!!!
데이비드 핀처판 <밀레니엄>히로인이다. 남자주인공 미카엘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 저리 가~

얼굴과 몸 곳곳엔 피어싱, 등에는 용 문신, 가죽점퍼로 간지를 뽐내고 줄담배를 피우며 오토바이를 모는 폭주족, 리스베트 역의 루느님.

그녀가 극중 법적보호자인 변호사 닐스(요릭밴 와게닌젠)의 변태성행위에 복수하면서부터, 나는 훅~ 갔다.

미카엘을 죽음 직전에서 구하고,
그에게 May I Kill? 하고 묻는데, 씨바, 얼릉 죽여 줘, 죽여 줘, 뒤따라다니면서 외치고 싶었다.

한 마디로 '마성'!
예쁘진 않은데, 이뻐~
그 미친 존재감에 내 눈은 번쩍, 귀는 쫑긋, 말초신경은 아~
아드레날린 강하게 돋는다. 보장한다. 이 여자만으로도 충분하다.

리스베트가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미카엘을 사랑할 때, 나는 한없이 미카엘이 부러웠더랬다.
그녀의 온몸을 더듬고 애정하는 미카엘이 되고 싶었다.
물론 마지막 장면, 그녀는 끝까지 쓸쓸하고 멋지다. 
뻔하디뻔한 금발 편집장과 시간 보내려 리스베트의 사랑을 소외시킨 미카엘, 바보에 멍충이다.
여자 볼 줄 모르는 병신. 내게 이런 여자만 있어봐라. 평생 뫼시고 산다!

이런 파격은 드물다.
루니 마라, 단숨에 줄리아 로버츠, 스칼렛 요한슨과 동급으로 내 여신전에 올랐다. 루느님~

강한 여자에 대책없이 끌리는 나는 역시 '강한 여자종속형 수컷'일세.ㅋ



남자3호
남자 3호, 재밌고 신나는 경험.
내가 찍은 여자는 매력투성이에 마성이 보이건만, 아무도 안 찍는다.
선물만 줬다. 나도 염치를 아는 사람이니까!ㅋ   
그녀,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며, 자신의 서사를 가진 사람 같았다.
살면서 어떤 변수가 그녀에게 개입할진 몰라도, 내 느낌이 맞다면,
그녀는 더 멋있는 마성의 여자이면서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헤이데이의 캘리그래피. 멋있다!


아울러,
10만 년 전에 내가 여자였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얼마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여자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내 이름은 왜 이리 제 각각이야. 쯧.  
인디언식 이름. 웅크린 태양의 그늘(그림자) (음력. 웅크린 늑대의 고향)
조선식 이름. 소싯적 마당쓸던 기생오라비. (팡 터졌다.)
일본식 이름. 아이노 켓쇼오. 사랑의 결정.
중세식 이름. 알버트 콘라드. 대단히 뛰어난 수다스런 조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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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마실까?"... '천일의 약속'을 맺은 시작

   
 

사실, 거의 모든 커다란 위기 때 우리의 심장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따스한 한 잔의 커피인 것 같다.       - 알렉산더 왕(?) 

 
   

밤 9시, 늦은 시간이다. 커피를 마시기엔. 물론, 커피 마시면 잠 못잔다고 징징대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얘기다.

누군가에겐 밤 9시가 깨어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정신이 또렷해지고, 이성과 감성이 서로를 견제한다. 세계가 새롭게 열리기도 하는 창조의 시간.

우리 커피하우스를 찾는 많은 사람은 후자의 시간일 것이다. 나는 그 구체적인 하나하나를 위해 단 하나의 커피를 내린다. 그들이 창조의 비행기를 몰다가 잠시 숨을 고를 때, 창조의 윤활유를 공급하는 공중급유기.  

밤 11시에 도달한 시간이었다.

"에스프레소 도피오 주세요."

이 시간, 에스프레소, 흔하지 않은 경우다. 그것도 도피오라니. 50대로 보이는 여인은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말투는 단호했고, 어떤 옵션도 필요없다는 투였다. 설탕 혹은 시럽, 크림이나 (스팀)우유도, 꼭 사치라는 뉘앙스. 이럴 땐 말 없이 추출하는 수밖에. 그저 황금빛 에쏘 도피오를 놓으면 그 뿐이다.  

알레고리.

표면에 드러난 것으로 내면의 숨은 뜻을 전달하거나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건 곧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 주관성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다층적이고 모호한, 풍부한 해석이 가능하다. 헛다릴 짚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천일의 약속>에는 커피가 알레고리가 되는 지점(들)이 있다. 아마 대부분 시청자들은 그런 생각, 않을 것이다. 하긴 내가 괜한 꼼수다.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에 갖는 혼자만의 알레고리. 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커피를 통해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편다.

"자살 폭탄을 짊어진 놈"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지형(김래원)이 결국 폭탄을 터트렸다. 충분히 터질 줄, 누구나 알았던 그것. 향기(정유미)를 향한 파혼 선언. 정혼자가 있음에도 사랑했던, 아니 사랑하는, 그러나 기억을 잃어가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여자, 서연(수애) 때문이다.

뭐, 수애 정도라면 나라도 그러겠다, 고 말하지만, 알다시피 폭탄의 사정거리는 주변부 싹쓸이! 직격탄을 맞은 지형의 엄마 수정(김해숙)은 용케 연락처를 알아내어 득달같이 서연을 찾는다. 

  


수정과 서연이 처음 마주대하는 순간. 서빙이 이뤄지는 고급스런 커피하우스다.

"어, 나는 에스프레소 더블, 서연씨는?"

어떤 차를 마실지 묻는 서연의 질문에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단호한 말투다. 당연히 그것이어야 한다는,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알렉산더 왕의 것인지 의심(BC에 커피를 마셨을까?)이 가는, 커피에 대한 말이 떠올랐다. 커다란 위기, 심장에 필요한 것, 한 잔의 따스한 커피. 커피 메뉴로 위기의 정도를 가늠한다면, 에스프레소, 그것도 도피오는 최강이다.  

곧 그것은, 수정여사의 마음이다. 아들의 폭탄같은 파혼선언으로 벌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고 싶은. 빠르게(express) 내린 에스프레소마냥 위기에서 빨리 벗어나고, 특별히 너(손님)를 위해(especially for you) 만든 에스프레소(Espres)를 마시는 날 봐서, 내 애원을 들어달라는.
 
에스프레소 더블이 내겐 그런 알레고리였다. 폭탄 맞은 여자의 어떤 안간힘 같은 것.

그렇다면, 알츠하이머와 싸우는 여자의 주문은 무엇일까.

에쏘 더블을 시킨 수정이 뭘 마실지 묻자, 서연은 살짝 벙 찐 표정을 짓는다. 엇, 이게 뭐지? 하는 얼굴. 처음 보는, 심각하거나 불편할 수 있는 관계의 사람이 에쏘 도피오를 시킨다면, 충분히 흠칫 놀랄 수도 있겠다. 에쏘가 주는 알레고리 때문이다.

서연은 곧 이를 수습하면서 아메리칸을 주문한다. 에쏘와는 확연하게 다른 커피. 그것이 두 사람이 현재 처한 세계의 다름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아메리칸은 진한 커피를 싫어하는, 아주 연하게 추출한 커피다. 드립이나 커피메이커로 내려서 거기에 다시 물을 섞은. 나는 당신이 왜 온 것인지 모릅니다, 라고 말하는 듯한.
 

그것은 유럽과 미국의 차이이기도 하다.

유럽의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지에선 에스프레소(도피오)를 즐기나, 미국은 매우 엷은 아메리칸을 선호한다. 그래서 아메리칸이다. 레귤러보다 더 연하다. 
 
그녀는 지형과 나눈 사랑의 단초가 된 커피를 마실 때도 해롭다며, 오래 살아야 한다며 설탕을 넣지 않는다고 농담처럼 말한다. 아메리칸 역시 설탕이나 크림을 넣지 않는다. 그녀의 커피 취향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맑고 자극적이지 않다.

두 사람의 관계와 성향이 커피를 통해 드러나는 순간. 두 사람이 처한 상황과 이야기를 커피를 통해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게 된 서연이 지형을 만나 오피스텔로 가는 그때. 그 위태롭고 애처로운 순간에도 서연은 익숙하게 커피를 갈고 추출한다. 두 사람의 익숙한 리추얼. 그러면서도 위기에 그들의 심장에 필요한 따스한 커피 한 잔.

날마다 바보가 되어가는 치매 환자인 여자와 그녀를 사랑해서 다른 여자와 파혼한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커피 한 잔이다. 그것은 어쩌면 안간힘이다. 왜 저들이 저런 상황에서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은, 커피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11시에 가까운 시간, 에쏘 도피오를 마셔야 하는 저 여인의 심연도 그럴 것이다. 내가 구체적으로 알진 못하나, 그녀의 심장이 근본적으로 필요로 한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기에 황금빛 'especially for you'를 그녀의 심장 앞에 대령한다.

커피의 심장이 그녀의 심장을 관통한다. 오늘, 그것으로 충분하다.

참, 서연의 사촌오빠 장재민(이상우)이 초반에 서연에게 아이스커피와 따뜻한 커피를 들고 가서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그걸 놓고 자상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얘기한다. 허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서연을 아끼고 보살펴주는 척 하는데, 그녀의 취향조차 모른다? 예술가적 예민함과 섬세함을 지닌 서연이라면, 아마 아이스든 따뜻한 음료든 자기 것이 있을 것이다. 그걸 모르고 냉온 모두를 들고 간 것은 무심함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다! 

  

  
 

 

밤9시의 커피. 밤 9시가 넘으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이 있는 곳. 그 커피 한 잔으로 생을 확인하고, 외로움을 위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피 한 잔에 담긴 어떤 세계의 확장과 연결도 엿본다. 커피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밤 9시가 되면, 낮에 만든 커피와는 또 다른 커피를 내린다. 그 커피는 오로지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다. 그리고, 당신과 나만 아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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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1월10일,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 랭보 한 잔
    from 맺고,따고,볶고,내리고,느끼고,사랑하라! 2011-11-10 02:51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먼저 인생을 바꿔야 한다. -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오늘, 특별히 이 커피콩을 볶는다. 에티오피아
 
 
 

아마, 커피를 하고자 마음 먹었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 갔다. 고향은 언제나처럼 좋았고, 영화도 좋았다. 바다는 날 반겼고, 친구들은 여전했다. 부산은 그런 곳이다, 내겐.  

그리고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향하는 날, 친구 집에서 새벽같이 움직여 지하철을 탔다. 이른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표정을 지켜봤다. 지하철이든 버스든, 새벽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블루칼라' 계층이다. 이른 새벽에 대중교통을 이용해보면 알 수 있다. 블루칼라가 여는 아침을. 영화를 실컷 즐기다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가는 당시 내 처지와 달리, 그들은 하나 같이 굳은 얼굴이었다. 생의 고단함이 온 몸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커피가 떠올랐다. 그들의 고단한 아침에 커피 한 잔의 위로를 건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과 함께, 그들에게 작은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런 커피를 건네고 싶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여균동, 김조광수, 김꽃비 등 1543명의 영화인들은 "김진숙, 그녀와 영화를 보고 싶습니다"라는 연대감을 표했다. 지상에서 35m 타워크레인 85호에 놓여 있는 김진숙 위원에게 대형 스크린으로 영화 한 편 보여주고 싶다는 말이었다.  

예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가 생각나면서, 나는 김진숙 위원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고 싶었다. 내 마음과 그녀를 향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내린 커피를 말이다. 그렇게, 한 사람을 위한 커피. (* 김진숙 위원이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타워크레인에 오른 지 288일째다. 그를 지키는 정흥영, 박영제, 박성호 씨가 오른 지 116일째 되는 날이다.)

커피는 여전히 내게 새로움과 배움을 안겨준다. 홍대부근 '마지'에서 열린 《커피 마스터클래스》 신기욱 저자의 커피 강연에서도 그랬다. 그를 두 번째 만났다. 과거, 커피마루 MT에서 만났었다. 물론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강연도 좋았고, 책도 참 좋았다. 커피를 만들면서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잘못에서 탈피하게 해주거나 이론적으로 강화해주는 계기도 됐다. 내 커피가 좀 더 깊어지고 세심해질 수 있겠다 싶었다. 고맙다.  

아래는, 그 유익한 배움과 새로움이 있었던 시간에 대한 나의 기록이다. 잡스의 생물학적 정자제공자(아버지), 압둘파타 잔달리의 회한을 끄집어낸 것은, 커피 한 잔의 슬픔 때문이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이말, “때때로 인생은 단지 커피 한 잔의 문제, 혹은 커피 한 잔이 가능케 해주는 친밀감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과 조응하는 그의 회한. 아들과 커피 한 잔 나누고 싶다는 소원을 끝내 이루지 못한 아버지의 슬픔. 

밤9시,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은 그러니까, 온전히 한 사람, 당신만을 위한 것이다. 아침을 깨우는 당신을 위한 커피 한 잔, 김진숙 위원을 위한 커피 한 잔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생의 고단함은 당신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것이니까. 당신을 위한 커피 한 잔은 당연한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날을 꿈꾸고 있다.  

물론, 그 모든 것 물리치고라도, 나는 사랑하는 당신 한 사람을 위한 커피를 내려서 함께 느끼고 사랑하고 싶다. 그녀가 내게 건네는 이 말, "커피, 참 맛있다." 내 생은 그 커피 한 잔으로도 충분하다.   

커피를 제대로 즐기기 위한 '마지'의 몇 가지 조언

가을이다. 커피, 생각난다. 울긋불긋 휘황한 단풍의 향연도 좋지만, 커피만큼 가을을 느끼게 하는 게 있을까. 특히나 비오는 가을아침의 커피는, 하루를 송두리째 바쳐도 좋을 만큼 맛있다. 온몸을 휘감는 커피에 나는 포로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마음까지 담은 커피 한 잔이라면, 그보다 좋을 순 없다.

비오는 가을아침의 커피가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기온과 기압 때문이란다. 쌀쌀한 가을날의 아침, 커피를 통해 몸의 신진대사를 끌어올릴 뿐 아니라, 낮은 기압 때문에 처진 몸을 일으켜 세운다. 커피향이 더욱 풍부하게 느껴지는 이유에 기압도 한 몫 한다.

그렇게 가을은, 커피의 계절이다. 가을 한 잔이 절실해지는 즈음이다. 낙엽이 지고, 한 해가 저물고 있다는 이유로, 한 잔의 커피가 주는 위로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더구나 10월은 공정무역의 달. 커피라는 창을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를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사랑한다면, 커피 한 잔. 끝내 커피 한 잔 못 나눈 채, 작별했던 사연이 슬프다. 지난 5일(현지시각)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의 생물학적 정자제공자, 압둘파타 잔달리의 경우다. 잡스가 암 투병할 때 잔달리는 “더 늦기 전에 함께 커피 한 잔이라도 한다면 행복하겠다”고 바랐지만, 잡스와 끝내 만나지 못했다. 끝내 내리지 못한 커피의 눈물.

아울러 커피를 향한 젊은이들의 열정을 착취하는 ‘콩다방’을 비롯한 프랜차이즈업체들에겐 혁명적 커피의 본때를. (청년유니온과 커피빈코리아 아르바이트생 8명은 최근 커피빈코리아 대표를 주휴수당 및 연차수당 등 미지급 임금체불 건으로 고발했다.) 공정해야 할 대상은 생산자뿐 아니다. 공정함은 바로 옆 개별의 인간에게 새겨진 존엄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돼야 한다. 커피는 그저 거들뿐.

지난 7일, 금요일의 가을밤, 더 깊은 커피를 만나기 위해 서울 홍대 부근의 ‘마지’로 향했다. 『커피 마스터클래스』 출간기념, 신기욱 저자의 핸드드립 커피체험 및 강의에 동참한 시간. 커피가 흐르고, 마음이 반응했다.  

수많은 커피지망생 중의 한 명으로서, 커피를 만들고 있는 남자인 나는, 여전히 웅숭깊고 드레진 커피의 자태 앞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커피의 세계가 넓고 깊은 한편, 지난여름 동티모르 공정무역 커피산지를 다녀온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자연의 배려로 인간이 일구어낸 내 커피의 실존에 대한 고마움과 겸허함.

커피, 어떻게 보관할까  

 

마지의 커피 철학은, ‘커피는 음식이다’에서 출발한다. 음식을 잘 하기 위해서는? 많이 먹어봐야 한다. 그래서 커피 역시 많이 먹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편견 없이 많이 먹을 것을 권한다. 그러면 답이 나온다. 편안하게 즐기면서 마실 것. 맛없는 커피도 마셔봐야~ 아, 이래서 커피는 맛있고 봐야 하는구나, 하고 절감하게 된다는 말씀.

이날 커피 강의의 시작은 보관에서부터다. 볶은 커피(원두)는 밀폐용기에 넣고 어둡고 시원하고 습기가 없는 곳에 보관해야 한다. 커피는 수분율이 낮아서 습기 먹는 하마가 되기 때문이다. 또 밀폐용기는 불투명해야 한다. 빛을 막기 위해서다. 깡통에 보관하거나 불투명한 용기가 없으면 어두운 곳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다만 플라스틱 용기는 피하는 것이 좋다. 커피 맛이 빨리 변질되기 때문이다.

커피를 보관할 때는 밀폐된 용기를 사용하고, 빛과 외부의 공기를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p.152)

그렇다면 냉장냉동 보관은 어떨까?

마지는 그것을 권하지 않는다. 냉장고에는 온갖 냄새들이 창궐하고 제대로 밀폐된 용기가 아니면 냄새가 배일 우려가 크고, 냉동 보관은 꺼낼 때 온도차 때문에 결로현상이 일어난다. 이는 커피 맛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냉동고에서 꺼낸 뒤에는 실내온도만큼 올라간 뒤에 사용해야 한다.

그러니, 마지의 당부다. 큰 용량이 싸다고 넘어가지 마라. 커피 맛은 저렴해진다.

“무조건 조금씩 사라. 커피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택배비 무료의 함정에 빠지지 마라. 그리고 멀리 있는 유명한 집보다 집 주변에서 사라!”

커피는 음료이자 음식이기 때문에 항상 보관에 유의해야 하고 수시로 변질이 없고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원두의 유효기간은 법적으로는 1년으로 정해져 있지만, 실제로는 원두 내부의 가스가 빠져나가는 시기와 연관이 있다.(p.152)

커피 추출의 이해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커피 입자를 물과 만나게 해야 한다. 즉, 커피 안의 성분을 제대로 뽑아내야 한다. 커피의 추출방식은 크게 침출과 여과가 있다. 침출은 커피 입자가 물속에 잠겨 우려지면서 추출되는 것이며, 여과는 커피 입자에 물을 부어서 입자는 걸러내고 커피의 유효성분만 뽑아내고는 과정이다.

마지는 드립 커피(정확한 용어: manuel pour over brewing coffee)를 뽑을 때의 용해와 확산이라는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했다. 용해는 녹는 것이다. 두 물질이 균일하게 섞이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로스팅 과정에서 형성된 커피 맛을 내는 성분이 물을 만나면 녹아나온다.

확산은 농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용질이 옮겨가는 현상이다. 즉, 커피 세포 안의 용액과 새로 부은 물 사이의 농도 차 때문에 커피 용액은 새로 부은 물 쪽으로 커피의 성분을 내보낸다.

“로스팅된 커피는 수많은 방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방안에 커피 성분들이 들어 있다. 분쇄를 통해 방이 노출돼 물에 직접 닿아서 용해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확산의 원리로 추출이 된다.”

마지는 커피 추출의 세 요소로 양, 굵기, 온도를 꼽았다. 세 요소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커피 맛은 달라진다. 자신의 입맛과 취향에 맞춰 이를 결정하면 된다. 진하게 마시고 싶을 때는 양을 많이 가져가거나, 커피 입자의 굵기를 가늘게 해도 되며, 물의 온도를 더 뜨겁게 한다. 반대의 경우는, 세 요소를 감안해 커피를 뽑으면 된다.

물의 온도와 관련된 마지의 팁도 따라온다. 커피 맛을 좋게 할 수 있는 물의 온도는 90~92도가 좋단다. 다만, 92도는 한계 온도다. 커피의 성분인 카페인은 92도 이상에선 모양이 틀어지면서, 커피는 타이어(고무) 타는 냄새가 날 수 있다는 것. 커피에서 고무 탄 내가 난다면 물 온도가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 있다.

“온도가 절대적이진 않으나 온도가 너무 높으면 커피의 좋지 않은 성분이 나온다. 맛있는 커피를 뽑기 위한 이상적인 조건이 있으나, 커피에 따라, 재료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이상적인 것만 추구하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이상적인 것만 나온다. 세상은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다. (웃음)”

아울러, 커피 추출할 때 맛은 추출 시간과 연관돼 있기 때문에 이상적인 추출 온도는 추출시간 역시 고려해야 한다. 추출 시간이 짧을 때는 높은 온도가 좋고, 길 때는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가 좋다.

물의 온도는 각 개인이 선호하는 맛과 추출 시간 등을 고려해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는 추출 시간에 따라서 대략 80~90도까지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p.192)

드립 커피를 뽑을 때는 이렇게 


마지는 드립 커피를 기준으로 추출 실습과 체험을 했다.

핸드 드립은 커피메이커나 에스프레소 머신 등 특별한 가전제품이나 복잡한 기구 없이도 드리퍼와 여과지만으로 간단히 커피를 추출해 마실 수 있고,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다양한 도구들을 구비해 맛의 변화도 즐길 수 있다.(p.157)

물줄기에 대한 마지의 팁이다.

“커피가 물과 고르게 만나 섞일 수만 있으면 꼭 동그라미로 붓지 않아도 된다. 다만 가능한 같은 곳에 붓지 않도록 한다. 달팽이 모양의 원심으로 붓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물줄기 굵기는 크게 상관없다. 고르게 섞일 수 있다면.  

다만 물줄기가 가늘면 고르게 섞을 수 있어서 훨씬 유리하다. 가늘게 하는 거? 하다 보면 무조건 는다. (웃음) 가늘게 붓는 게 유리하나 때론 굵게 내려야 할 때가 있다. 커피가 맑고 가볍냐, 진하고 무겁냐, 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식으로 물을 부어주는가는 크게 상관이 없다. 지그재그로 물을 부어주든 하트 모양을 그리든 별을 그리든 커피와 물이 고르게 만나게 해주어 커피를 안정적으로 추출할 수 있으면 된다. 하지만 물을 같은 자리에 계속 부어주어서는 안 된다.(p.179)

커피 한 잔은 120ml(4온스)로, 한 잔당 약 10g의 커피를 사용한다.

처음 물이 커피와 만나는 과정, 사전 추출이다.

커피가 뜨거운 물을 처음 만나, 봉긋 부풀어 오른다. 이는 원두의 세포구조 때문이다. 커피를 볶으면 커피 세포 안에 부피의 2.2배 이상의 가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혹, 뜨거운 물을 부었는데, 부풀어 오르지 않는다면, 일단 의심하라. 오래된 원두일 수 있다. 다만, 굵기가 너무 굵어도 잘 부풀어 오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가스는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최적의 보관 조건에서 커피 가스가 다 빠져나가는 건, 두 달 반가량 걸린다.”

사전 추출은 대개 ‘뜸들이기’라고 불리나, 마지는 적절하지 않은 명칭이라고 지적한다. 뜸들이기는 음식을 끓이거나 굽고 난 후 남은 열을 이용해 맛을 풍부하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전 추출은 용해와 확산이 일어날 준비를 하는 단계인데, 통상 커피의 중량과 같은 중량의 물을 부어준다. 30~40초가 적당하다.

용해와 확산이 잘 일어나도록 본격적인 추출 전에 커피 세포 안으로 물을 부어주고 30~40초 정도 기다리는 것을 사전 추출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충분히 추출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다.(p.176)

추출이 이어진다. 3~4번에 걸쳐 물을 나누어 부어주면서 원하는 양을 뽑는다. 역시 고루고루 물을 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가운데는 커피 양이 많아서 물을 천천히 혹은 많이 부어주는 것이 좋다. 주변부로 갈수록 커피의 양이 줄므로 좀 더 빠르게 혹은 가늘게 물을 만나게 해준다. 총 추출시간은 얼마면 될까? 총 2분을 넘지 않는 게 좋다는 쪽으로 잡히고 있다는 게 마지의 설명이다.

마지의 드립 추출 방식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마지는 물을 확 대충 부어서 커피를 뽑는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다. 이유가 뭘까?

“마지는 맛있는 커피가 목표가 아니다. 똑같은 커피를 주는 게 목표다. 커피 맛을 포기한 거다. 왜냐하면 오늘 뽑는 커피와 내일 뽑는 커피가 달라지면 손님이 화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맛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일정하냐의 문제를 우리는 더 중시한다. 그래서 내가 뽑으나 다른 어떤 직원이 뽑으나 일정한 커피를 주기 위해 그렇게 한다. 모든 손님에게 동일한 커피를 준다는 것이 우리의 장점이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신의 맛을 결정하고 이를 일관되게 지켜나간다는 것. 이것이 마지를 홍대의 명소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커피 맛의 변화에 대하여

커피 맛은 어떻게 형성될까?

드립을 할 때, 사전 추출과 이어진 2번째 추출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처음 추출물의 20~30%에 커피 맛의 80%가 들어 있어서다.

커피는 로스팅 과정에서 형성된 성분을 물에 녹여서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커피의 농도에 따라서 맛이 변한다. 농도가 진한 초기 추출물은 향과 맛이 강하지만 후기 추출물은 맛과 향이 연하다. 초기에 추출된 약 20%의 용액 안에 전체 커피 성분의 약 80%가 녹아 있다고 한다.(p.180)

용해도가 50이라고 가정할 때 100의 성분을 녹여낼 때, 처음에는 50이 녹아 나온다. 남은 50에서 다시 25가 녹아 나온다. 25에서 다시 12.5가 녹아 나오는 식이다. 그러니, 오래 추출한다고 더 진해지지 않으며, 커피를 두 번 추출하지 않는 이유다. 더 이상 뽑아 나올 커피 성분이 없는데, 아깝다고 두 번 뽑는 건, 커피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 아니다.

“커피 추출이 뒤로 갈수록 커피를 이루는 나무 부분에서부터 추출이 진행되는데, 이것이 커피의 잡맛이나 나무 맛 등을 느끼게 한다. 쓴맛과 바디감을 이루기도 하는데, 너무 오래하면 좋지 않다. 초기의 추출에선 향미가 결정되고, 후기 추출에서 맛이 어우러져야 향과 맛, 바디가 좋은 커피를 얻을 수 있다.”

초기 추출에서 커피 성분이 거의 녹아 나온다. 잡맛이 없는 대신 입안에 남는 게 없다. 그야말로 순수한 순정의 맛인데, 그것이 커피의 좋은 맛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세상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의 혼합이듯, 커피 맛도 좋은 성분만으로 자기 완결성을 갖출 순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맛에 반응하는지, 어떻게 기준을 잡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무엇을 바꾸면 커피 맛이 바뀔 것인가를 고민하자. 그것은 곧, 자신의 감각을 여는 일이고, 세상을 대하는 애티튜드다. 초기 추출과 후기 추출에서 추출의 요소 등을 조절하면서 좀 더 자신에게 좋은 맛의 커피를 잡는 과정, 그것이 커피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다.

“원한다면 커피 맛은 언제든 바꿀 수 있다. 물 붓는 타이밍, 양이 일정하다면 커피를 안정적으로 뽑을 수도 있다. 물줄기 스킬과 속도에 스트레스 받지 마라. 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맛을 찾는 것이다.”

커피의 맛에는 정해진 정답이 없다. 또 자신의 취향이나 개성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 이상적인 기준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커피 맛은 로스팅 정도, 커피 입자의 굵기, 물의 온도, 추출 시간 등 여러 가지를 조절함으로써 달라진다.(p.21)

커피하면, ‘쓴맛’만 떠올리는 사람들을 위한 마지의 이야기도 들어보자.

“우리나라는 ‘진하게’라고 하면 ‘쓰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스타벅스 등의 커피가 매우 진하다며 쓴맛에 대해 용서를 받았다. 쓴맛을 늘리는 건 쉽다. 정해진 양 이상의 추출을 하면 쓴맛과 잡미가 강해진다. 그러나 진하다는 건, 농도를 놓고 이야기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조절함으로써 커피 맛이 달라지는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물론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맛’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여긴다면, 무척 흥미롭고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다.(p.21)

커피 한 잔, 가을 한 모금

커피는 가능성이다. 세상의 모든 입맛만큼 다양한 커피를 뽑을 수 있다. 생의 감각을 여는 만큼 커피는 다양한 자태로 나타난다. 조금 안다고 내세울 것도 없고, 커피를 잘 모른다고 발을 뺄 필요도 없다. 마지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는 남이 내려주는 커피라는 우스개도 했다. 맞다. 그런 한편으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마음을 담아 내린 커피가 가장 맛있다고 덧붙인다. 커피는 그렇게 다르지만, 같다.

다만 이날 아쉬운 점이 있었다. 마지는 이날 커피에 대한 알찬 정보와 지혜를 건넸는데, 그는 ‘다르다’는 의미를 ‘틀리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오류를 범했다. 잘못된 언어습관 때문에 커피의 다양하고 ‘다른’ 맛이 ‘틀린’ 맛으로 오인될까봐, 안타까웠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강의를 하고 이야기를 건네는데, 이런 점은 고쳐졌으면 좋겠다.     


 

10월. 갑자기 어디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인지 궁금한 계절, 커피 한 잔이 당신의 가을을 잘 감싸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늦지 않으면 좋겠다. 잡스와 커피 한 잔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잔달리의 회한처럼. 『미국의 송어낚시』의 저자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말하지 않았던가. “때때로 인생은 단지 커피 한 잔의 문제, 혹은 커피 한 잔이 가능케 해주는 친밀감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지상에서 35m, 85호 타워크레인에서 지상보다 더 서늘한 바람을 맞이하고 있는, 지상의 슬픔을 위해 280여 일째 싸우고 있는 김진숙 위원에게 커피 한 잔 건네고 싶다. 2011년의 가을, 대한민국은 커피로 지상의 슬픔을 달래려나보다. 커피 관련 축제의 연속이다.

우선, 14일부터 16일까지 대구에선 대구커피문화박람회가 열렸다. 이어, 21일부터 31일까지는 강릉에서 제3회 강릉커피축제가 강릉을 채우고, 27일부터는 서울 정동거리에서 대한민국커피축제가 30일까지 커피 향 가득한 거리를 만든다.  가을이 겨울 앞에서 흔들리는 11월의 24일부터는 올해 10회째를 맞는 ‘서울 카페쇼’가 나흘 동안 마지막 주자로 나선다.  

커피가 익는 계절, 당신의 삶도 익어가길. 참, 어느 밤 외롭거든, 문을 두드리시라. 당신을 위해, 밤9시면 1000원으로 내려가는 커피 한 잔, 건네겠다. 밤9시의 커피다. 커피 한 잔, 가을 한 모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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