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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프로이트는 자신의 바람대로 됐다. 아니, ‘바람이라는 표현보다 더 강력한 무엇이었다. 철저한 기획의 승리라고 볼 수도 있겠다. 코페르니쿠스, 다윈과 같이 이름만 대면 세상 누구나 알 수 있는 명성가. 그는 전리품을 챙긴 정복자가 됐다. 프로이트라는 이름이 주는 힘은 그만큼 강력하니까. 의학계나 학계뿐 아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인간을 설명하는 거대한 테제가 됐다. 프로이트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와 권능은 그의 업적 이상으로 여전히 힘을 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권능을 가능하게 했을까? 책을 보고 좀 놀랐다. 책이 꼼꼼한 사실에 기인해서 쓰여졌다면, 프로이트가 행한 엄청나고 방대한 조작(!) 때문에. 그것은 거의 신적 왕권을 획득하기 위한 처절하고 치밀한 몸부림이었다. 더구나 세상을 상대로 그것이 먹혔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놀랐다. 세상의 위대한 것들이 반드시 고귀한 품성이나 인격을 토대로 구축되는 것이 아님을 새삼 확인했다. 그러니까, 나도 프로이트의 이 말을 그대로 인용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 이것만큼은 당신이 옳았어!

 

위대한 발견이 꼭 고귀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콜롬버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냥 모험가였을 뿐이에요.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지만 결코 그를 훌륭한 위인으로 볼 수는 없지요. 한마디로 발견자가 위대한 사람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중요한 발견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p.97)

 

우상의 추락은 나처럼 프로이트에 대해 표피적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접근을 하게끔 만든다. 정신분석학과 인류사에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이에 대한 그야말로 반전. 이 양반, 반전 있는 사람이었어! 프로이트는 그야말로 공작의 대가, 평생 2에서 벗어나지 못한 허세 킹’? 물론 설핏 듣고 칼럼 등을 통해 읽은 적이 있었다. 프로이트의 업적이 과장됐으며, 지나치게 성()에 근거한 치료방식에서 틀린 것이 많다고. 그의 업적 가운데 지금 적용할 수 있는 치료법이 많지 않다고.

 

오늘날 현대인들은 프로이트의 치료 성공 사례가 서류상에서만 성공적이었지 실제로는 환자들의 상태를 호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p.524)

 

책은 그것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확인시켜준다. 흥미롭다. 위대한 업적 뒤에 부각되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우리는 대개 위인들의 큰 업적에 압도된다. 덕분에 사소하고 작은 이야기를 놓친다. 이미 권위와 권능에 이미 잠식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삶의 흥미로운 지점은 디테일에 있음에도 말이다. 많은 우리는 프로이트를 잘 모르지만, 안다고 생각한다. 고전을 읽지 않았으면서 읽었거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서 더 소홀하게 되는 지점도 있다. 프로이트는 그런 심리를 꿰뚫고 그렇게 자신의 업적을 부풀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저자인 미셸 옹프레의 이 비판적 평전의 시도는 높이 살만하다.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를 만나면서부터 비로소 내 진정한 친구를 찾았노라고 확신했었던 그가 친구의 구린내를 캐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 친구를 더 알고 싶은 생각에 프로이트의 저작물과 접근 가능한 서간을 꼼꼼하게 살피다가 잘못된 것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배신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감정적인 혐오나 비꼼을 눌러 담은 흔적도 엿볼 수 있다.

 

정신분석학이 유효한 학문으로 남기까지 플라시보 효과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p.329)

프로이트는 과학 용어를 빌려 인간의 심리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왠지 그의 방법론에는 문학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다.”(p.333)

프로이트가 만든 세계에 우연은 없다. 다만 순수하고 신비로운 필연성이 존재할 따름이다.”(p.433)

 

그런 한편, 책은 동어반복이 종종 눈에 띤다. 비슷한 내용을 돌려서 말하기도 하고, 중언부언한다. 했던 비판 반복하고,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보이는 지점도 있다. 사실보다는 미셸 옹프레의 해석이 도드라지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책 부피만 괜히 커졌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뭣보다 번역 때문인지, 원문이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종종 걸리는 부분이 있다. 저자, 번역자와 편집자의 조율이 좀 더 필요해 보인다.


어쨌든 프로이트의 속살을 엿보면서 권능의 불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공명심. 아마 프로이트를 살게 한 가장 큰 동력이었던 것 같다.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싶다. 유리한 배경을 갖고 싶다. 돈 역시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이 결코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유명세나 돈의 축적의 폐해를 생각하지 않은, 즉 성찰하지 않는 것이다. 명성을 가질수록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돌아봄이건만, 프로이트는 화려함에만 몰두했다. 명성과 돈에 집착했다. 원하는 말만 듣고,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공적이 아닌 사적으로만 취득한 사람으로 보인다.

 

프로이트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생활고에 시달리며 바쁘게 살기 때문에 신경쇠약과 같은 병에 걸릴 시간마저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발언은 충분히 그의 속물적 시선을 반영한다. 속물적이면 어떠냐고? 맞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토록 갈망하는 권위와 권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책임은 불가피함을 그는 몰랐을까. 몰랐더라도 그것은 죄다. 무지해서 나쁜 사람이다. 자기 위치에 대한 정치적 자각이 없었다는 증명이다. “가난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싸우고 있는 지금-여기의 대통령처럼 말이다. 그가 했다는 동성애나 여성 차별적 발언 또한 남성우월적 시선이 창궐하고 있던 시대의 탓으로만 돌릴 문제는 아니다

 

물론 그런 자각은 쉽지 않다. 자신만의 지식과 이론으로 기득권과 권위, 명예 모두를 가지고 싶은 사람일수록 더욱 어렵겠지. 더불어 세상과의 갈등을 피하면서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에 대해선 종북’(프로이트는 어떻게 불렀을까?)으로 몰아붙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프로이트가 앎을 추구한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저자는 그를 철학자라고도 일컬었지만, 동의하진 않는다. 한편으로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궁금하다. 프로이트가 자각하고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업적은 가능했을까? 미셸 옹프레도 그것은 쉽게 말 못할 것 같다.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이유다. 


누군가에겐 지금의 대통령이 우상일 수도 있겠다. 반신반인의 자손이니까. 특정 셀러브리티나 아이돌을 우상으로 여길 수도 있다. 이 책이 아주 잘 쓰인 평전은 아니다. 그럼에도 내게 주는 시사점이 있다면, 우상을 통해 투영해야 하는 현실의 자각이다. 그것이 비판을 통한 추락이든 외연의 확장이든, 우상을 향한 팬심이 뻗어나가야 할 지점을 사유하게 만든다. 감정적 혐오자이든 빠돌이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우상이 아니다. 정희진의 말(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을 빌어 살짝 바꾸자. 


나의 우상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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