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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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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내가 무서운 영화를 엄청 잘 본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귀신이나 악귀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존재한다한들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가지는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도 나에게 공포의 대상은 '조폭'이나 '살인마'와 같은 사람이었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뱀파이어'와 같은 악령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참 지나서야 내가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악령 이야기에 두려움이 없다고 믿는 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하기. 그것이 악령을 대하는 진짜 나의 모습이었다. 무서운 장면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아버리는 나, 무언가 찔리고 찢어지고 피가 튀는 순간에는 잠깐 정신줄을 놓는 나. 그러고나서는 당당하게 무서운 영화를 볼 수 있었다며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해버리던 것이 공포를 대하는 나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이 책을 받아든 순간에도 나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라며 유쾌하게 맞이했다. 그리고는 한 주 넘게 책상 위에 책을 방치해 두고 있었다. 실제로는 뭔가 책을 열면 당장 뱀파이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두려움이 든 것이겠지만, 겉으로는 사람들이 삶의 지루함을 저런 식의 이야기꺼리를 만들어서 위로삼는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태연한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서평을 써야했기에 결국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내려가면서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내가 정말 악령을 두려워하는 겁쟁이였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모습을 묘사한 텍스트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 현장을 머릿속에 상상하고 구현할 수 있는 감정 이입 능력까지 나는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나는 무서운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무서운 걸 무섭다고 인정하는 사람과 나처럼 무서운 걸 무섭지 않은 것처럼 연기하는 사람. 이 두 부류의 사람이 보이는 행동은 언뜻 차이가 있지만, 둘 다 무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죽음의 공포'에서 달아나는 태도가 달라보이는 것이지 근원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같다는 이야기다. 사람이면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는 본질적인 공포가 어떻게 '뱀파이어'라는 대상을 만들어냈고, 끊임없이 그것을 소비하며 그 두려움을 이겨냈는지 이 책은 성심성의껏 펼쳐보여 주었다. 뜬구름잡기 식의 생각 전개가 아니라 그동안 '뱀파이어'를 다루었던 텍스트와 영상 콘텐츠의 풀이 방식과 진화의 모습들을 세세하게 설명하면서 '뱀파이어'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나같은 사람에게 친절하게 다가와 주었다.


책 속에는 잘 몰랐던 '뱀파이어'에 대한 상식들이 가득차 있어 흥미를 돋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 1565년의 브레슬라우 연대기에서 볼 수 있듯이, 미신에 따르면 기형아는 흔히 악마와 정을 통한 표시로 간주되었다.

- 시체의 손목에 감아두는 묵주에는 이중적인 기능이 있었는데 사자가 기도할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사자가 무덤에서 나와 화를 초래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사슬이기도 했다.

- 루마니아에서는, 뱀파이어가 될 만한 소지가 있는 망자들은 아예 불에 달군 쇠로 심장을 꿰뚫은 다음 매장하는 관습이 오랫동안 행해졌다.


여기에 다 소개하기보다는 직접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알았던 사실들은 더 확실하게 알고, 몰랐던 부분들은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경험을 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뱀파이어의 문화사'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이렇듯 뱀파이어의 모든 부분에 대해 훑으려고 하는 데 그 매력이 있다. 반면, 다소 뱀파이어 이야기만 하다보니 어떤 특정한 목적 의식이 있어야 흐름이 끊기지 않고 읽어갈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를테면, 새로운 뱀파이어 영화 시나리오를 써 보겠다거는 하는...^^) 앞에서도 밝혔듯 평소에 무서운 영화를 '하나도 안 무서워. 시시해!'라고 핑계대며 즐겨보지 않아서인지 책 속에 이야기들이 내게 많이 낯설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 작품들을 즐겨 읽었던 내게도 <비이>와 같은 작품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다만, 이것은 '뱀파이어'에 친숙하지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근거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평소 꾸준히 '뱀파이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온 사람이라면 '디스크 조각 모음'을 하듯이 뱀파이어 이야기의 비어 있는 부분들을 차곡차곡 채워 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모르는 부분은 가볍게 읽고 넘기면서 조금 익숙한 부분은 조곤조곤 따져 읽으면서 막바지로 오자 반가운 이야기가 나를 반겼다. 바로 영화 <렛미인>과 <박쥐>에 대한 설명이다. 신기하게도 나는 두 영화의 무섭고 섬뜩한 장면은 회피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똑똑히 지켜 봤었다. 책 속 텍스트에 소개되어 있는 부분을 읽고나니 내 반응이 논리적으로 납득되었다. 두 영화에 나온 '뱀파이어'는 단순히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뱀파이어였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 주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다른 영화 속 뱀파이어가 내가 맞서야 할 '적'이라면, 두 영화 속 '뱀파이어'는 나의 감정을 대입할 '주체'인 셈이었다. 피할 수 없는 '뱀파이어'의 운명을 타고난 그들이 곧 나라면? 이런 물음들을 끊임없이 하게 되는 사이 공포는 이미 뒷전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올곧이 받아들이며 고난에 대처해야 하는 뱀파이어의 고뇌를 느껴보게끔 함으로써 뱀파이어 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마련한 두 영화였다고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 속에 백화점식으로 진열된 그 모든 '뱀파이어'는 단연코 죽음을 두려하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매력적인 이미지다. 각양각색의 이미지 파편들은 공포를 느끼고 그 공포에서 도망치려는 또는 이겨내려는 무수한 사람들의 각기 다른 스팟을 공략함으로써 '뱀파이어' 이야기의 역사를 끊임없이 새로 쓰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섹시한 핏빛 유혹'이 함께한다. 누가 그랬던가. 섹스 역시 죽음에 닿아있다고. 덧붙여 롤러코스터와 같은 놀이기구를 타는 것 역시 죽음의 공포를 간접체험 하는 것이 아니던가. 섹스처럼 섹시하고, 롤러코스터처럼 소름끼치는 죽음의 간접 체험 대상, 그것으로서의 '뱀파이어'. 아마도 답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인간이 삶에 대해 치열한 욕망을 갖는 것 만큼이나 죽음에 대한 간접 체험의 욕망도 날이 갈수록 진화한다고. '뱀파이어'는 그런 간접 체험의 가장 세련된 방식 중에 하나이며, 이것 역시 날로 다듬어지고 있다고.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당신이 삶과 죽음에 대해 가져왔던 이미지를 더욱 또렷하게 만들어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얼마나 죽음 앞에서 겁쟁이인지. 그래서 뱀파이어의 핏빛 유혹에 빠지며 잠시라도 죽음의 공포를 잊으려 한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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