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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1. 춤춰라, 지금 그 자리에서


책을 덮고 난 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읽어라'다. 덧붙여, '읽어라'라는 단어와 겹쳐진 말이 '춤춰라'였다. 예전부터 전체적인 상황을 살피는 'context'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 왔지만, 'text' 자체가 문서가 아니어도 좋다는 생각을 유심히 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읽고, 쓰고, 고쳐 읽고, 고쳐 쓰는 것'이 글이나 말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그런 생각을 해 나가는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203P

독서란 춤이고, 사람은 법과 춤춥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몸에 두르고 있는 모든 것, 호흡법이나 발성법, 옷이나 장식품이나 소리나 리듬이나 노래, 춤의 안무는 그 자체가 법전이고 성전이며 신화이고 시인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말로 하면, 바로 읽고, 고쳐 읽고, 쓰고 고쳐 쓰는, '문학' 행위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춤'은 그대로 그들에게 법적, 규범적, 철학적, 문학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그들은 사고하고, 그들은 읽고, 그들은 쓰고 있습니다 - 깊게, 깊게, 춤을 추면서.


유심히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저자인 '사사키 아타루'는 '읽는 법'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조언하고 있다. 나는 어느샌가 그 조언에 (좋은 의미에서) 쇠뇌당해 한 문장 한 문장 곱씹고 있던 중이었다. 그가 책 속에서 말한 혁명 중에서도 중세 해석자 혁명은 오직 '글'에만 집중되었는데, 그 때문에 우리는 진정으로 읽는 법을 잃어버렸다고 쓰고 있다. 그것을 제대로 읽기 위해, 203P의 윗 구절을 몸과 마음으로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새 깨닫게 되었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단지 정치의 도구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치이자 삶이 될 수 있고, 영혼의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아도 최근 몇 년간 대중매체를 통해 음악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고, 또 토크쇼에서는 정치인들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예능의 정치화' 또는 '정치의 예능화'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읽고 보면, 사실 예능이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놀이야말로 정치 그 자체라는 것을 불현듯 받아들이게 됐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더 깊이있는 생각은 책을 여러번 다시 읽은 후에 더 고민해 보기로 해야겠다. 저자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라고.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사람은 한번 말고 여러번 되풀이해서 읽은 뒤, 그 깨달음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었으면 한다.



2. 문학의 위기는 문학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만들어 낸 것


나 역시 문학을 전공했다. 문학을 읽고 싶어서, 문학책을 가슴에 안고 다니며, 그 내용과 향기를 온 몸으로 흡수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인문학의 위기다, 뭐다 해도 개념치 않았다. 하지만 개념치 않는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러한 생각을 더 넘어서 이것을 '문제'라고 여기는 것 자체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진다. 


105P

왜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고 문학부를 대학에서 추방하려고 할까요? 왜 문학자 스스로가 문학을 이렇게까지 업신여길까요?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겁을 먹고 있는 겁니다.


무릎을 쳤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의견에 동감했다. 인문학의 위기는 너무나 오랫동안 이야기되어 왔던 참이라 식상할 수 있는데, '인문학'에 '위기'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인문학의 힘'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바라는 것일수 있겠다 싶었다.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인문학의 위기'라고 부르는 것이 불분명한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문학'이 가리키는 대상은 '글로 된 말로 된 그래서 자료로서 남겨진 text'인가? 그것이 위기인가?


앞에서 썼듯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text가 될 수 있다면, 존재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은 text다. 결국 살아 움직이는 모든 현상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text이자 인문학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인문학에 '위기'를 말한다는 것은 웃음이 나오는 일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지금도 우리 세상은 인문학의 힘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니까.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그렇게 크고 작은 혁명이 일어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인문학'이 만들어내는 예술이다.



3. '혁명'하고 쓰고, 읽고, 외칠 때 피를 떠올리지 말아라.


우리는 보이는 대로 읽는 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읽을 때, 보이지 않던 진실을 알 수 있고, 읽지 못했던 진리를 찾을 수 있다. '혁명' 역시 그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가 보통 떠올리는 혁명의 이미지는 붉다. 피의 이미지다. 하지만, 저자는 '혁명'이 꼭 피로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진데, 역사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지 못하면 그렇게만 생각하고, 그 사고에 갇혀 버린다고 알려준다.


우리가 이 책을 집어들고 이 책을 끝끝내 읽고 덮었다면, 새롭게 열리는 것은 '혁명'을 사고하는 것의 뒤집는 방식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혁명'은 일상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움직임으로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살아가는 방식을 되새김질 하는 것도 혁명인 것이다.


210P

 우리는 '문학'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시를 읽었습니다. 춤을, 연극을, 노래를, 음악을, 회화를, 복실을 - 한마디로 말하면 예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법이나 규범, 정치와는 관계없는 장소에 몰려 질식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오락', '장식물', '사치품'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법이나 규범, 정치도 질식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실, 상실이라며 우리가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결정적으로 손에서 놓아버린 적이 있을까요. 그것 없이 살 수 있었던 예가 있을까요?


저자는 우리가 '혁명'에 눈 뜨길 바란다. 책 내내 이어지는 '종교 이야기'가 지루할 법도 하지만(나처럼 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특히), 저자가 '종교'를 말하려기 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읽어야' 하는 이유를 조근조근 이어가고 있어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설득당한다. 나도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제대로 읽는 것을 시작해야지, 하고.


이 책에서 나는 힌트를 많이 얻었다. 요즘 유행하는 '정의'에 대해서도 73P를 읽으며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고, 훈련에 의한 인간 통치에 대한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도 220P에서 사고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책의 첫 장부터 읽기 시작하려 한다. 이 리뷰를 읽는 이들에게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읽는 것은 스스로 그것에 몸과 마음을 던지고 성실하고 우둔하게 싸워가는 것이니까. 그냥 읽어보기를.


멋진 책이다. 하지만 직접 읽을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읽기가 될 수 있을 때, 당신에게도 멋진 책이 될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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