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경(越境)의 시학과 미():

-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 <설국>(1848)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한 남자(시마무라)와 한 여자(고마코)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연애소설이다. 세 번에 걸친 만남은 모두 그가 도쿄를 떠나 눈의 고장’(‘설국’)으로 오면서 이루어진다. 첫 만남은 회상처럼 짧게 삽입되고 나머지 두 만남에서는 무용 선생의 아들(유키오)을 사이에 두고 고마코와 미묘한 연적이 된 처녀(요코)가 등장하면서 두 겹의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소설은 영화가 상영되는 고치 공장의 화재와 요코의 자살로 끝난다. 장기간에 걸쳐 발표한 여러 단편을 용해해 만들었다는 창작 과정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설국>은 파편적인 장면들의 모자이크처럼 읽힌다. 무엇보다도 한량이나 다름없는 유부남과 게이샤의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사랑을 인간 존재의 한시성에 대한 인식을 담은 소설로 승화한 작가의 솜씨와 날카롭고도 섬세한 문체가 돋보인다. 가령, 대개 눈[]과 함께 어우러져 포착되는 고마코에 관한 묘사를 보자. “거울 속 새하얗게 반짝이는 것은 눈[]이다. 그 눈 속에 여자의 새빨간 뺨이 떠올라 있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청결한 아름다움이었다.”(44) “거울 속에는 차가운 꽃잎 같은 함박눈이 한층 크게 나타나, 옷깃을 들추고 목덜미를 닦는 고마코 주위에서 하얀 선으로 감돌았다.”(129) 은하수가 흐르는 가운데 게다를 신고 꽁꽁 언 눈[] 위를 달리는 고마코의 모습도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관능적이고 농염한 고마코, 청순하고 순결한 요코 등 남성의 눈으로 포착된 두 여성은 그 자체로 미()의 육화이다. ‘게이샤라는 단어를 세계어 사전에 등록한 일본 문화의 특수성과 탐미주의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제로 고마코는 단순히 미적 대상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동기(童伎)로 도쿄에 팔려 갔고 자신을 기방에서 빼준 남자와 결혼했으나 그는 16개월 만에 사망한다. 시마무라가 도쿄로 떠난 다음에는 자기가 도쿄로 팔려 갈 때 배웅해준 유일한 사람인, 장결핵으로 죽어가는 유키오를 위해 게이샤로 나섰다. 사연이 많은 만큼이나 여백이 많은 탓인지 그녀의 사랑과 교태에는 어딘가 기법 같은, 즉 미학적인 구석이 있다. 덧붙여 그녀에게는 일기를 쓰는 흥미로운 습관이 있다. 유키오 얘기는 가장 오래된 일기 첫머리에 적혀 있고 시마무라와의 첫 만남도 날짜와 함께 기록돼 있는데, 이런 공책이 열권이나 된다. 자기가 읽은 소설의 제목과 저자, 등장인물과 그들의 관계도 간단히 적어둔다. 이를 두고 시마무라는 헛수고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헛수고를 반복하는 눈[]의 게이샤를 찾아오는(혹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 남자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고마코의 헛수고는 계속될 것이다.

 

소설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가 허무이다. 대체로 <설국>의 허무주의와 탐미주의는 어려서 부모, 누나, 조부모를 연이어 잃은 작가의 개인사, 나아가 20세기 전반(前半) 일본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소설의 처음으로 가자.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7) 󰡔설국󰡕은 연애소설이자 미에 관한 소설임과 동시에 월경(越境)에 관한 소설이다. ‘눈의 고장이 아름다운 것은 아주 드물게 언급되는(“나방이 알을 스는 계절이니까 양복을 옷걸이나 벽에 건 채로 두지 말라고, 도쿄의 집을 나설 때 아내가 말했다.”(77)) 생활의 공간(도쿄)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상되는 우리의 소설이 있다.

 

 

 

 

 

 

 

 

 

 

 

 

 

 

 

 

 

 

김승옥이 스물세 살 때 쓴 무진기행빽이 좋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 가 제약회사의 전무로의 승진을 앞두고 잠시 고향, 즉 안개의 고장인 무진’(霧津)에 와서 겪는 얘기를 담은 소설이다. 너무 날 것이어서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사건들, 절대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거친 야생의 문장, 속되고도 어딘가 날이 선 관계(후배 박, 동기 조, 음악 선생 하인숙, 서울의 아내 과 장인, 옛 애인 ’) 등 비슷한 연배의 작가 이청준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소설 문법이 여전히 충격적이다. 과거의 처럼 서울을 꿈꾸는(“서울로 가고 싶어죽겠어요.”) 음악 선생 하인숙과 동침한 다음날, 빨리 상경하라는 내용이 담긴 아내의 전보를 앞에 두고 가 내놓는 타협안 역시 모방을 불허하는 명문장이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무진기행) 끝으로, 하인숙에게 쓴 사과의 편지를 그냥 찢어버리고 무진을 떠나는 가 느끼는 심한 부끄러움”, 이 수치의 감각은 무엇인가.

 

순천에서 서울로 월경한 어느 불문학도가 단편 하나(생명연습)를 들고 문학사의 한복판으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그가 이룩한 감수성의 혁명’(유종호)의 동력은 아무래도 각종 속(), 속됨과 속물스러움에 대한 혐오, 궁극적으론 자기혐오였던 것 같다. 아무튼 풋풋한 미남 청년은 반쯤 타들어간 담배, 그리고 천재 작가라는 지당한 수식어와 함께 흑백 사진 속에 붙박인 박제가 되었고, 펜을 놓고 속절없이 허물어져가는 중년, 심지어 말을 놓고 슬어져가는 노년만 남았다. 미가 미인 것은 역시나 그것이 시간 앞에서 무력하기 때문, 찰나적이기 때문인가. 이 비극 앞에서 문학만이 우리의 위안이다. 마흔을 목전에 두고 다시 읽는 무진기행이 고맙다.

 

-- <책앤> 6월호 게재 예정.

 

-- 간만에 여유를 부려본다. 혹은, <무진기행>을 다시 읽은 충격을 아직 다 소화하지 못했다고 해야겠다. 비도 주룩주룩 내리고 감기도 일주일, 이주일 째 지속되고, 다 겸사겸사, 이다.    

-- <설국>에 대해 쓰기로 했지만(지면상 그래야 했지만) 쓰다 보니 <무진기행> 얘기가 더 많아졌고, 마음으론 앞의 것 다 지우고 뒷 얘기만 더 쓰고 싶어졌다. (잘 쓴 줄 알겠으나, 일본식 탐미주의는 역시 체질이 아니더라는...-_-;;)  

-- 전집을 갖다 놓고(혹은 그렇게 모아가면서) 읽은 여러 작가 중 하나가 김승옥. 뒤로 갈수록(길어질 수록) 힘이 빠지는 그의 소설에 절망했던 기억. 아니, 그보다는 그의 초기작을 읽고 감탄하면서 그 때문에 또한 절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물론 그때 나의 절망이 뭐, 얼마나 컸겠나, 그때는 나 역시 작가의 나이였으니, 시건방에 쩔었을 거다, 분명히. 지금 읽으니, 정녕 절망이더라. 천재란 역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인가 보다.

 

 

(무진이라고 하면 그것에의 연상은 아무래도 어둡던 나의 청년(靑年)이었다.”)

 

 

내 머릿속에 항상 김승옥과 함께 떠오르는 작가는 이청준. 뭐, 이유는 둘의 소설 세계와 문학 인생이 어떤 평행선을 그린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 (천재형 vs. 장인형, 뭐 등등.) 덧붙여, 역시 오래 전 일인데, <당신들의 천국>의 작가의 빈소를 나오는 길에, 그 빈소를 찾아가는 <무진기행>의 작가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 역시 모종의 평행선.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운은 무척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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