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문재인은 백만 한 번째로 촛불시위 구호에 동참한다고 대국민 기자회견까지 자청했다. 그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이런 발언을 했다.

 

분명하고 단호한 입장표명을 요구하는 일부의 비판까지 감수했습니다. 이는 오로지 국정혼란을 최소화하려는 충정 때문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퇴로를 열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러한 저와 우리 당의 충정을 끝내 외면했습니다. (…)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대통령이 조건 없는 퇴진을 선언할 때까지, 저는 국민과 함께 전국적인 퇴진운동에 나서겠습니다. 모든 야당과 시민사회, 지역까지 함께 하는 비상기구를 통해 머리를 맞대고 퇴진운동의 전 국민적 확산을 논의하고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뉴스1>, 2016년 11월 15일.

 

누구의 눈에도 번쩍 띄는 한 대목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퇴로를 열어주고 싶었습니다"는 문구다. 문재인이 생각하는 박근혜의 '퇴로'는 어떤 것일까? 그냥 곱게 물러나는 것? 그런 거라면 백만 촛불시위대가 이미 목이 터져라 외쳤던 것 아닌가? 그런 거라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백만 촛불시위대가 이미 퇴로를 열어준 것 아닌가? 문재인이 생각했던 다른 '퇴로'가 없다면 이 표현은 자신이 '촛불 기회주의자'라는 것 이상의 아무 의미도 없다.

 

문재인이 기자회견을 한 11월 15일 그 시각 직전까지, 그에게는 '사과→거국중립내각' 이상의 의견이 없었다. 그러다 청와대와의 내통을 의심케 하는 추미애의 '양자회담' 행보가 격렬한 지탄을 받고, 문재인은 화들짝 놀란 사람처럼 곧바로 '비상기구를 통한 전국적인 퇴진운동'을 선언한 것이다. 말하자면 기자회견 직전까지 그가 박근혜에게 열어주고자 했던 '퇴로'는 '거국중립내각'으로 읽힐 뿐이다.

 

그런데 문재인의 '촛불 기회주의'는 더 큰 문제가 있다. 문재인은 하야까지도 스스로 결단하지 못해서 탄핵의 절차까지 밟게 만든다면 그야말로 나쁜 대통령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아무리 하야를 요구해도 대통령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강제적으로 하야시킬 방법은 없기에 탄핵은 마지막 법적인 수단으로 남는다. 탄핵은 그런 단계에 가서 논의해야 될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이 주장이 무슨 의미인지 문재인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 역사상, (다른 나라의 민주화 역사로 범위를 넓혀도 마찬가지다) 반민주적 권력이 평화적 시위를 통해 곱게 물러난 적은 없다. 1987년의 6·10? 그 항쟁의 격렬함 속에서도 전두환은 건재했다. 국민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을 뿐이다. 1980년의 5·18? 광주시민들은 학살을 당한 후 목숨을 바쳐 끝까지 항쟁했지만 호남만 오히려 고립됐다.

 

단군 이래, 우리들 백성이 민의(봉기)를 결집해 권력을 타도한 건 딱 한 번뿐이다. 1960년 4·19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4·19는 115∼180여명의 사망자와 277∼60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서야 이뤄낸 혁명적 사건이다.

 

만약 문재인이 평화적인 촛불만으로 박근혜를 끌어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 역사상 단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을 가능하다고 보는 셈이다. 뭐, 좋다. 그런 꿈을 꿀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박근혜가 아름다운 촛불의 바다를 보고 '아, 내가 잘못했네∼' 하면서 '영세교'적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곱게 물러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더불어민주당 대표 추미애도 같은 생각인지 모른다. 그녀가 괜히 '계엄령' 운운했겠는가?

 

그러므로 문재인의 주장이 그나마 의미가 있으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저항권을 행사하자'는 주장으로 해석해야 한다. 만약 그의 주장이 '저항권'이 아니라면 이미 충분히 결집되고 표현된 국민적 의사를 다시 집회결사의 자유를 수단으로 계속 끝없이 소모적으로 확인해가자는 의미밖에 없다. 설마 이것을 무슨 새로운 대안이라고 내세우진 않았을 것이다.

 

자, 이제 행간의 의미를 감안해 문재인의 주장을 저항권이라고 순리적으로 해석하면 무슨 말이 되는가? 그렇게 되면 그의 주장은 다소간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저항권을 먼저 행사하고, 안되면 헌법이 보장하는 평화적인 방법인 탄핵을 하자는 의미다. 이것이야말로 순서가 뒤바뀐 모험주의다. 즉 '촛불 기회주의자의 모험주의적 발상'이다!

 

어떤 경우에도 저항권은 최초의 수단이 아니라 최후의 수단이다. 그것이 거쳐야 할 과정이 다소간 폭력적이고, 가져올 결과가 준혁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충분히 '나쁜 대통령'인 박근혜는 탄핵부터 시도해야 한다. 이 탄핵과정을 통해서 새누리당을 와해시켜야 한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의 정통성에 미련 있는 자들을 새누리당과 함께 고사시켜야 한다. 폭력적 저항권이 아닌 지금까지의 평화적 촛불만으로도 그들에게 그런 압력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데는 충분하다고 본다.

 

탄핵이 안 되면 어떡하냐고? 헌법개정권력으로 박근혜를 퇴진시키면 된다. 그것도 안 되면 어떡하냐고? 그땐 최후의 수단인 저항권을 행사하면 된다. 그것도 안 되면 어떡하냐고? 최후의 수단이 안 되면 다른 방법은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고, 이 나라에 크나큰 부담을 주는 저항권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은 다소간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는 최후의 수단인 저항권을 먼저 동원하고, 안 되면 평화적인 탄핵을 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 도착적 주장을 통해 그가 얻고자 하는 게 도대체 뭔가? 지금까지 더불어민주당 추미애와 문재인의 행보는 박근혜의 하야와 사후보장, 대선을 위한 친문내각과 새누리당의 건재를 이용한 대선승리 전략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케 한다. 단순한 촛불 기회주의자의 모험주의적 발상도 부족해 넌센스와 현상유지적 정략까지 보태진 셈이다.

 

나는 짧게는 29년, 길게는 55년만에 찾아온 이 혁명적 기회를 단순히 대통령 선거 몇 개월 빨리 치르는 것으로 허망하게 마무리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역사적 기회를 지난 수십 년 영남패권주의의 유산을 청산하고, 정계개편과 개헌을 통해 민주 국민의 의지를 제도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기회로 승화시키기를 바란다. 그리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저 현상유지적 대통령 권력만을 탐하는 촛불 기회주의 세력의 모험주의적 정략에 휘둘리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6.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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