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투쟁이든 투쟁의 논리는 조금 아이러니한 데가 있다. 궁극적으로 투쟁 대상자를 박멸시킬 것이 아니라면(역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도 종종 있었다), 그 투쟁 대상자와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아주 중요한 핵심 의제가 된다. 예컨대 페미니즘은 남성을, 반영패투쟁은 영남인을, 계급투쟁은 자본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헌법을 보자. 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4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로동자, 농민, 군인, 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인민에게 있다고 규정한다. 무슨 말인가? 북한의 근로인민이 주권을 가지고, 남북한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의미다.

 

, ‘북한이 남북한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논리야 우리도 그런 식의 논리로 싸워 왔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한 가지 의문이 있을 것이다. 왜 북한의 주권은 북한 전체 인민이 아닌 근로인민이 가지는 걸까? 예컨대 심신이 허약해 노동을 못 하는 병약자나 노인에겐 주권이 없단 말인가?

 

알랭 바디우는 <알랭 바디우, 공산주의 복원을 말하다>에서 간단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마르크스가 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했던 의미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어떤 개별적인 속성도 갖고 있지 않은, 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따라서 부정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북한 헌법은 20세기 공산주의 실험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태껏 (역사적인 의미로는 거의 절망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로 진보해가지 못했다는 고백이다. 이는 20세기 공산주의는 결국 뭔가 다시,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논리를 갖춰, 새로운 역사를 향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 대한민국의 많은 이들이 페미니즘의 극단적 변이 현상에 놀라고 있는 듯하다. 역사 경험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투쟁에나 이런 극단적 변종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 변종이 영구적으로 승리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이런 식의 극단적 변종의 속물적 언행을 이념적으로 어떻게 제압하느냐가 사실상 모든 운동의 성패를 좌우한다.

 

근원적으로 우리 사회가 이런 어그로 소동에 당황하는 건 우리나라 주류 페미니즘 철학의 빈곤함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모든 투쟁에서 철학의 빈곤함이 역사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철저히 숙고해야 한다.

 

모든 투쟁은 그 투쟁을 야기한 적대자를 박멸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 지역, 계급 등등, 모든 투쟁의 궁극적 목적은 각 범주의 불평등부정의를 로 만드는 데 있다. 물론 투쟁의 주체와 대상자, 혹은 투쟁 주체의 이념과 대상자의 반이념을 구분하는 것은 투쟁과정에서 필수 요건이다. 하지만 불평등부정의가 무가 된다면 투쟁을 위한 적대적 구분이 왜 영구적으로 필요하겠는가? 무가 돼야 한다는 건 결국 투쟁 주체와 대상자의 적대적 구분을 지양하고 보편성을 확립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투쟁도 투쟁의 주체가 무로 지양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지 못 하는 한 궁극적으로는 실패를 예정한 것이다. 앞으로도 더 나은 삶을 위해,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여러 범주의 투쟁 주체로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 모두는, 스스로, 언젠가, 반드시, ‘로 지양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런 희망 없는 모든 투쟁은 불온하다. 투쟁 대상자가 역사적으로 불온했던 그만큼, 아니 어쩌면 열악한 처지에 있는 자들의 피눈물을 오도오용하는 그만큼 더, 불온하다!

 

김욱, http://blog.aladin.co.kr/kimwook/, 2018.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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