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꽤나 단조로운 생활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나름 열심히 일하고 저녁 늦게서야 퇴근, 바로 운동을 한다. 집에 와서 씻고 30분 정도 책을 읽다가 슥 잠이 든다. 다시 아침이 찾아오고 일어나서 회사로 향한다. 밖에 나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집돌이고 취미도 많지 않으며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적기에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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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단조로움은 작년 여름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심해졌다. 탄수화물을 적게 먹으니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지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엄두를 못낸다. 그러니 여태까지 하던 행동만 계속 반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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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롭다고 해서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행동과 식사 루틴을 꾸준히 유지하면서 체중도 착실히 줄여가고 있고 책도 어찌됐든 읽어내고 있다 - 물론 작년 하반기부터 독후감은 완전히 멸망 수준 -. 지금까지 나름대로 잘해왔기 때문에 루틴을 비트는 일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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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 후배가 이번달 초에 내가 다니는 크로스핏 박스에 등록했으나 두 번 나가고는 깜깜 무소식이다. 매번 바쁘다, 친구와 술약속이 있다, 내일 오후 근무다, 라는 이야기로 출석도장을 못 찍고 있다. 물론 운동이 최우선순위는 아니지만, 당장 3월에 여자친구와 발리에 놀러가 멋진 몸을 보여준다는 - 적어도 군살은 걷어내 슬림바디를 자랑하겠다는 다짐은 어디로 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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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틴이 아무리 지겹고 남들이 미련하다고 수근수근대도 뚜렷한 목표가 있으면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건강과 다이어트라는 최대의 목표 때문에 심심하고 지루하고 외롭더라도 꾹 참고 버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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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루틴을 유지하는 게 굳은 내 의지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감싼 방어기제인지 헷갈린다. 새로운 일은 시작하거나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게 두렵고 무서워서 ‘나는 인생 최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내하며 한 가지에 집중하고 있어’라는 변명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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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아빠도, 친구들도, 살이 어느정도 빠졌으니 외형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라고 권한다. 그때마다 준비가 덜 됐다고 말한다. 관계에서 상처를 주고 받는 일보다, 혼자 루틴을 계에에에에속 반복해가며 혼자 외로워지는 게 낫다. 상처의 크기가 얼만큼일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슬픔을 곱씹는 건 나 혼자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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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그런데… 나보다 잘하면 질투하고 나보다 못하면 깔보는, 돌이켜보니 싸이코 같은 기질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취미가 아예 엇갈리면 만나는 데 무슨 낙이 있을까도 싶고… 변태 싸이코인 게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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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에 반복이 계속되니 한번 우울함에 빠지고나서 그 기운이 계속 되먹임돼 헤어날 수 없었다. 덕분에 책도 잘 못 읽었는데 나름 가벼운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에세이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으니 조금 상쾌해졌다. 하정우의 글도 얼마 남지 않아 다음 읽을 책을 골라보았다. 밝고 블링블링한 친구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내 감정을 대변하듯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딸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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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어디서 보고 읽은 내용이지만 책 그대로를 읽은 건 거의 처음인듯. 희극을 읽으려고 했으나 어쩌다보니 비극이 손에 잡혔다. 베르테르는, 연애는 커녕 여자와 눈도 잘 못 마주치는 나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책이었지만 근래에 느낀 감정이 있으니까 조금 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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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시인의 대표 시집인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를 두 달 넘게 읽으면서, 대중적이고 잘 팔리는 시집이어도 나는 이해를 못하는구나, 좌절감을 느꼈더랬다. 그래도 읽어야겠지. 이 시집의 마지막에 발문을 쓴 시인이 얼마 전 작고하신 허수경 시인이다. 무식해서 별세 소식을 듣기 전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시인이었지만 문득 슬퍼졌다. 슬픔 감정을 토대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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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는 매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열다섯 권이 나오는 동안 겨우 세 권 읽은 릿터 15호와, 그래도 꾸준히 읽는 뉴 필로소퍼 5호, 민음사에서 새로 펴낸 비평 무크지 크릿터도 2월까지 함께 한다. 감정의 여유가 되면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도 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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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다섯 권 중 네 권이 문학이다. 내 독서의 기초가 문학이기는 하지만 매년 초는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과학 등 마음이 더 동하는 분야가 많았는데. 책도 결국 루틴에 빠지게 된 건 아닐까. 이게 오늘 잡담의 마지막 줄인데 유독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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