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그를 뽑은 사람들
스코트 새비지 엮음, 김연수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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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이라는 이 책의 제목에서 이 책의 내용을 짐작하기란 무척 쉬운 일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정말로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이 꽤 오랫동안 책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 언제나 이 책이 가벼운 수필이나 콩트일 것이라고 짐작했었고, 이것이 유독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리라고 믿는 것은 결코 독박을 면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렇다면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가? TV와 컴퓨터의 전원을 뽑아버리고, 운전면허증을 반납하고, 발전된 기술을 마다하는, 바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이다. 이것은 기술문명의 이기로부터 동떨어진 삶을 사는 일부 지역의 불가피한 삶이 아니라, 오로지 자발적으로 인간과 그를 둘러싼 가정, 그리고 그들 공동체의 존엄과 역할에 대한 진지한 성찰 후에 이루어지는, 선택적인 삶을 말한다.

사실 오늘날의 세계적인 기술문명의 추세 속에서 한 발짝 비켜서기란 대단히 어려워 보이고, 그것은 곧, 많은 것을 잃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지 두렵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는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이 오히려 비정상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사례들, 즉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의 삶은 바로 그것이야말로 본래 올바른 삶이라는 것을 담담히 증명하고, 그런 삶이 주는 기쁨이 결코 적지 않은 것임을 보여준다.

물론 '플러그를 뽑는 일'은 나름의 결단을 필요로 하고, 그것은 분명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훨씬 더 오래전부터 인간이 '플러그' 없이 살아왔고, 그것이 인간의 존엄을 되찾는 하나의 방편임을 생각한다면, '플러그를 뽑는 삶'은 오로지 낯선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지속가능한 삶'이 인간의 권리나 선택이 아닌, 의무임을 자각한다면, '플러그를 뽑는 삶'은 더 이상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이 반드시 어려운 것만을 의미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는 제인 마틴이 그녀의 두 살 난 딸, 사라에게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을 묻자, 사라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빠!" 그리고 일곱 살짜리 줄리아는 똑같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사라!" '플러그'를 뽑는다는 것은 기술과 문명이 제공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의미보다는 그것들로부터 소외되고 마는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자는 의미가 강하고, 그것은 결국 인간의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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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기
김성칠 지음 / 창비 / 199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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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 학교 교과과정에서 '안네의 일기'에 대해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안네의 일기'가 대체로 어떤 과정을 통해 쓰여졌는지 말할 수 있고, 특히 그 중 한 부분은 읽어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학교교육의 일방적 결과이지만, 여기에 특별히 큰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비로소 <역사 앞에서>라는 책을 읽고서 김성칠이라는 한 사학자의 이름과 그가 남긴 일기의 존재를 알 수 있었고, 1950년 6.25전쟁을 전후하여 쓰여진 그의 일기를 통해 내가 관념적으로만 이해하던 6.25와 당시의 사정이 얼마나 참혹하고 서글픈 것이었는지, 조금이나마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6.25전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저 북한의 일방적 남침으로 비롯된 '민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닳고 닳은 표현을 겨우 다시 끄집어낼 수 있을 뿐이고, 여기에는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을 통해 드러나는 6.25전쟁의 실상은 내가 막연히 알고 있던 바와 사뭇 달랐다.

차라리 적과 동지의 구분이 명확하다면, 그리고 '나의 나라'와 '적의 나라'가 성립한다면 그것은 다행임에 분명하다. 6.25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친구는 친구가 아니게 되고, 형제는 더 이상 형제가 아니게 되고, 가족은 끝내 가족이기를 거부하고 만다. 파란색과 붉은색의 경계에서 극으로 치우치지 못하는 대다수 색들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의심을 받으며,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칠 뿐이다.

이러한 혼돈ㅡ일방적인 증오도, 애정도 없는 참혹하고 서글픈 전쟁 속에서, 과연 어떻게 피아를 구분하고, 어떻게 정의와 불의를 판별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 시대를 살지 못한 나로서는 그 전모를 대강 이해하는 것조차도 힘겨울 뿐이다. 그러나 최소한 공산당이 싫다고 울부짖었다던 한 어린 소년의 외침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 사이의 의뭉스런 관계를 맹목적으로 양립시켜오던 타성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내가 지금껏 이른바, '김성칠의 일기'를 모르고 지낸 것이, 오로지 내 무지로 인한 결과라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외국의 한 소녀가 쓴, '안네의 일기'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가장 참혹하고 서글픈 전쟁을 사료로서의 의지를 가지고, 매우 잘 서술한 이 일기를 뒤늦게 알게 되었음은 반드시 내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 일기가 1990년대 초에나 세상에 나온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이때 이미 '안네의 일기'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음을 생각하면, 유감스럽게도 역시 우리의 '과거'가 얼마나 정체되어 있었던 것인지 짐작할 만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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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kpink 2008-02-17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버에서 검색하다가 우연히 들르게 됐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하)권 중에 김성칠님의 '역사 앞에서'란 글이 실려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일부만 발췌해서 실리기는 했지만 나름 선생님께서도 수업시간에 강조하셨고 자습서에서도 관련 내용이 조금이나마 설명되어 있었답니다^^
제가 배우던 시절이 2003년이니까 요즘은 우리 역사의 중요성이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는 더 커지고 있지 않을까요?

Fenomeno 2008-02-1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실은, 이 글은 좀 더 예전에 썼던 거고, 최근에야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김성칠 선생님의 일기가 실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꿈의 도시 꾸리찌바 - 개정 증보판
박용남 지음 / 녹색평론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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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도시'라고 해서 미래지향적이고 기술지향적인 현대문명의 첨단을 상상한다면, 이 책은 오직 실망감만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꿈의 도시'라는 놀라운 찬사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빠라나주에 위치한 꾸리찌바는 대다수 개발도상국의 도시들이 지니는 기술적, 경제적 한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을 존중하고, 환경을 생각하며, 아이들의 미래를 소중히 여기는, 그런 꿈같은 도시를 기대한다면, 이 책은 충분한 위안과 희망을 줄 수 있음에 틀림없다.

인구 160만 명의 대도시, 꾸리찌바는 여러 부분에 있어서 현대도시들이 행하는 일률적인 도시행정과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현대도시들이 많은 비용을 들여 지하철을 건설하는 것과 달리, 꾸리찌바는 그 수백분의 일의 비용을 들여 버스를 이용한 대중교통의 구축을 선택했다. 그 대신 '지하철의 지상화'라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도시교통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역사적 지구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창조적 발상이나,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주민들을 위한 도서관인 '지혜의 등대'의 건립, 공공서비스의 분산화를 위한 '시민의 거리' 등의 예는 꾸리찌바에서 행해지는 도시행정의 독특함과 창조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그러한 도시행정이 단기적, 즉흥적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지속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래를 담당할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꾸리찌바는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쓰레기 아닌 쓰레기' 프로그램을 통해 재활용품을 교과서나 장난감으로 바꾸어줌으로써 아이들의 재활용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제고시킨다거나, 꾸리찌바 시의 역사에 대한 교육과 현장학습을 통해 시에 대한 소속감과 애정을 갖도록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다. 또한 사회적으로 소외된 아이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그들을 사회 내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서 꾸리찌바는 저예산 정책을 통해서도 창조적 발상과 시민들의 자발적 협력이 합쳐지면, 괄목할만한 정책적 효과를 이루어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오늘날 현대의 대도시들이 지니는 많은 문제점이 무엇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궁극적인 도시행정의 원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이런 꾸리찌바이기에 이 도시가 브라질 내에서 '존경의 수도'로, 국제사회에서 '희망의 도시', 또는 '지구에서 환경적으로 가장 올바르게 사는 도시'로 인정받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꿈은 결코 현실이 아니며, 이것은 '꿈의 도시 꾸리찌바'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꾸리찌바가 보여주는 창조적이고, 친환경적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을 존중하는 여러 도시행정들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고, 이것이 꾸리찌바로의 유입 인구 증가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로 인해 꾸리찌바는 빈곤층의 증가를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들이 강 주변에 어지러이 버리는 쓰레기 문제와 오염된 하수를 그대로 방류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에 부닥친다. 뿐만 아니라 "꾸리찌바 시는 천국이 아닙니다."라는 전 시장 레르네르의 말처럼 꾸리찌바는 다른 도시들의 여러 문제들을 똑같이 가지고 있고, 이것은 바로 '현실의 도시 꾸리찌바'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만하다.

'꿈의 도시'와 '현실의 도시'는 다분히 상충적이고, 이는 '환경과 개발의 딜레마'에 관한 문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꾸리찌바가 원칙적, 이상적으로 축구하는 것은 물론 '지속가능한 개발'이지만, 적정한 개발의 수준을 상정한다는 것은 매우 막연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현실적으로 산적한 문제점들을 앞에 두고, 오로지 원칙적, 이상적 원리만을 추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과연 앞으로도 꾸리찌바가 여전히 '꿈의 도시'로 남을 수 있을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시의 교재에 이런 문구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 꾸리찌바는 분명 희망적이리라고 믿는다.

당신이 울고 싶을 때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나는 당신과 함께 울어줄 수 있다.

당신이 웃고 싶다고 느낄 때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우리는 함께 웃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필요치 않을 때도 역시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나는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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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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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색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왠지 이 책은 파란색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같은 색도 좋고, 넘실거리는 파란 물빛과 같은 색이라도 좋다. 어느 쪽이든 보기만 해도 유쾌해지고, 청량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색이라야 그나마 이 책을 정의할 수 있으리라.

책 읽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겠냐마는, 왠지 이 책은 가까운 공원에라도 나가서 읽어야만 할 것 같다. 하늘은 청명해서 구름 한 점 없고, 바람은 선선해서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그런 날이라면 이 책을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딱 알맞다. 따사로운 햇빛이 실내에 가득 차거나, 혹은 커다란 창을 통해 밖에서 내리는 보슬비가 훤히 내다보인다면, 실내에서 읽어도 나쁘진 않겠지만, 역시 그걸로는 뭔가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책을 읽는 방법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왠지 이 책은 느릿느릿 읽어야만 할 것 같다. 아니, 읽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글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을지도 모를 사진들은 읽을 수 없는 것임이 당연하고, 그래서 만일 가능하다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진과 글에서 전해지는 서글픔, 따뜻함, 아쉬움, 설렘 등, 그것이 어떤 느낌인가는 아무래도 좋다. 설령 그 속에서 저자와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더라도 전혀 상관없다.

책을 단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왠지 이 책은 '매혹'이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어울린다. 총천연색의 사진들과 그것을 감상적으로 표현한 글,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여행이 주는 매력이 어울려 결코 쉬이 뿌리칠 수 없는 '매혹'으로 사람을 끌어 당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독자에게 매우 불친절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욱 현실과 유리된 환상처럼 느끼도록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을 즈음, 여전히 이 책의 '매혹'에 휩싸여서는 왠지 '현실'을 인식해야만 할 의무를 느낀다. 온갖 색으로 표현된 사진들과 고급스런 인쇄 뒤에서 묵묵히 재료가 되어준 나무나 그 밖의 것들. 그리고 길 위를 다니는 사람들을 기꺼이 맞이해주는 길 위에 사는 사람들. 무엇보다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항시 존재한다는, 너무나도 가슴 든든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이 책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수줍게 말하지만, 매혹으로 넘치는 이 책이 아무것도 아닐 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현실'이 없는 '매혹'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매혹'의 이면에 있는 '현실'이 반드시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그것이 없다면 '매혹'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임이 분명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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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뚱이의 상추쌈 명상
오진희 지음, 신영식 그림 / 열림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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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꾸녁이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먹고살던 이야기'는 조금 낯설다. 사실 '똥꾸녁'과 '가난'의 관계도 그리 쉽게 이해되지 않다보니, 저자의 옛 먹거리 추억에 동참하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다. 게다가 도대체 씀바귀, 엄나무순, 머위, 꽃다지, 돌나물 등의 나물을 아무리 얘기해도 나로서는 그 맛은 고사하고, 생김새 구별조차 쉽지 않다. 당연하게도 그 구체적 요리법과 도움이 되는 상식 등도 내게는 꽤나 생소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책을 그저 '풀 뜯어먹는 소리'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성급한 결론임에 분명하다. 비록 저자의 어린 시절 추억과 자연이 주는 온갖 나물들, 그리고 요리법 등이 조금 낯설게 여겨지더라도, 그것은 우리 전세대가 살아왔던,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고, 그래서 낯선 것만큼이나 또한 익숙하다. 더군다나 시골로 돌아와 자신의 텃밭을 가꾸며, 자연이 아낌없이 주는 것들에 감사하며 사는 저자의 삶이 그저 '먹고 사는 이야기'일리도 만무하다.

물론 아직은 좀 더 낯선 감정이 앞서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기본적으로 나는 '먹는 이야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좀 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 책은 어쩌면 '친숙함'과 '그리움'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마치 청국장의 부담스러운 맛과 냄새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어느 순간 그것을 그리워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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