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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 마지막 장을 읽고 한동안 생각했다 - '도대체 이걸 보고 어쩌라는 거지?'

소설은 선셋 파크라 명명된 무허가 아파트를 중심으로 이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는 순차적이란, 시간 순서대로라는 의미가 아니다. 때로는 시간이 뒤섞이기도 하고, 관점이 엇갈리기도 하다. 한 인물이 서술한 사건의 뒷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알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사건'을 한 줄로 줄이기란 어렵지 않다. '어느 날, 선셋 파크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살던 사람들이 쫓겨났다' --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사건'의 전부이다.

하지만 이건 단지 이 책에 등장하는 사건일 뿐이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으로 가지고 하나의 장소에 모이며, 또 각자의 이유로 흩어지게 되는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이야기라는 건 참으로 유쾌하지 않다. 솔직히 좀 짜증나기도 한다. 도대체 이 소설에서 호감이 가는 인물이라고는 별로 없는 것이다. 일단 주인공격인 마일스 헬러부터가 글러먹었다. 낭만이니 그 자신에게는 진실한 사랑이니 포장해도 미성년자와 사귀는 사람 아닌가. 과거에 얽매여 현실을 무시하는 인물이고, 그러면서도 현실에 초연하지 못한다. 빙 네이선은 또 어떻고? 선셋 파크를 만들 만큼 리더쉽도 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내치지 않을 정도로 사람도 좋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리더쉽' 때문에 결국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게 되는 인물이 아닌가. 그외 등장인물도 다 나름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읽는데 든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보건데, 그 이유는 바로 등장인물들이 재수없으리만큼 현실적인 바로 그 짜증남에서 나왔다. 당장 바로 내일 거리에서 나와 마주칠 것 같이 재수없는, 호감이라고는 가지 않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고, 그래서 이들의 이야기에 그렇게 빠져들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 나 역시 그렇지 않느냔 말이다. 때론 마일스처럼 과거에 집착해 현실을 놓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현실의 알량한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생기면 발끈하지 않던가. 때로는 빙처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낙관과 이상주의에 젖어보기도 하고, 앨런처럼 한없는 우울감과 막연히 떠오르는 피해의식에 무기력해본 적도 있지 않던가. 처음엔 영 호감이 가지 않던 주인공이 후반부로 가면서 눈부신 성장을 하는 것에 정신없이 몰입하면서 봤다.(특히 앨런의 변화는 깜짝 놀랄 정도이다. 이후 가장 잘 살아남을 인물로, 나는 주저없이 앨런을 꼽을 것이다.)

아,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내가 정말 폴 오스터에게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주인공들을 내세워 마음을 풀어놓더니 결국 그 주인공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그들의 미래를 응원하게 되고, 그래서 '각자 자신의 길을 가기로 하고 떠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정도로 끝내 줄 거라 안심하게 만든 상태에서 그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아, 작가, 이 나쁜 사람같으니라고. 끝나고 정말 이게 결말 맞나 싶어서 몇 번이나 책을 넘겨봤는데, 그게 정말 결말 맞더라.

그는 아버지를 실망시켰고, 필라를 실망시켰고, 모든 사람을 실망시켰다. 차가 브루클린 다리를 건널 때 그는 이스트 강 건너편의 거댛나 선물들을 바라보며 사라진 건물들, 무너지고 불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건물들, 사라져가는 건물들과 사라지는 손에 대해 생각했다.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지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p.328)

저 부분을 한 열 번은 그 자리에서 읽은 것 같다. 결말의 허함과 의아함을 달래기 위해 그렇게 눈이 마지막 페이지 위를 오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마일스가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살자'고 다짐한 그 모습이 역설적으로 이 소설 속 어떤 행동보다도 어떤 말보다도 희망적임을.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는 모든 희망은 공허하다. 과거를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희망이 비치지 않는다. 장밋빛 미래만을 바라보는 사람의 희망은 공허하다. 희망은 철저히 현실을 바라보는 자에게만 보이며, 현실을 살아갈 때 희망도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희망을 버리고 드디어 현실에 눈을 돌린 마일스의 모습이 그렇게 가슴아프면서도 대견하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괜찮다. 그의 앞에 기다릴 미래는 그가 꿈꾸던 것처럼 만사 잘 풀리는 미래는 아닐지도 모른다. 양어머니와는 끝까지 화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감옥에 가서 몇 년을 또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미래가 암울할 것 같지많은 않다. 마일스 헬러와 메리-리의 모습은 그가 결국 쟁취할 그 미래, 희망처럼 우뚝 서 있지 않던가. 이 소설 속에서 그들의 과거는 자세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모리스 헬러나 메리-리의 과거 역시 좌충우돌이었고, 온갖 고뇌로 가득 차 있었다는 걸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 파산을 눈 앞에 두면서도 모리스는 마일스에게 뿐만 아니라 그 출판사 사람들에게 든든한 우산이 되어주고 있지 않던가. 배역을 위해 소중히 가꿔 온 몸매를 버린 메리-리의 모습은 보지 않아도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던가. 대개 희망이란 현실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새겨지는 주름과 같은 것, 바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름답지 않을지도 몰라도 절대 비웃지 못할 무게를 가진, 그런 것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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