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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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랄 때는 아버지 때문에 화가 나서 울어본 적이 아주 많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불행한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도 많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그렇게 아버지와 가장 많이 충돌했던 장녀는 좀 변했다? 이제 나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할 줄 안다. 왜? 그렇게 심한 독설가인 아버지도 많이 늙으셨다는 이유일까? 아니면 시간이 가져다 준 망각이라는 것의 위력으로, ‘과거’는 다 잊었서?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힘이 비극을 희극(?희극씩이나..)으로 바꾸어 놓은 것일지도, 아마 과거에서 조금도 상황이 변하지 않고, 평생을 서로서로의 불운과 실패를 조롱하며 흘러갔다면 지금은 비극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는 장녀(장녀에게 뿐이었겠냐만...)에 대한 기대가 조금 있으셨던 것 같다. 그런데 기대와는 많이 엇나가는 딸을 보면서, “가망없어! 틀렸어!”라는 말씀을 곧잘 하셨고, “그래요, 저 못났어요. 아버지의 독설이 저주가 되어버린 거예요! 모두 당신탓이라구요.... ” 식의 울먹이는 댓구를 하면서, 가족이 모두 모인 밥상 앞에서 숟가락을 냅다 던져버리고 나온 적도 많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지난 일을 잘 잊어버리는 스타일이다. 잊는 게 속편해서 그런 건지 속이 편해지니까 제법 상처가 될 과거의 것들은 다 잊게 되었는지, 뭐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잊었다.(난 잘 잊어버리니까, 아마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 유진 오닐 같은 대작가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안 될 것이다. ) 게다가 나는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빼닮은 자식이었던 것이다. 나의 못나고 미운 점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아버지에게 발견했던 싫은 구석이기도 하고, 내가 당시의 아버지였어도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주기는 힘들었을 것도 같다. 지금 생각하면 말이다. 하지만, 그 때는 왜 그렇게 아버지에 ‘악을 쓰며 대들었을까?’ 아버지가 빈정 상해지면 독설이 더 심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안면서 말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의 가족 성원들은 어떤가, 음 1막이 시작됐을 때, 분위기는 사뭇 화목한 가정의 무엇과 다를 바 없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해주고, 아내는 남편에게 흐트러짐없이 보이려고 연신 머리를 매만진다. 주방의 식당에서 담소를 나누며 크게 웃는 두 아들의 웃음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조금더 깊이 들어가보면 이렇다. 아버지는 아일랜드 이민자(어릴적에 갖은 고생을 함)로, 돈에 인색하여 두 아들의 빈축을 사고, 어머니는 처녀 시절의 행복을 뒤로하고, 아버지와 결혼하여, 아버지의 순회공연 탓에 싸구려 호텔을 전전, 구질구질한 기차에 자기들의 집(사실 어떤 여자에게 집은 세상의 절반일 수 있다.가사에 열성적인 좋은 주부일수록 집에 대한 집념이 강하기 때문에)다운 집(극이 벌어지고 있는 여름 별장 제외하고)도 없이 아이들과 내팽개쳐졌다는 남편에 대한 피해 의식도 있다. 게다가 둘째를 일찍 하늘나라에 보낸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셋째 아이(극중 두 번째 아들 에드먼드 작가 유진 오닐의 현신)를 임신, 그러나 셋째는 병약하고 예민하기만 해, 어머니는 에드먼드에게 마저도, 피해 의식과 죄 의식이 점철된 감정으로 대한다. 알콜 중독이 있는 큰 아들 제이미는 돈푼이 주어지면 술을 마시고 여자를 사는 한량이다. 아버지에게 욕을 먹으며 자란 티가 나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드먼드...절망에, 염세주의에, 신을 무정하는 무신론자를 읽는 병약하고 예민한 청년.


놀랍고도 이중적인 가족이라는 집단의 아이러니는 이 작품 속에도 있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잡고, 조롱을 하지만, 곧 지문처리 “(절망적이면서도 즐거워하는 웃음을 지으며,) 그렇지만 이해해야지 않겠니, 운명이 저렇게 만든거지, 저할 탓은 아니야” 이것도 위로와 위안에 속한다면..... 음...

조롱과 위안이 함께하는 피와 눈물로 얼룩진 집단, 이것이 가족이라는 생물체의 속성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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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7-31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곡 전공자도 희곡 전공할 때 읽어놓고 멀리 두고 있는 책을 읽으시다니요...
다양한 독서를 하시는 이카루님, 정말 어여쁘십니다 ^^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암스, 아서 밀러의 희곡을 좋아했어요.
세 사람 다 분위기가 다른데... 유진 오닐은 특히 비극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지요.
그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을 젤 좋아했는데, 저랑 좀 코드가 맞았지요 ㅎㅎ
장녀로서의 님이 어떠셨을지 눈에 훤해요. 그래서 막내가 젤 편해요. 저희는 언니두분 오빠 한 분 걱정하시다가 제 단계에 오면 에유, 너 하나쯤은...이렇게 변했다니깐요 ㅎㅎ 덕분에 좋은 리뷰와 잊고 있던 책 추억합니다 ^^

icaru 2005-07-31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지요.. .새벽에 쓴 리뷰들을 낮에 읽으니..좀 적나라한게 읽기가 민망해지네요... 4: 44분에 올리다니...숫자를 저렇게 맞출 의도는 없었는데...^^;;;

제가 님께 옛날 생각나게 한 거군요 ^^
'느릅나무 밑의 욕망' 꼭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유진 오닐이 좋아질 것 같거든요 ^^

2005-07-31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8-0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장진영의 그것이 알고 싶다의 '수경사' 그 이후를 보다가... 세수도 양치도 안 하고... 잠들었어요... 옆지기도 그 날 체해서 10시무렵부터 잠자리에 들었구요... 그렇게 거실에서 엎어져 자다가... 문득 찝찝함에 일어나 봤더니...새벽 3시더라구요... 세수도 하고... 양치질도 하고...그래서 컴터 앞으로 직행!!
다시 아침 일곱시에 잤어요... 그리구 열 한시 다 되서 일어났으니까...
절반으로 나누어 잤다뿐... 7~8시간 잔 거네요~~

그동안 책은 몇 권 읽었지만...리뷰는 안 쓰고 있었거든요... 최근에 몰아서 헥헥대고 썼는데... 하루키의 <슬픈 외국어>가 마지막이네요...
숙제 혹은 빚을 청산한 것 같은 홀가분함이 들어요~

icaru 2005-07-31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어서 또...님... ^^ 아, 언니분 정말...엄마 같으세요~
아버지는 참, 이상하지요. 어머니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는 구절을 어데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전...되려 아버지 쪽이에요.....
많이 부딪혀서 그런가봐요... 에구..

인터라겐 2005-07-3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녀나 장남은 기대치 때문에 참 많이 힘든것 같아요....

icaru 2005-08-01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녀도 그렇고...형제많은 집의 장남도 좀 그렇죠~ 결혼할 때도 쉽덜 않고...
그렇지만...막내도 막내나름대로는 힘들겠지요... "새도 새나름대로는 힘들'듯이 히히..

2005-08-01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8-0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 주신 님~ 답방해 주셨네요 ^^ 고맙습니다~ 저도 님처럼 재밌고 오소독소하게 리뷰를 쓸 수 있었음 한답니다... 유진 오닐이야 뭐, 앞으로 차차 알면 되는거죠~

비로그인 2005-08-01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복순 아짐 서재가 깽스털스 파라다이스로 변했습니다, 그려. 숟가락, 포크 막 날라다니구 말에요, 크헐헐헐..아뵤~ 게다 '조롱과 위안이 함께하는 피와 눈물로 얼룩진 집단, 이것이 가족이라는 생물체의 속성인가 보다.' -> 이 문장에 오늘 와방 올인합니다!! 글쵸.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족이란 존재. 저도 참 미워했었는데. 근데 지금은 되려 아버지를 그리워할 뿐만 아니라 제 자신조차 그렇게 싫어하던 그들 군상의 일부분을 닮아 있더라구요. (에혀..가족 같은 건 애시당초 만들지 말아야지!)



icaru 2005-08-04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갱스털스 파라다이스라굽쇼~
어데서 그런 기가맥킨..표현을 또 구해 오셨나요~
복 시스털즈가... 그렇죠 모...^^

비로그인 2005-08-0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갱스털스 파라다이스, 박청호의 소설 제목에서 가져온 듯!
여보야, 어서 실토해 보랑께요.

2005-08-05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8-05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파 님은 아는 것두 만탐시롱~

히피드림~ 2005-08-11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진오닐의 희곡은 이것말구 <느릅나무 밑의 욕망>과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읽어봤어요. 그래서 이 작품도 어떤 희곡일까 궁금했는데 이카루님 통해 제대로 알게되었네요. 가족은 세상 누구보다 서로에게 가까워야할 존재들이지만, 한편으론 타인보다도 더 상처를 주고 받게 되는 사이인지도 모르겠어요. 님의 리뷰를 읽으니 한층 더 그런 생각이 드네요.^^

icaru 2005-08-1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펑크 님 오셨네요~ <느릅나무 밑의 욕망>은 벌써 두 분이나 말씀 주시다니..어쩐지 꼭 읽어야 할 것 같음...
밤으로의 긴 여로를 읽음서, 참 그랬던게... 주고받는 대사가 어디서 많이 들어온 대사들이었던 거예요... 후후...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화가,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대화가 말이죠... 어디서 들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