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폐허의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절망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5월
평점 :
이 책을 읽기 전에 우선 저자 소개를 찬찬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사유한 모든 것을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로 옮겨놓은 허무주의 철학자, 수필가.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 최고의 지성으로 불린다.
우수적 기질을 보이긴 했으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는데 이미 그때부터 불면증과 자살에 대한 충동에 시달렸다.
니체와 쇼펜하우어에 심취, 20대에 첫작품 <절망의 끝에서>를 펴낸다. 이 책이 바로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라고 번역된 위의 책이다. 이 책으로 장래 촉망되는 작가의 대열에 서게 되고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젊었을 때부터 자살의 충동에 시달렸다고 하나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5년 84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생을 마감할때까지 문단의 교류도 인터뷰도 사양한 채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았으며 두 차례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정신이 살아있다는 것은 삶의 위축을 뜻하며, 수많은 고독의 시간과 고통의 연장을 의미한다. 정신을 통해 우리가 구제된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가? 정신을 통해 우리 내면의 번민을 극복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오히려 정신은 우리에게 내적 불균형을 가져다주지만 어떤 위대함을 부여하기도 한다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다. 삶을 찬미한다는 것이 정신적 불안의 표시이듯, 정신을 찬미하는 것은 의식이 없다는 표시이다. 정상적 인간에게 삶은 자명한 현실이지만, 병든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은 무너지지 않으려고 삶을 찬미하며 그 속에서 뒹군다. (23쪽)
그렇다. 삶을 자명한 사실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응한 사람은 굳이 삶을 찬미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불안의 표시이고, 찬미함으로써 그 불안을 잠재워보고자 하는 몸부림임을.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형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은 삶 속에 이미 내재하므로 삶 전체가 거의 죽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마지막 고통의 시간이란 단지 삶과 죽음의 다툼이 가장 치열해지는 순간, 죽음을 의식적이고 괴롭게 경험하는 순간일 뿐이다. (29쪽)
이 책에는 죽음, 고통, 절망, 슬픔, 무의미 등의 말들이 차고 넘친다. 그가 두려워 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고통, 절망 등에 대해 쉼 없이 써내려 가며 그 슬픔과 삶의 무의미성에 적응해보려 한 것이 아닐까. 죽음과 관련되지 않은 슬픔, 절망으로 괴로와 하는 사람은 당장 육신의 고통과 맞서보라고 했다. 머리 속에서가 아니라 눈 앞에서 죽음과의 대면을 체험해보라고. 결국 정신의 고통은 육신의 고통을 다스리지 못한다. 육신의 고통은 정신의 고통을 지배한다. 내 경우에도 아무리 무의미하고 절망스런 밤을 보내고 난 후라도 아침에 온전한 육신으로 눈을 뜬 순간 일단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왜 나는 자살을 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나는 삶만큼 죽음도 혐오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왜 이 지상에 존재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98쪽)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져, 나름의 삶의 방식-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을 찾도록 선고받은 불행한 동물 (120쪽)
하이데거였던가? 인간은 던져진 존재라고 말한 철학자가.
이성간에는 정신적인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어, 그것이 내게 정신적이라는 환상을 주는 물리적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151쪽)
이성간의 우정이란 단지 사랑으로 승화하는데 실패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 평소 생각이니, 저자의 이 말에도 동의할 수 밖에.
젊었을때부터 에밀 시오랑을 괴롭혀온 것은 자살의 충동과 불면증이라고 했다. 불면증은 실로 인간의 몸과 정신을 갉아 먹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다. 혹시 잠이 많은 것을 고쳐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다. 불을 끄면 잠을 못자는, 주위가 조용해도 잠을 못드는 사람으로서.
신은 잠을 빼앗고 대신에 깨달음의 시간을 주면서 인간에게 벌을 내린다. 잠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가장 무서운 형벌이다. (153쪽)
각기 혼자 노력으로 살고 있는 동물들은 비참하다는 것을 모른다. 계급이나 착취를 모르니까. 비참함이란 동류를 예속시키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에게서만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 정도로 자신을 스스로 멸시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168쪽)
비참함이란 자기 멸시에서 비롯한 느낌이라는 것.
이러한 절망과 회의, 무의미,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어떤 위대한 철학자의 깨우침도, 발견도, 종교도 아니었다. 이 책에서 한줄 의외의 문장을 보았다.
한 송이 꽃의 아름다움이 우주의 궁극적 목적을 충분히 보상해주듯, 청명한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구름 조각이 나의 우울한 염세주의를 즐겁게 해주는 순간들을 경험했었다. 내면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지극히 미미한 자연의 광경에서도 상징적 의미를 발견한다. (198쪽)
한 송이 꽃, 작은 구름 조각.
번역본으로 읽었으니 그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겠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저자의 문체에 열광한다고 한다. 그의 이런 극도의 염세주의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시적인 문체가 가진 아름다움은 그가 전하는 삶의 비극까지도 용서하게 만든다고.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속에 들어있는 온갖 비극적인 생각들, 우울하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어져서 구경하듯이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것은 실로 새로운 느낌이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