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한 소셜커머스 업체에서 톱스타 전지현을 내세운 광고를 내세웠다. 메인 카피는 “○○이 있어서 나는 오늘도 꽤 잘 삽니다”였다. ‘꽤 잘 삽니다’, 필자는 문득 이 카피가 이태백, 인구론, 3․5․7포 등의 주인공인 청년들의 삶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히키코모리도 말이다. 본의 아니게 직접 그렇게 살아본 적도 있어서 안다. 어른의 인생룰 중에 ‘나잇값을 못하면 자유로워지는 대신 외로움을 얻는다’는 것이 있다. 혹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남의 이목을 신경 쓰며 ‘나이에 맞는’ ‘평균’적인 삶을 맞추려 아등바등한다고 비아냥대는 사람이 많은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세상은 생각보다 급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20대 중후반에 취업을 하고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사이에 결혼과 출산을 마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30대의 신입사원이 있어도 그 주인공이 ‘나’가 될 확률은 극히 희박하며, 어느 순간부터 연애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만날 친구의 범위가 극히 적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필자는 3포 중이다. 직업은 없지만 별별 일을 하고 있는 소위 말하는 ‘프리랜서’이고 수입이 롤러코스터를 타서 가끔 강제 히키코모리가 된다. 아무리 절약을 해도 주거는 해결하지 못해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빨대를 꽂았다. 집안일을 전담하고 웬만한 수리나 공사를 스스로 하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았다. 식사는 거래처 미팅이나 아르바이트에서 거의 해결하고, 여러 루트에서 예쁨 받고 음식을 얻었다. 그렇게 살면서, 경조사 불참하고 최소한의 친분관계만 맺으면 꽃다운(?) 2말3초에도 교통비 제외하고 한 달에 10만원 정도면 충분히 산다. 임금이 남으면 신나게 적금도 붓고 학자금 대출도 갚고 경조사도 나간다. 당신이 (더 잘 알지 못하겠으나) 히키코모리로 살아도 몇 가지 가능한 소득생활이 있는데 필자의 경우는 매글을 했다. 첨삭(교정), 타이핑, 기고, 대필, 광고알바, 공모전 등 다양한 일거리가 있지만, 당신이 엄청난 재능이 있지 않는 한은 밖에서 발품 파는 것만큼 벌지 못한다. 대인 관계는 상품권 쿠폰 전송으로 해결하였다. 적응하니 외로움도 모르겠고 살만 하였다.
강신주가 말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충분히 휴식하는 인간, ‘상담이 거의 필요 없는 자본주의를 극복한 인간’에 거의 다다랐다. 하지만 필자의 ‘행복’은 몇 년 째 울면서 ‘나는 행복합니다’를 열창하는 한화 팬의 ‘행복’ 같은 것이었다. 필자는 그 ‘꽤 잘 살만 함’이 무서워서 ‘프리랜서’가 아닌 ‘백수’라고 말하며 오늘도 이력서를 넣고 2,3,4잡을 뛴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2011년 일본 최대 출판사 고단샤에서 같은 제목의 원서를 출간하며 이런 특수한 상황의 나라는 일본밖에 없는 것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2014년 말 나온 우리말 번역본을 읽으며 한국과 일본이 어쩌면 이렇게 닮았을까 싶었다. 민음사도 그렇게 생각해서 번역했을 것이다. 원서가 출간된 지 4년이 넘은 지금 일본의 사회학 연구는 저출산 고령화 관점에서 전 세대 전 방위를 다룬다. 사토리 세대의 절약? 주 1만원 내외로 쓰는 노인들이 등장하였다.
전쟁 중의 ‘젊은이 희망론’은 1990년대에 사업자들을 위해 내세운 정책과 매우 비슷하다. 거품경제가 붕괴하고, 일본은 기업의 수를 늘리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발표했다. 그때 정계‧재계에서 나온 메시지들을 살펴보면, 사업가는 일본 경제의 구세주이며 고용창출도 담당하고 ‘공공’과 윤리를 중시하면서, 실패한 경우에는 자기 책임을 다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진정 사업가는 ‘편리한 협력자’인 것이다. 단지 사업가에 국한하지 않고, 오늘날에도 정치인이나 경영자, 문화계 인사까지 “젊은이는 좀 더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어른들이 적잖다. 이러한 지적 자체는 환경할 만한 일이다. 나도 젊다는 이유만으로 다양한 혜택을 받아 왔다. 이 책을 출판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내가 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젊은이 희망론’은, 종종 암묵적으로 젊은이들을 편리한 협력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젊은이에게 권리나 구체적인 혜택, 기회는 주지 않고, 그저 ‘노력하라.’라고만 다그치는 행동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다. 아무튼 황군의 병사가 되어야 했던 과거의 젊은이들과 달리, 오늘날 일본의 사업가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경우가 아닌 이상) 목숨을 잃게 될 정도의 일은 겪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다. - p.61
그런 이시하라 신타로(78세)가 지금에 와서는 “젊은이에게 자위대, 경찰, 소방관, 청년 해외 협력단처럼 ‘타인을 위해 몸을 혹사하는’ 직업을 갖게 해, 일 년 동안 구속해야 한다. 공공을 위한 봉사를 통해 심신을 긴장시킴으로써, 감정을 관장하는 뇌관을 단련시킬 수 있다.”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1955년 당시에, 이 사회가 이시하라 신타로라는 ‘젊은이’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줬었는지 벌써 잊었다는 말인가? 그렇겠지, 잊었겠지. - p.68
절반 이상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행복하다.’라고 느끼면서, 동시에 ‘불안하다.’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p.131
판매 부수 누계가 2억 부를 돌파한 현대판 성서 <원피스>에 흐르는 사고방식은 ‘동료를 위해서’로 요약될 수 있다. <원피스>의 인물들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동료들에 대한 헌신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있다. 뚜렷한 적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는 그 세계에서, 루피(19세, 후샤 마을) 일행은 끝을 알 수 없는 ‘동료 찾기’를 이어 간다. 현실의 젊은이들도 사정은 (루피 일행과) 마찬가지다. 이제 딱히 ‘젊은이 문화’라고 지칭할 만한 공통성이 사라진 시대에,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동료’와 함께 지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사회학자 야마다 마모루(38세)도, 현대의 젊은이들이 자아 정체성의 근간을 가까운 인간관계 등 여러 가지 ‘관계’ 혹은 ‘집단에의 참여 자체’에서 찾고 있다고 언급했다. - p.140
먼 나라의 혁명보다도 계란덮밥 - p.182
사토리(득도) 세대. 인생에 있어 가장 정력적이고 성취 목표가 많은 나이에 붙이는 단어가 ‘득도’라니, 듣기만 해도 슬퍼진다. 연애는 운에 맡기거나(초식) 관심을 끊고(절식), 취업이 안 되면 이런 저런 알바를 하며 살 만큼 벌며(프리터) SNS로 욕망의 허기를 채우며 그럭저럭 잘 산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별 관심은 없지만 SNS에서 화재가 된다거나 뭔가 재밌어 보이면 놀이를 하듯, 친구를 사귀러 가듯 참여한다. 걱정하다가 비난하다가 하며 청년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삼촌 세대(40대)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고민한다. 일본에 단카이 세대와 사토리 세대가 있다면 한국은 부자 관계로 더욱 세대적 결속이 끈끈한 베이비붐 세대와 3포 세대가 있다. 3포 세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다독이는 베이비붐 세대의 위로와 X세대의 연민을 받는다.
40대에게 휘둘리는 사토리 세대처럼 3포 세대도 486 세대와 반목한다. 지금은 586으로의 진입을 앞두고 베이비 붐 세대와 조금 다른 색깔의 ‘힐링 멘토’로 인기 몰이 중이지만, 과거 20대 개새끼론을 내세우며 자신의 자식인 촛불 소녀만이 희망이라 외치던 이들이었다. 대부분은 사토리 세대처럼 3포 세대도 손톱 숨기고 저항하지 않는 ‘차별에 찬성하는 괴물’이 되었지만, 비슷한 미래를 영위하게 된 촛불 소녀들을 고소해하며 그들과 10대들을 거짓선동하고 486을 욕하는 재미로 사는 ‘일베라는 괴물’이 된 자도 있다. 사토리 세대에서 넷우익이 있다면 3포 세대엔 일베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방식은 진심보다는 패션(코스프레)이고 게이미피케이션으로 정의할 수 있는 흥미성 참여 양태이다. 원피스적 세계관을 가진 사토리 세대처럼 3포 세대는 악플보다 무플이 두렵고 좋아요에 집착한다.
신고는 보수 계열 단체에서 직접 활동하고, 고스케는 ‘니코니코동영상’ 등 인터넷을 경유해 활동한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지만 ‘우익 계통’의 주장과 공간이 그들에게 ‘마음 둘 곳’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고는 자신의 보수 계열 활동을 영화 감상에 비교했고, 고스케는 민주당의 정책을 ‘비판거리’로 삼아 즐기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정치 활동은 진지하면서도, 동시에 실질적인 (정치 활동의)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 p.206
"일본은 대지진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거나 모금 활동에 참여하면서 “일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라고 언급한 젊은이도 많았다.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생활하는 한, ‘일본’이 ‘일본답지 않은 요소’를 통해 전면적으로 부각되지 않는 이상, 그것(일본이라는 국가)은 좀처럼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3장) 그러한 의미에서 대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은 평소와 다른, 즉 ‘일본’이라는 존재의 바깥쪽에서 날아든 것이다. - p.245
"삼촌들이 젊은이들을 걱정해 주고 있다!"라고 생각하니 순간 눈물이 날 뻔했지만, 어쩌면 삼촌들이 ‘세대 간 격차’ 문제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그렇게 할수록 ‘세대 간 격차’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의회제 민주주의를 채택한 일본에서 사회 문제를 세대 문제로 처리해 버리는 한, 젊은 층에게는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 p.284
통계적으로도 젊은이의 ‘확연한 빈곤’을 발견해 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아사자 수는 2009년에 1656명이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20대는 4명, 30대는 15명 정도에 불과했다. 아마도 ‘인터넷카페 난민(일종의 노숙자로 일정한 주거지 없이 인터넷카페를 전전하며 잠자리를 해결하는 사람들을 말한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빈곤’이었기 때문에, 실제 수치와 관계없이 미디어에서도 주목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는 겉보기에 참으로 풍요로워 보인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풍요로움과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젊은이의 빈곤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빈곤)이 젊은이들에게 현재의 문제라기보다는 앞으로 나타나게 될 미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젊은 층일수록 같은 세대에 속한 사람들 간의 격차는 적다. 20대의 경우에는 정사원이든, 프리터이든, 급여 격차가 그리 크게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연공서열, 종신 고용을 전제로 하는 급여 체계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의 대기업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젊은 사원의 연봉은 규정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아르바이트의 경우에는 근로하는 날짜와 시간대만 조정하면 같은 세대의 정사원 이상으로 수입을 올릴 수 있다. - p.291
모든 시대에서 젊은이는 나이와 가능성 외에는 쥐뿔도 없는 약자였다. 기성세대는 늘 요즘 젊은이는 참 문제고 세상은 말세라고 했고, 그 문제적 젊은이가 무럭무럭 늙어 기성세대가 되어 같은 말을 하였다. 대개 한 시대의 평가는 동시대에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고 한 세대의 평가는 동세대는 객관적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변호’는 언제나 가능하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가 주목 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저자는 1985년생, 책을 낼 당시 27세의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연구원이었다. 일본의 젊은이로서 일본의 젊은이들에 대한 평가와 그들이 듣는 충고에 대해 당사자로서 정체성 고민에 빠져 들었다. 그의 전공은 처음부터 사회학이 아니었으나 그런 문제의식들이 그를 사회학자로의 길로 이끌었다.
책은 젊은이의 한 장을 할애해 정의의 역사와 젊은이론의 역사를 고찰하며 시작하여, 나머지 장은 사토리 세대의 정체성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우리말 번역본엔 원서에 없던 한국어판 서문과 오찬호 교수의 해제가 덧붙여졌다. 치열한 문헌고찰법과 인터뷰가 촘촘하게 저자의 탐구와 어우러져 읽는 맛이 좋은 책이다. 기성세대들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젊은이다움을 잃어버린 ‘이상한’ 득도를 향해 정진한다고 한다. 어려운 시대, 불행한 시대에 저항하지 않고 안주한다고 한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아직 그 불행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성세대가 보는 것처럼 일본의 젊은이들은 대체로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행복이 불안을 업은 행복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정말 비극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지금은 폭풍 전야라는 것을.
<우리는 차별에 반대합니다>를 쓴 오찬호 교수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해제의 제목을 ‘일본은 절망적이고 한국은 ‘더’ 절망적이다’라고 붙였다. 비슷한 이유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번역본 출간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찾아 읽은 책이 아니라, 생겨서 읽은 책일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일본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며 일본에 관심을 갖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 젊은이가 쓴 이런 책을 더 읽고 싶었다. 그러나 읽어보니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배운 바도 많았다. 우리도 우리 사회에 대한 전 세대, 전 방위적 접근이 시작되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상황이 나아질 확률은 거의 없다. 어찌되었든 젊은이는 살아야 한다. 견뎌서 늙은이가 되어야 한다. 요행과 합리화의 유혹을 참고 전력투구해야 한다. 이왕 전투하는 것, ‘나와 너’를 알고 달리면 더 좋으니까 이런 책도 읽어가면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 15기 "2015년 2월 좋은 리뷰"로 선정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