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은 용의 홈타운 창비시선 383
최정례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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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례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 창비


일기 같기도 하고 여름밤 잠이 오지 않을 때 메모장에 써 놓은 짧은 줄글 같기도 하지만 그것들이 합쳐지면 산문시가 된다.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소재들이 하나의 이미지나 하나의 단어를 고리로 해서 꽝 머리를 때린다. 이 어리둥절함, 당황스러움, 우스움, 허망함을 이 시집들의 산문시라 할 수 있겠지.







- 시간의 상자에서 꺼내어 시간의 가장 귀한 보석을 감춰둘 곳은 어디인가? 8쪽

지금 흐르는 이 시간은 한때 어떤 시간의 꿈이었을 거야. 지금 나는 그 흐르는 꿈에 실려가면서 엎드려 뭔가를 쓰고 있어. 곤죽이 돼가고 있어. 시간의 원천, 그 시간의 처음이 샘솟으며 꾸었던 꿈이 흐르고 있어.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달덩이가 자기 꿈을 달빛으로 살살 풀어놓는 것처럼. 시간의 꿈은 온 세상이 공평해지는 거였어. 장대하고 아름답고 폭력적인 꿈.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아픈 것들을 녹여 재우며 시간은 흐르자고 꿈꾸었어. 이 권력을 저지할 수 있는 자, 나와봐. 이 세계는 공평해야 된다는 꿈. 아무도 못 말려. 그런 꿈을 꾸었던 그때의 시간도 자신의 꿈을 돌이킬 수가 없어. 시간과 시간의 꿈은 마주 볼 수도 없어.



-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 9쪽 부분

나는 시 같은 걸 한편 써야 한다. 왜냐구? 짜장면 배달부 때문에. 우리는 뭔가를 기다린다. 우리는 서둘러야 하고 곧 가야 하기 때문에. (중략) 부르기도 전에 도착할 수는 없다. 전화 받고 달려가면 퉁퉁 불어버렸네, 이런 말들을 한다.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지만 기다릴 수가 없다. 짜장면 배달부에 대해서는 결국 못 쓰게 될 것 같다. 부르기 전에 도착할 수도 없고, 부름을 받고 달려가면 이미 늦었다. 나는 서성일 수밖에 없다.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



- 한짝 20-21쪽 부분

손목 부분을 바닥으로 세워놓으면 뒤뚱거리다 쓰러졌다. 전날밤 TV에서 본 팽귄같았다./ 팽귄이라니, 쓸데없는 생각이다. 팽귄은 남극에 산다. 얼음 위에 서서 발등 위에 알을 올려놓고 하체의 체온으로 알을 덥힌다. 얼음 바다를 마주 바라보며 먹을 것을 구해 돌아올 짝을 기다린다. 멀리서 뒤뚱뒤뚱, 날개였던 팔을 흔들며 다가오는 짝을, 목구멍에서 먹이를 토해 부화한 새끼의 입속에 넣어줄 짝을 기다린다. 얼음 설원에 눈보라가 친다./ 장갑은 한짝뿐이라 누가 주웠다 해도 다시 버려질 것이다. 구석에서 더 구석으로 치워질 것이다. 장갑은 신경도 뇌도 없으니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 쓰레기통에서 커피 찌꺼기, 쭈그러진 종이컵, 비닐봉지와 섞인다 해도 기분 같은 것은 없다. 차갑고 더러운 곳으로 휩쓸려간다 해도 그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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