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감자 200그램
박상순 지음 / 난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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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순 시집, 슬픈 감자 200그램, 난다



1.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시들이었다. 일상적인 소재지만 시인은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묘한 상상력과 결합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낸다. 형식적으로는 수첩에 끄적여 놓인 메모 같은, 이를 테면 '- 함, - 임' 처럼 시에서 잘 쓰지 않는 어미처리와 툭툭 내던져 놓는 듯한 이미지들이 흥미롭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 메모

- 현실은 내 웃음을 모방한다 32-33쪽

세상의 모든 집들이 내 증오를 모방한다. 무거운 지붕을 덮고 문을 걸어 잠근다. 한밤의 거리는 내 눈동자를 모방한다. 검은 호수에 누워 있을지라도 가라앉지 않는다.

한낮의 소리는 내 손가락을 모방한다. 갈라지고 흩어진다. 허공만을 움켜쥔다. 한낮의 우울은 내 목소리를 모방한다. 너를 향해 울린다.

그리하여 너는 내 우울을 모방한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통통해진다. 먹구름은 내 두려움을 모방한다. 땅은 비에 젖는다. 축축한 내 절망을 모방한다.

봄은, 가을은, 달아나는 나를 모방한다. 망실이는 나를 모방한다. 겨울은, 여름은, 내 가슴속의 돌들을 모방한다. 쌓인다. 무너진다. 사라지는 나를 잊으려 하지 않는다.

현실은 내 웃음을 모방한다. 벽들이, 벽돌들이, 그런 아이들이 웃는다. 텅 빈 복도에는 아무도 없는데,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모방한다. 길을 막는다. 길을 막는다.



- 나는 네가, 40-41쪽 부분

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중략 //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이 세상에 네가 없을 때에도/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 네 모든 것에 어찌할 수 없도록 얽매인 불행이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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