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의 바깥 창비시선 335
이혜미 지음 / 창비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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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시집, 보라의 바깥, 창비



1.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고 한다. 이 말에 조금 더 설명을 보태면 ‘나이가 들면 (원래대로) 눈물이 많아진다.’ 엄마의 뱃속에서 양수를 차고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아기는 운다. 젖 달라고 울고 기저귀 갈아달라고 울고 몹시 갑갑해서 이곳이 맘에 안 든다고 운다.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엄마 보고 달려가다가 모서리에 탁, 머리를 찧거나 친구랑 싸우다가, 동물원에 가서 무섭다고 운다. 그렇게 우리는 눈물이 원래 많았었다. 학창시절과 직장생활 결혼생활을 거치면서 ‘눈물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 몹시 건조한 생활을 한다. 부글부글 끓다가 식어가면서, 딱딱한 얼음이었다가 녹아가면서 우리는 땅으로 젖어든다.



2. 이혜미 시인의 첫 번째 시집은 인간이 물로 돌아가는 시간을 다룬다. 안데르센의 동화《인어공주》는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와 인간을 사랑하지만, 시집의 화자는 물고기를 사랑하는, 인어가 되고 싶은 인간이다. 예상대로 불가능이 예정된 사건이기에 비릿하고 축축하고 안쓰럽고 아프다. 큰 수술을 받고 난 뒤 마취가 풀리면서 서서히 찾아오는 끔찍한 고통처럼 딱딱했던 몸이 녹으면서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을 시집에서 받았다.





- 얼음편지 10-11쪽 부분

어떤 문장들은 사라지기 위해 태어납니다 얼어버린 소리 속에 과거를 담그고 환생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의 미욱한 음절들은 수줍게 비약 속으로 숨어듭니다 광물의 조흔색을 흉내내며 당신 살에 얼굴을 부비면, 나에게서 조난당한 탄흔들이 당신에게로 쏟아져내릴까요 (···) 이 문장을 더듬어볼 당신 눈동자를 떠올리면 심장의 뒤편이 수지류 수목들로 울창해집니다 흔적, 오직 흔적을 남기고 떠나기 위해 먼 나라의 기후들은 닫힌 당신의 창가에서 밤새 정처 없습니다// (···)






- 혓바늘 57쪽

혀끝에서 문장들이 박음질된다// 침묵이 혀 밑에서 열매 맺을 때 나는 네가 심어준 씨앗이라고 생각했다 언어로 뭉쳐 터질 듯 부풀어오른 그 열매 때문에 모든 말들의 옷자락이 찢어졌어// 그것의 이름이 씨앗이 아닌 바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떄, 내게 간절했던 것은 소음이다 비명을 찢는 고막이다 둥둥 울리는 영혼이다 율격을 버린 바람이다 세상 모든 구석진 곳에서 콸콸 흐르는 비린 음악이다 혀를 버리고 상징을 버리면, 날카로운 소리에 뿌리내려 자라던 바늘이 곧 통증을 거느린 씨앗이었으니// 이제 너는 실 없이도/ 오래도록 나를 바느질한다



- 인어의 시간 88-89쪽 부분

바다를 어쩌지 못하여 몸이 범람하는 날도 있었다 투숙객들은 그것을 멀미라 불렀지만 나는 그 울렁임을 인어의 시간이라 불렀다 바다와 인간 사이에서 일렁이는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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