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문학동네 시인선 86
김상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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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혁 시집, 다만 이야기가 있었네, 문학동네




1. 오랜만에 저녁에 산책을 나갔다. 가로등 불빛아래에서 아빠와 딸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엄마는 벤치에 앉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공원 둘레길을 한바퀴 돌다가 가로등 쪽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아빠 엄마가 배드민턴을 치고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문득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생각했고 저 두 사람은 매일 저녁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없어진 아이가 그리워서 저렇게 배드민턴을 치는 게 아닐까. 내가 방금 본 아이의 모습은 환영이었을까, 생각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 남자가 자동차 열쇠를 흔들며 아파트 입구에서 나온다. 남자가 찌르려는 것이 자동차 열쇠 구멍이 아닌 것만 같았다. 현관문을 여니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검은 바탕에 흰 가로등이 총총 박힌 우주였다.




2. 서사장르의 대표 주자는 소설이지만, 산문시에도 서사가 있다. 기본적으로 시(詩)는 묘사와 이미지로 의미를 굴착하지만 이야기에 리듬을 묻힌 산문시도 매력적이다.
김상혁 시인의 두 번째 시집에서 시적 주체는 소설적인 화자에 가깝다. 과거에 겪었던 체험이나 강한 인상에서 출발해 세계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전통적인 방식의 시작법(詩作法) 보다는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독자가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을 더 많이 열어 둔 셈이다.





3. 메모



- 젊은 왕의 사랑 16-17쪽 부분

우리는 싸웁니다. 젊은 왕의 찬란한 고백과 보배를 대신 전하던, 못 배워서 과묵했던 하인의 손과 입술에/ 가난한 여자가 애정을 느끼고 결국 그 늙은 이와 사랑에 빠지는 동안,/(···)/ 하가 난 선배의 젊은 왕이 여자와 하인을 목매달고,/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정말 사랑한 것이 하인이었는지, 아니면 하인이 전해준 왕의 아름다운 말이었는지,/ 아아! 목매달려 발버둥치는 순간까지도 알지 못했지!/(···)



- 빈손 36-37쪽 부분

다섯이 주먹처럼 모여 앉아 있었다. 사랑받기 위해서 조금씩은 형편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고백하면서. 내 손에 오래된, 녹고 있는, 작은 북쪽 하나를 쥐여주면서 그렇게.



- 인간의 유산 38-39쪽 부분

주인도 노예도 다 죽었고, 죽은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책 속에, 영화 속에, 머릿속에. 끝까지 나름 행복했던 남자의 이야기와, 양배추와 개를 소중히 키웠던 여자의 이야기가 매년 우리를 살찌우지.



- 시간을 재다 42-43쪽 부분

다시 공항을 떠납시다. 막 돌아온 자들의 회고담이 우리의 미래를 엉망으로 앞지르기 전에,



- 철로는 말한다, 47쪽 부분

이것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 쏟아지는 물과 피와 희망을 받아내는, 갈빗대 같은, 궤도로서, 빗장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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