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구리의 발견 창비시선 350
이병일 지음 / 창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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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일 시집, 옆구리의 발견, 창비
#이병일




1. 감성이 메말라간다. 온라인에서 만나는 인연은 늘어가는데 오프라인에서 연락하는 사람은 줄어간다. 호기심보다 혼자 누리는 짧고 작은 고독의 방을 찾는다. 작년에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처럼 ‘존재론에서 벗어나 관계망을 넓혀가는 사고’를 해야 하는데 마음속에 일었던 파문이 잔잔해져 그 많던 동그라미들을 찾을 수 없다.



2. 이병일 시인의 첫 시집. 오랜만에 서정시가 주를 이루는 시집을 읽었다. ‘격장(隔墻)’,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함, 이라고 사전에 나온다. 이 시를 읽으면 제주도 두모악 김영갑 갤러리가 생각났다. 중산간 지역 특유의 습기와 ‘작은 돌, 큰 돌, 옆구리가 깨진 돌, 대가리 날카로운 돌 모아’ 쌓아 올린 낮은 담장과 보랏빛 수국이 있는 곳. 바람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이고 햇빛을 반사하지 않고 안아주는 곳이었다.



‘격장’ 외에도 좋은 시들이 많다. 시집 후반부 시들이 좋았다. 건물을 쑥쑥 자라는 식물로 나타낸 ‘식물성의 발견’, 나무가 제 몸 안에 프로펠러가 있어 산에 바람을 빼곡이 채운다는 ‘프로펠러’, 죽순을 습한 바람이 부는 대밭의 항문으로 본 ‘죽순’도 읽어볼 만하다. 내 취향이 자연에 대한 묘사나 이미지를 강조한 시보다 그 속에서 뜬금없다 할 정도로 비트는 문장을 흥미롭게 여기기 때문인 것 같다.

서정시를 좋아하는 분이 편하게 넘겨가며 읽어보면 좋을 시집.


- 격장 8쪽

작은 돌, 큰 돌, 옆구리가 깨진 돌, 대가리 날카로운 돌 모아 담장을 쌓아올린다. 황토와 짚을 잘 섞어서 두 집 사이에 돌 울타리를, 매화나무와 감나무의 경계선을 후회도 없이 쌓아올린다. 나는 큼지막한 돌덩이를 양손으로 옮긴다, 감나무 그늘로 옮긴다. 저만치 매화나무 꽃눈이 지켜봐도 돌풍과 작달비에 끄덕없는 돌담을 쌓는다.// 오늘 나는 담장을 쌓아올리며 겨우내 잠자던 어깨 근육을 흔들어 깨웠다. 돌덩이 하나 놓고 수박만한 태양을 놓는다. 돌덩이 하나 놓고 굴참나무숲 그림자를 놓는다. 곰곰이 바람의 각도와 수평을 맞추고 또다시 돌덩이와 재미없는 한낮의 하품을 마저 놓는다. 그때 나는 줄곧 이 담장 타기를 좋아하는 장미나 능소화의 유쾌한 질주를 생각한다.//
나는 자명하게도 담장을 쌓는 일에 끝없는 동작으로 힘을 탕진 중이다. 누가 또 돌담을 쌓아 격장(隔墻)을 이루는가, 그러나 나는 돌담처럼 맑디맑게 정다울 것이다.



- 옆구리의 발견 12-13쪽 부분

나는 옆구리가 함부로 빛나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먼바다가 감쪽같이 숨겨놓은 수평선과 아가미가 죽어 나뭇잎 무늬로 빛나는 물고기와 칼을 좋아해 심장의 운명을 감상하는 무사와 무딘 상처 속에서 벌레를 키우는 굴참나무는 매끈한 옆구리를 지녔다// 살아간다는 것은 옆구리의 비명을 엿듣는 일/ 그러나 일찍이 아버지는 백열등으로 괴는 늑막염 소리 듣지 못했다/ 갈비뼈를 자르고 한쪽 폐를 후벼 파내는 시원한 통증을 맛봐야 했다// (···)



- 우물 22-23쪽 부분

현기증 이는 푸른 물결무늬들/ 그 기억 속에는/ 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우물이 있네// (···)// 한생이 유창하게 탈바꿈하듯/ 오래 준비된 침묵은 거꾸로 빛나는 웃음이고/ 꿈틀대는 바보 웃음이고/ 그러나 그 순전한 웃음이 글썽거리네/ 아프도록 멀리 있는 병이 씻기는 기분이랄까// 거기, 하염없이 차갑고 맑은 여자가 사네/ 오늘밤 나는 우물 속에 얼굴 처박고/ 갈증으로 일렁이는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보네//(···)



- 식물성의 발견 70-71쪽 부분

햇살 좋은 날씨가 많아질수록 건물들은 쑥쑥 자란다/ (···) / 첨단기술이 두더지처럼 기나긴 지하 세계를 뚫고 나와 지상 위에 정기적으로 거대한 아파트를 심고 있을 때/ 나는 종신보험을 들고 나온 초식동물의 꿈을 꾼다/ 건물의 유일한 외부인 골목에서 식물 냄새가 맡아진다



- 프로펠러 96-97쪽 부분

한 줄기 바람을 피우기 위해/ 어둡고 환한 여름 산은 프로펠러를 돌리나보다.// (···) // 나는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측량할 수 없다/ 그러나 프로펠러를 몸 안에 지닌 나무가/ 여름 산에 크고 작은 바람들을 빽빽이 채우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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