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학 2016.12
현대시학사 편집부 엮음 / 현대시학사(월간지)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 현대시학 2016. 12 Vol. 571

 

1. 신인상 논란으로 편집진 전원 사퇴 후 발간된 첫 달이라 지난 호보다 두께가 많이 얇다. 2017년 1월에 변화된 모습이 벌써부터 궁금한 잡지. 신작시 중 초반에 배치된 중견시인들의 시보다 후반에 실은 비교적 젊은 시인들의 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추상적이고 관념적 소재를 신선한 감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사색을 통해 화자(話者)가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해야 하겠다. 죽음, 영원, 희망··· 같은 단어를 튼튼한 기둥이나 뿌리 없이 단순한 단어 나열식으로 전개해 나가면 안 되겠다. 행과 행, 연과 연 사이 이미지나 의미가 맞물리며 전체적인 의미를 구조화해야 하는데 묘사나 진술에 그치거나 억지스런 느낌을 주면 안 되겠다. 산문시의 경우 소설처럼 어느 정도 서사가 있지만 소설과는 분명히 다른 리듬과 이미지의 변주를 항상 생각하자.

 

2. 메모

 

- 잘 가, 박지웅, 56쪽

 

여자의 혀는 정직하고 차가웠다

입에서 나오는 가장 낮은 온도 잘 가

마트에서 구입한 제품처럼 건넨 잘 가

나는 잘 가를 받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앞뒤 잘린 토막의 말

잘 가는 피가 빠지는 데 몇 달이 걸렸다

몇 달째 꿈쩍하지 않는 잘 가

가끔 이름을 불러보았으나

잘 가는 선뜻 나오지 않았다

고깃덩어리로 썩어가는 잘 가를

꺼내어 몇 번 삼키려 했으나

오래된 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냉장고는 온통 사후의 세계

나는 냉장고에 심장을 넣고 기다린다

내 혀는 아직 핏물이 덜 빠졌다

 

 

- 김경숙, 먼지력曆, 57-58쪽

 

먼지는 날짜에서 피어난 부피다.

 

혹 불면 날아오르는 먼지들은 날개들의 반대파이거나 꽃의 대역(代役)이다. 피어오르고 난 뒤엔 반드시 지는 일종이지만 우수수 지지는 않는다. 혹자는 가라앉지 못하므로 분한 마음일수도 있겠다.

 

깃털을 품고 있는 고요한 일습(一襲)일 것이다 평생 외출해 본 적 없는 가구들을 들어내면 살아진 날들이 켜켜이 소복하다.

 

외면과 방치 사이에 헐거워진 틈, 틈을 털어 내다보면, 툭 툭 날아오르는 자욱한 방위들이 놀라 한데 뒤엉킨다.

 

먼지력, 이보다 더 견고한 달력이 있을까

차곡차곡 시간을 넘어가는 초침 횟수 같기도 한

바닥을 벗어나려고 했던 침침한 날들이

부스러진 계절들 속에 들풀거미줄처럼 촘촘하다

 

너무도 헐거워서 날아가는 것조차 잊고 있는 먼지들, 그 시간의 허물이 날개의 부력이다. 오래되면 흐릿한 시야가 되고 마는

 

먼지는 사물이 벗어놓은 날짜다.

 

 

- 신영배, 비와 자매, 165쪽

 

비와 과 우산 하나

소녀와 소녀가 붙어서 간다

우산 밖으로 미는 장난을 한다

비와 나무와 우산 하나

동생이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

비와 장미와 우산 하나

언니가 장미 속에 빠진다

길과 우산 하나

소녀와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

언뜻 나타나

푸른

언뜻 나타나

붉은

물송이

소녀와 소녀가

우산을 높이 드는 장난을 한다

검은 하늘 속으로

나무와 장미와 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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