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민음의 시 166
서효인 지음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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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효인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 민음사, 2010



1. 감정이입하면서 읽은 시집이다. 시인은 1981년생으로 나와 동갑. 어렴풋하게 꼬마시절 최루탄 가스가 코를 찌르는 감각을 기억하고 1990년대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밀레니엄의 도래와 함께 대학생활을 시작한 나의 세대 시인의 시집.



1부(분노의 시절)에 나오는 오락실 오락 스트리트 파이터의 캐릭터들(용산의 가일, 중국집의 춘리, 이태원의 브랑카)가 반갑다. 시들이 내면의 세계보다는 일상 생활의 소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산문시들이 많다. 묘사보다는 진술이나 서사에 기반한 전개로 한 편의 짧은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제3부(단 하나의 사람)에 등장하는 군상들, 이를테면 ‘커피배달 레지, 뺑소니 당한 새벽의 미화원, 요실금을 앓는 중년, 신장을 팔려고 시도하는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그들은 아마도 "노래가 옮겨 심을 전 지구적 고통을 잇몸 속에 감춰 두었던 단 하나의 사람"「단 하나의 사람」일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에 태어난 시인이 나대신 기억하고 찍어둔 오래된 사진첩을 펼치는 기분으로 읽었다.



2. 메모

1부 분노의 시절

- 해로운 자세, 28-29쪽 부분

나는 섬과 섬 사이를 오다니는 바람의 멱을 잡아
웅크린 속에 가두어 놓고 책상다리에 무릎을 붙여
역마살이 도질까 시간을 뭉개고 앉는다
내 웅크린 자세의 원흉은
백지 위에서 매를 맞고 화를 내며 떠도는
외롬과 서룸의 활자들을 가까이 노려보기 위한 버릇,
역마의 버릇이다



2부 잭슨빌의 사람들

-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 38-39쪽 부분
* 조태일의 시「혼자 타오르고 있었네」에서


항문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옵니다. 당신의 등을 밀어냅니다. 그럼 이제 당신 차례, 꽃의 슬픈 유래나 강물의 은결 무늬에 대한 노래에 창문이 간질간질하던 당신, 구타의 음악 소리에 볼기짝이 꽃처럼 붉어져 혼자 타오르고 있던 당신*, 무거운 가방에 매달려 참고서를 완주하던 당신, 바로 당신. 붉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만국의 소년이여, 분열하세요. 배운 대로, 그렇게.


대한논리속독학원 : 대각선으로 읽히는 세상, 대각의 극점에서 주제가 아닌 문장들이 대각의 극점에서 비틀비틀 걸어오는 길목에서

아카데미속셈학원 : 그들과 마주칠 때 셈할 것. 발각되지 않게 속으로 조용히, 주제를 비켜나 맨홀로 흐르는 친구들을 모아

민족사관논술학원 : 적의 공용된 논리를 귀로 듣고 밑으로 쏴 버릴, 발칙한 엉덩이를 흔들어 단련시켜 룰루랄라

슈베르트음악학원 : 누추한 음계를 타고 오르며 참혹해진 리듬, 바이엘과 체르니를 교미시킨 자랑스러운 불협화음 속으로

엔터정보전산학원 : 스스로를 복제하는 수천 가지 자격증을 가진 포부 당당한 이중간첩, 그의 예민한 촉수처럼

우리학교야자시간 : 수레바퀴의 빈틈에 덕지덕지 달려들어 주제들의 세상을 혼내 줄 시간, 휘영청 휘영청 마음껏 변신할 것, 양껏 분열할 것.

생뚱한 바람이 거대한 치마를 들어 올려 아이스크림 한 입 베어 먹기 전까지 우리의 항전은 끝나지 않아요. 근엄한 얼굴로 인생의 진리를 논하는 정규군의 향연에 더 이상 뒤를 대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요. 부릉부릉 분열하는 파르티잔들이 습격을 거듭하는 이상한 트랙에서, 소년들이여, 등에 누운 참고서 아래에 붉고 뜨거운 바람의 계곡을 기억해요. 그리고 궐기해요. 배운 대로, 그렇게, 뿡.



- 잠자는 감자 42-43쪽

현장의 점심, 빨간 태양 아래 빨간 벽돌을 나르던 빤한 얼굴의 사내 벌겋게, 잔다 정오의 디제이는 희망곡을 배달하고 배달된 자장은 희망을 모른 채, 분다

지구의 자장(磁場)이 연주하는 그의 코

현장의 그늘이 오므라들자 그는 배꼽에 다리를 모았다 이윽고 눈꺼풀을 들려 할 때, 그는 감자가 되었다 이미 코에 싹까지 돋은 푸른 감자, 염병할 콧구멍이 어째 간질간질 하더라니, 지구는 복지부동 차렷 자세, 돈다

지구의 미장을 마무리하는 감자의 싹

그는 그냥, 잔다 진동하는 코에서 뻗는 감자의 싹이 무럭무럭 지구를 감싼다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에 잠들어 있던 사내의 쉰 넘긴 솔라닌이 싹을 피운다 도망간 마누라년과 건방진 십장 놈이 싹싹 빌어도, 소용없다

지구를 리모델링하는 감자의 독

푸른 감자가 코고는 소리 싹을 키우고, 둥근 지구를 삼키고 뒤척이는 그의 잠결, 거대한 싹들이 지구를 짜부라뜨려도, 현장이 무너져도, 타일 자루가 그를 덮쳐도,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도 지구는, 돈다

현장에서 발견된
잠자는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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