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 제3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06
기혁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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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 민음사, 2014
#기혁 #모스크바예술극장의기립박수

1. 제1부 파주의 표제작 파주(坡州) 15쪽
- 유년의 레옹 베르트에게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면/택배 상자 속 대기가 궁금해진다//노을이 질 때마다/구름의 살결을 보면서 날씨를 매만지던 시절이/책의 사위에도 일렁이는 것이다//별똥별의 군락지를 가슴에 품은 채 바람을 탔다던 아버지,/대기가 없는 달의 중력을 가정하며 나보다 꼭 6분의 1만큼 가벼운 생애를 살았던//내 외로움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어둠이다/근본 없는 혁명은 내내 과거의 혈육을 찾아가는 것,// ...... 타인의 우주를 받아 든 사람들은 사막을 표류하는 비행사를 떠올립니다 더러는 지구에 없는 암시(暗示)를 읽기도 했지만 직육면체의 밤하늘에 공전을 계속할 에움길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지리학자의 별을 지나 도착한 일곱 번째 행성에서 어둠은 그저 낮의 그늘일 뿐이었고 그런 나의 자괴를 사랑이라고 다독거리던 옛 애인은 어린 왕자를 모던 보이라고 단정 짓기도 했지요 주변을 더듬어 자신의 어둠을 울어 줄 누군가를 찾는 것이 교양이라면 한평생 우주를 곁에 두었던 엄마의 교양은 인공위성이 틀림없습니다
(중략)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던 양은 그 안에 있어.




당신이라는 낮달은 잘못 나온 것이 아니라 너무 얇은 파본이었을지 모릅니다 조심조심 이불 속에 웅크려 택배 상자를 개봉하면 비좁은 우주를 품은 천막(天幕)이 고갯길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고갯길이 많은 동네를 파주라고 부르던 슬하가 슬퍼지는 것은 옆자리의 어둠으로 밤낮을 구분해 온 당신의 일생 어딘가 파주의 풀을 뜯던 양들이 자욱하기 때문일 겁니다 누구에게나 펼치치 못한 페이지가 있고 제목으로 알 수 없는 독서가 있습니다 문맹의 꽃들에게 붙여진 꽃말은 자궁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지구의 첫울음을 닮았습니다





: 우선 제목을 보자. ‘파주’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파주 아울렛’과 ‘파주 출판도시’다. 1연과 2연에서 택배 상자에 놓인 책과 상자 속 대기는 친숙한 연상이다.
이 시(詩)의 제목 밑에 ‘유년의 레옹 베르트’에게 바치는 시라고 적혀 있다. 생택쥐페리가 독일 나치의 프랑스 점령 이후에 미국으로 망명해 프랑스있는 유대인 친구 ‘레옹 베르트’를 위로하기 위해 쓴 소설이 ‘어린 왕자’다. 제목과 부제에서 어린 왕자와 책이라는 힌트 카드를 들고 시를 읽어나간다.



3연,4연에서 “별똥별의 군락지를 가슴에 품은 채 바람을 탔던 아버지”를 “어둠”이라고 밝히는데 어둠은 우주를 상징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안에 있는 어둠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상자 속 대기에서 어둠을 떠올리고 어둠을 우주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후 어린왕자의 내용에서 모티브를 딴 서술, 소설 ‘어린 왕자’에서 왕자는 나에게 양을 그려 달라고 보채고 나는 사양하다가 상자를 그린 후에 “이건 상자야. 네가 원하던 양은 그 안에 있어”라고 말한다. 당신이 진정 원했던 것은 상자 안, 당신 내면의 우주에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어디까지나 이 시에 대한 나의 해석일 뿐.








2. 다음으로 소개할 시는 이 시집의 표제작인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다. 42쪽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소나무가/허공으로 뿌리를 내밀자,/지상도 지하도 아닌 나라가 생겨났네.// 그 나라 시민들은 블랙 러시안이나/화이트 러시안의 표정을 지으며/허공에 허파를 만들고/심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네.// 몇 번의 눈사태와 크리스마스가/달궈진 아스팔트 아래 묻히는 동안,/독재자를 연기하는 배우를 지도자로 추대하기도 했네.// 그 나라 모든 병명은 비유였으므로/의사는 처방전 대신/시를 적어 내밀곤 했지.// 엘리베이터를 천사라고 부르게 된 건/그 나라의 돌림병 때문이었네만/하늘을 나는데/꼭 혁명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네.// 천사를 타기 위해 필요한 중력을/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마련했고/그것을 적분해/사랑이라 부르기도 했었네.// 떠돌이 악공의 견가가 끝나 갈 무렵/+에서 -로 전류가 흐르는 건 기타 줄만이 아니었다는군.// 잊었는가? 소나무가 뿌리내린 곳에는 사철이 없다는 걸 말일세.// 여름이 끝나고 드라마가 찾아오고 있다네./ 천사가 지나간 자리는 모두/그들의 박수일 따름이었네.





: “자동차 트렁크에 실린 소나무”는 나무의 본래 구실을 하지 못한다. “몇 번의 눈사태와 크리스마스가 달궈진 아스팔트 아래 묻히는 동안”은 러시아가 1980년대 후반에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추진하며 서방세계에 문을 열기는 했다. 그러나 정치체제는 여전히 독재자로 평가받는 푸틴의 수하에 있다. 고질적인 병의 명칭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는 부조리한 세계, 뿌리가 허공을 향한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사랑과 희망의 발견을 위해 애쓴다.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는 왼손과 오른손이 포개지는 기도다.






2편의 시만 소개했지만, 기혁의 시는 어렵다. 몇 번을 읽어도, 뒤쪽의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읽어도 선뜻 이해가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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