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을 주는 일 모악시인선 3
문신 지음 / 모악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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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2019년 3월 21일, 비가 내리는 춘분

소설을 읽는데 '우산은 죽음을 뜻한다'는 취지의 문장을 보았다.

우산은 왜 죽음일까, 생각했다.

우산이라는 존재는 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사물인데,

내리는 비, 물의 속성이 죽음이기 때문일까

휴대폰 메모장을 열고 '죽음이 내린다'고 적었다.

대지의 닫힌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죽음

노인의 손등에 펼쳐진 검버섯은 우산 같다.

우산을 쓰고 최대한 막아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나도 모르게

젖는 부분이 있다.

비가 바람을 만나 죽음을 재촉한다.

오늘밤에는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죽음을

생각하기로 한다.







- 구작(舊作) 13쪽

모과나무를 보면 모과나무 그림자에게도 세금을 매기고 싶다

세리(稅吏)가 되어/ 모과나무 그림자를 주시하다가 모과꽃 피면 빨간 딱지를 붙이고는/ 내내 그늘에 주재하고 싶다

모과의 진을 빼듯 그늘을 뒹굴면서/ 하, 모과 생긴 것들을 쓰다듬어도 보고/ 눈썹 씰룩이며 처녀애 곁내음 같은 풋내도 맡아 보고/ 호시절을 닦달해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모과는/ 세 번 퇴고한 옛날 원고처럼 아프게 익어가겠지

탄환처럼 관통하는 가을을 홀로 기다려/ 나는/ 썼다가 지운 문장처럼/ 서러운 모과 몇 개를 징수할 것이다



- 곁을 주는 일 42-43쪽

횟집 주방장이 칼날을 밀어 넣고 흰 살을 한 점씩 발라내고 있다

무채 위에 흰 살이 한 점 얹히고 그 곁에 원래인 듯 흰 살 한 점이 또 얹힌다

곁을 주는 일이 이렇다 할 것이다

애초에 한 몸이었다가 홀연 등 떠밀린 것들/ 이만큼/ 살 부비고 싶어지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 애인이여/ 우리 헤어져/ 둘이 되어도 좋을 일이다

생살 찢는 아픔을 견디며 살이 살을 부르는 그 간절함으로

저만치서 오히려/ 꽉 채우는/ 그/ 먼 가까이를 곁이라 해도 좋을 일이다







- 중년 무렵 70-71쪽 부분

늦은 밤 불 켜진 집들을 보면 중년이라는 말이 참으로 캄캄하다는 생각 (중략)

어두울 때 가장 밝아서 외롭다는 두 시에서 네 시 사이, 잔기침의 기척도 없는 중년의 시간

늦은 밤이면서 이른 새벽 무렵이라고, 어중간하게 ‘무렵’이라는 중년의 사내들처럼 소스라치지 못하는 어둠

하루하루 화석이 되어가는 중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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