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곁을 주는 일 ㅣ 모악시인선 3
문신 지음 / 모악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2019년 3월 21일, 비가 내리는 춘분
소설을 읽는데 '우산은 죽음을 뜻한다'는 취지의 문장을 보았다.
우산이라는 존재는 비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사물인데,
휴대폰 메모장을 열고 '죽음이 내린다'고 적었다.
대지의 닫힌 문틈을 비집고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죽음
우산을 쓰고 최대한 막아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나도 모르게
오늘밤에는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죽음을
모과나무를 보면 모과나무 그림자에게도 세금을 매기고 싶다
세리(稅吏)가 되어/ 모과나무 그림자를 주시하다가 모과꽃 피면 빨간 딱지를 붙이고는/ 내내 그늘에 주재하고 싶다
모과의 진을 빼듯 그늘을 뒹굴면서/ 하, 모과 생긴 것들을 쓰다듬어도 보고/ 눈썹 씰룩이며 처녀애 곁내음 같은 풋내도 맡아 보고/ 호시절을 닦달해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모과는/ 세 번 퇴고한 옛날 원고처럼 아프게 익어가겠지
탄환처럼 관통하는 가을을 홀로 기다려/ 나는/ 썼다가 지운 문장처럼/ 서러운 모과 몇 개를 징수할 것이다
횟집 주방장이 칼날을 밀어 넣고 흰 살을 한 점씩 발라내고 있다
무채 위에 흰 살이 한 점 얹히고 그 곁에 원래인 듯 흰 살 한 점이 또 얹힌다
애초에 한 몸이었다가 홀연 등 떠밀린 것들/ 이만큼/ 살 부비고 싶어지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니 애인이여/ 우리 헤어져/ 둘이 되어도 좋을 일이다
생살 찢는 아픔을 견디며 살이 살을 부르는 그 간절함으로
저만치서 오히려/ 꽉 채우는/ 그/ 먼 가까이를 곁이라 해도 좋을 일이다
늦은 밤 불 켜진 집들을 보면 중년이라는 말이 참으로 캄캄하다는 생각 (중략)
어두울 때 가장 밝아서 외롭다는 두 시에서 네 시 사이, 잔기침의 기척도 없는 중년의 시간
늦은 밤이면서 이른 새벽 무렵이라고, 어중간하게 ‘무렵’이라는 중년의 사내들처럼 소스라치지 못하는 어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