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자 - 여자의 물건이 의미하는 것들에 관해
도현영 지음 / 버튼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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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 all ears.

 

 

  너는 노크를 한다. 잠 못 이루는 이의 문 앞에 서서. 문이 열리면 꿈속에서 삶을 리셋할 수 있을 것 같다. 꿈의 고향은 잠이다. 꿈은 고향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고향에서 직장을 얻고, 고향 사람과 결혼해, 고향을 닮은 아이를 낳았다. 고향에서 너는 주인의 아들을 죽여 쫓기는 노비, 펄을 뒹구는 축구선수였고 몇 번 말을 섞지도 않은 중학교 동창을 만나 밤새 술을 마셨다.



  숙몽(熟夢)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너는 일기를 쓴다. 증발하기 전에, 겪은 사물과 사람과 사건, 그 시각(時刻)과 잔상을 스케치한다. 언제나 흐릿하다.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귀갓길에 흘려버린 것이 지금까지 파먹은 귀지만큼 많다. 꿈은 예비할 수 없다. 대비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출발해야 한다. 꿈의 여정에서 네가 겨우 손에 쥔 것은 긴 밤과 감은 눈과 열린 귀다.



  너는 책상에 앉아 있다.요즘 여자라는 낯선 책의 문을 두드린다. 블랙 앤 화이트의원피스를 벗기니 오십 가지 사물들이 백수(百手)를 펼치고 맞아들인다.요즘 여자가 말하고 네가 받아 적는다. 말하지 않아도 너는 받아 적는다.



 

  I'm all ears.

  나는 귀다, 그리하여 나는 존재한다.

 



요즘 여자가 궁금하다. 묵혀 두었던요즘 여자의 말을 수면 안대를 쓰고 듣는다. 눈은 감기지만 귀는 점점 자란다. 귀가 몸을 잡아먹는다.요즘 여자가 더 잘 들린다. 들이고 내쉬는 숨소리, 이 가는 소리, 코고는 소리, 손 비비는 소리, 입 꼬리가 올라가는 소리, 상하좌우로 눈동자를 굴리며 표정을 살피는 소리까지 다. 엄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지 않는 아이의 눈빛과 원어민의 발음을 따라 중얼거리는 취업준비생의 그림자도. 나는 잠귀가 밝지 않아도, 말귀는 용케 알아듣는다.요즘 여자가 말을 걸어주면 나는 꽃이 아니라 귀가 된다. 달팽이처럼 천천히 귓바퀴를 굴리며 외이(外耳)에서 내이(內耳)로 진입하는 오십 가지 사물들. 귓불을 꼬집어도 이미 늦었다.



  그녀의 백팩이 궁금하다. 인터뷰어로서 인터뷰이를 만나러 갈 때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백팩을 맨다는 그녀. 구두점을 또각또각 찍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자세가 궁금하다. 나도 백 팩이 있다. 검은 백 팩이다. 책 몇 권, 오래 쓴 필통, 미세먼지용 마스크, 포스트잇, 이어폰, 장갑이 엷은 빛을 발하며 어둠 속에서 손길을 기다린다. 그녀의 말처럼 백 팩은 두 손의 자유를 내게 허락했고(thumbs up), 나 스스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걸을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든든한 사물이다.요즘 여자덕분에 주변 사물의 온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노란색 가름끈을 페이지에 잘 묻어두고, 실비가 내리는 길을 걷고 있다. 확성기를 끄고 소음기(消音器)를 켠다. 광부가 머리에 두르는 헤드램프를 끼고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지면이 발을 밀어낸다. 귓바퀴는 멈추지 않는 팽이처럼 구른다. 다른 차원에 점점 다가간다. 달뜬 마음으로 너를 만나러 간다. 잠 없는 꿈과 꿈 없는 잠이 새벽 세 시 시계탑 앞에서 만난다. 잠의 베개를 빌리지 않고도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I'm all ears. 나는 귀다. 나는 열려 있다

  I'm hearing for years. 나는 일생 듣는다.

  I'm here. 그리하여 나는 여기 존재한다.

  I'm yours. 나는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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