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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전선 1
후지카와 카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1. 고2 시절이라는 것-달팽이 예비군
와카모리 아사코는 고2. 학기 초에 그만 짝사랑에 돌입, 그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중인 여학생. 대상은 순진 무구한 미소의 소유자, 학교 육상부의 사쿠라. 운동장에서 연습 중인 사쿠라를 바라보는 일이 아사코의 하교길 즐거움이다. 그러던 중 마치 허물인 것처럼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 위를 기어 가는 달팽이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그 달팽이는 학교의 꽃인 카지와라 아츠시였다. 그는 과스트레스 상태가 되면 달팽이로 변신하는 이른바 멀티 인간. 사쿠라와 같은 육상부원으로 성적 우수, 스포츠 만능인 아츠시에게 단 하나의 핸디캡이 있다면 바로 연체동물로 변신하는 그것이었다. 그로부터 아사코는 달팽이 헬퍼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 바람에 아츠시의 단짝 친구인 사쿠라와도 친구가 되지만 문제는 너무나 민감한 아츠시와 너무나 둔감한 사쿠라 사이에 끼이게 됐다는 것. 아니 그보다는 사쿠라에게 가는 과정에 아츠시라는 섬세하고 민감하고 생각도 많고 게다가 아사코를 그지없이 좋아하는 달팽이가 곁에서 꼼지락거리게 되었다는 것. 그들의 섬세한 고교생활이 담담하게, 그러나 쉽게는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게 그려지는데.
첫사랑이 있는 시절이라고 해야 되나, 저도 모르게 '내가 왜 이래~~~!' 하게 되는 그 시절을? 그 시절이, 어디에도 속한다 단정지을 수 없는, 일본과 우리 나라의 특수한 상황, 고2 시절이 이 만화 안에서 달팽이 예비군으로 구현된다. 특별히 동감하는 바는 그 시절의 미묘함인데. 프레쉬맨으로서의 흥분도 가라앉고 그러나 아직은 수험생의 마음가짐만은 아니어도 되는, 절대로 그렇게는 안 되는 시절. 갑자기 커버리는 시절이자, 절대고독이라는 생경한 인간의 영역에 발목을 잡히게 되는 순간이 있는 시절. 그래서 그 시절만큼 인생에 절대적 영향을 주는 때도 없는 고2. 사실은 고등학교 선생을 하면서 그 여름에 자기 앞날을 결정짓는 학생들을 심심찮게 봤었다. 그래서 이 만화에 각별한 애정이 부어지는지도. 그리고 달팽이가 되어 버리는 아츠시가 그 시절을 그야말로 리얼하게 살아가고 있는 소년으로 보이는지도.
결국 나 자신으로 돌아와 보면.....
과연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던가? 사랑에 빠졌었나? 아니면 어떤 결단을 내리기라도 했던가? 과연 나는 좌충우돌했던가?
<회상모드 on ――――――――――――!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그 길과 그 옛 궁궐의 정원과 조용한 평일의 나무들이, 길가에 늘어선 찻집과 커다란 돌로 지어진 화랑들이 떠오른다. 그것들은 모두 지금보다 이십 년 정도 젊은 채다. 열 여덟 살인 주인공들처럼 기억 속 그 때의 나도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왜 그 길을 걷고 있었을까.
지금도 내 기억 속의 그 길은 가을 속으로 뻗어 있다. 노란 은행잎과 말라서 주글주글하고 어떤 것은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스러진 플라타너스 잎들이 그 길 위를 바람을 타고 구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예삿길 같지 않은 넓은 보도는 다른 한편의 기억으로는 항상 깨끗하고 밝은 회색빛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택한 길이 항상 가을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회색빛 길은 자꾸 가을 속으로만 들어가 버린다.
나는 언제 주로 그 길을 찾아갔을까.
학교가 일과를 마쳐야 교문이 열렸다. 그것은 언제나 까맣거나 아주 짙은 흑록색이었다. 그 교문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길게 구부러지는 내리막길을 백여 미터 걷다 보면 왼쪽으로 84라는 번호를 전후좌우에 찍은 시내버스의 회차 지점이 보였다. 당시의 내가 절대 탈 일이 없었던 84번 버스. 대개는 길게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보였지만 어쩌다 가끔, 곧 길을 떠나려는 버스가 그 사람들을 가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띌 때가 있었다. 나는 내 발이 그 쪽으로 방향을 트는 힘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무엇’에나 홀린 듯 돌연히, 마치 습관처럼 당연하면서도 예사롭게 나는 줄 선 사람들을 가리고 선 그 버스를 향해 뛰어가서 사람들의 행렬 끝에 섰다가 그들을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한강을 건너 버스가 용산을 지난다.
집과는 반대 방향. 그 때 서울에서 이십 년째 살고 있던 나의 부모는 일 년에 딱 한 번, 그 길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 기억은 흑백사진 한 장 속에 정확한 형태로 남아 있다. 어린 날의 어린이날. 그 사진 속의 나는 풍선을 들고 창경원 넓은 뜰에 서있다. 이 만화를 읽고 있는 지금으로 따진다면 삼십 년 전의 일이다. 풍선은 하얗게 내 머리의 오른쪽 허공에 박혀 있다. 고궁의 전문 사진사가 찍은 그 사진 속의 우리 가족은 모두 마치 무대화장을 한 사람들처럼 이목구비가 정교하다. 그 안에서 우리가 웃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 나지 않는다. 사실은 웃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때라면 분명 집 안에 웃음이 있었는데, 다른 자리에서, 다른 시간 위에서 우리 가족을 떠올릴 때면 그 웃음이 기억 나질 않는다. 왜일까?
내가 열 여덟의 나이에 혼자서 평일 오후의 고궁을 찾았던, 막 떠나려고 하는 버스를 보면 꼭 타고 같이 길을 떠났던 그 이유와 같은 것일까?
옛 왕들의 놀이터 겸 산책로였다는 화강암으로 만든 길이 둘러싸고 있는 호수, 그 위에 떠 있는 물풀과 수련 잎, 따로 입장료를 내야 하는 박물관.. 그것들을 바라보며 열 여덟 살의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무의 초록색으로 위장한 조악한 시멘트 벤치에 앉아 수백 년을 자라온 나무들과 모서리가 관록으로 으깨진 석탑을 바라보며 내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러나 그것은 단지 형상일 뿐이다. 그 때의 내게는 ‘어디’로부터 혹은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욕구도, 강박감도, 위기의식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불완전한 형상으로, 분위기나 느낌으로만 기억해낼 수 있을 뿐, 아직까지도 고유의 의미를 부여받으려고 대기하고 있는, 일종의 괄호와도 같은 무의미한 실존일 뿐이다.
내가, 버스를 타고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내가, 커다란 박물관에 들어가 두어 개씩의 전시실을 학자처럼 유심히 관람하고 있다.
내가, 경회루 호숫가에 이젤을 세우고 묽은 수채물감을 찍어 바르는 화가의 굵은 붓끝을 바라보며 멈춰서 있다.
내가, 밝은 햇살과 떨어진 나뭇잎들을 잠깐 휘젓다 사라지는 바람이 있을 뿐인 황량한 고궁의 넓은 정원에 서있다.
내가, 고궁의 여기저기에서 걸어 나온 몇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폐궁 시간임을 알리는 확성기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궁 문을 나서고 있다.
내가, 아직도 햇살이 눈부신 고궁의 문을 올려다 보고 서있다.
내가,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려고 세종로 큰길을 걸어가고 있다.
내가, 검은 감색 교복을 입고 칠 킬로그램 정도의 책가방을 들고 있다.
내가, 버스에서 내려 경인국도 그 넓은 도로를 횡단해 흰 연탄재가 넘치는 쓰레기통들이 집 앞 대문 마다 마다에 놓인 동네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내가, 부근의 다른 주택들보다는 그래도 페인트의 유광이 조금은 더 남아있는 짙은 초록색 대문 앞에 서있다.
내가 어딘가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타는 버스는 나를 경복궁 앞에 내려 주었다. 서울 외곽에는 호젓하게 혼자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부랑배들을 두려워 했다. 학교에서조차 사색이나 고뇌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은 단선적이고 즉흥적이고 폭력적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때, 오솔길에서 만날지도 모를 부랑배들은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치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도시외곽의 오솔길이 아닌 도시 한가운데의, 은밀하게 조종되고 감시되는 조용한 고궁을 선택한 것이다. 그 곳에는 새와 나무와 호수, 수초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주시할 시간도 뜻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러했음을 안다. 나는 그 방임의 절제된 뜰이 좋았다. 방임의 절제된 뜰. 여기, 조용히, 한가하게, 내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아무도 오지 않는, 아무도 나를 간섭하지 않는, 내 집같은.
――――――――――――― 회상모드 off>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시절에. 그 고궁에 있던 내 시간들이 지금의 나에게 와서 어떤 무늬로 자리하는지 지금도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집으로 가는 길을 거슬러 고궁을 혼자 찾아간 것이 달팽이 예비군의 또 다른 양상은 아니었을까? '그 때'란 그저 내게 '일종의 괄호와도 같은 무의미한 실존'일 뿐이지만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자기만의 양상에 대한 해석이 한 줌이라도 있다면 확실히 그 사람은 혼자라는 것에 면역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 자기만의 양상 속을 헤매어 본 사람이라면 혼자임을 견디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것. 그 시기가 바로 열 여덟 살 속에 들어 있다. 그래서 그 시절은 인생에 있어서의 아주 중요한 전기이자 황홀한 여백인 것이다.
그 시기를 생각하게 하는, 지금도 그 시기를 어떻게 견디고 극복했었는지를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달팽이 전선>은 또 하나의 세상을 펼쳐 보인다. 마치 추억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는 듯이.
2. 사람 마음의 결을 느끼는 재미
그들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아츠시는 아사코가 참으로 마음에 들지만 아사코는 친구인 사쿠라만을 좋아한다. 전형적인 삼각 관계. 단정지어 보자면 그렇다. 그러나 그 관계의 전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지겨움이 깃들 틈새가 없다면? 과연 어떻게 그려지길래?
감정의 파고를 간단히 누를 수 있는 아사코와는 달리, 감정의 파고 자체를 쉬이 느끼지 않는 사쿠라와는 달리, 아츠시는 그 감정의 파고라는 것에 따라 몸이 변해버릴 정도다. 이 아이의 마음 속은 안도와 불안 속에서 늘 시계추처럼 흔들리는데. 그 파고의 촉매자이자 그 파고의 종결자인 아사코가 여전히 자신이 곁에 있어 줄 것임을 선언해도 아츠시는 혼자서 불안하다. 그는 가끔, 앞날이 몹시 불안한 연체동물인 것이다. 그 반면 아사코는 혼자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 친구 후미가 있고 사랑하는 사쿠라가 있고 같이 있어줘야 할 아츠시가 있으며 의지할 수 있는 키이치라는 아빠같은 사촌 오빠가 있다. 묻고 대답하고 실천해 가면서 아사코의 나날은 지나간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걱정이 많고, 아츠시가 달팽이로 변한다는 것을 알고도 받아들이는 포용력의 소유자, 아사코와 같이 있을 때 아츠시는 편안하다. 그리고 불안하다. 아사코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리고 현재 아사코는 아츠시가 아닌 사쿠라를 좋아하고 있다. 아츠시에게 아사코는 가 닿을 수 없는 cozy nest인 것이다. 그들은 과연 한 곳에서 만나지게 될까? ^^;;
<달팽이 전선>의 매력은 사쿠라만 바라보는 아사코에게 아츠시가 다가가는 해프닝들을, 아사코가 사쿠라에게 다가가는 해프닝들을, 둘 다 잃고 싶지 않지만 그 속에서 결국 갈피를 잡아야 하는 사쿠라의 몇 안 되는 해프닝들을 처리하는 작가의 각고에서 발견된다. 삼각관계라는 전형적 재료의 식상함에 낚일 만큼의 여유가 없어진다. 대사나 독백 하나 하나가 깊은 사고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이해하고 넘어가기 힘들다. 그것은 그만큼의 각고가 숨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진전되는 단계마다 멈추지 않을 수 없는 컷들이 시선을 잡아 끈다. 그리고 조용히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드러난 마음의 결을 음미하게 한다. 독자를 그렇게 만드는 것은 작가가 인물들 마음의 결을 아주 세세하게 건져 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말풍선 바깥의 글들을 읽고 있다 보면 어느새 그 인물의 마음 속을 헤집고 다니게 된다. 이런!
출판만화가 아니라면 드러내기 아려운 효과가 완벽하게 드러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말풍선 바깥의 말에서 한껏 멈춰 서있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야기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 동여매 주는 문자의 위력이 있는 것이 바로 출판만화 아닌가? 나는 그래서 에니매이션보다 출판만화를 선호한다. ^^ 출판 만화에선 사람 마음의 결이 정말 천진난만하게 드러난다. 결코 넘치지 않는 문자의 매력. 과장되고 왜곡된 만화적 표정 속에서 삶의 포커스를, 그림 속 표정이 감춘 것을 읽어 주는 말풍선 바깥의 말에서 그 삶의 리얼리티를, 설명이나 비유없이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은 이야기의 끝점에까지 나름의 진화를 해가는 것이다. 그 진폭의 놀라움이라니.. 가끔 가슴까지 두근거리게 하는... 그것이 풍부한 <달팽이 전선>이라 평가한다면 좀 과도할까? 그림체의 엉성함을 가리는 그 고운 결을 느끼는 데엔 <달팽이 전선>에 부족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효과를 즐기는 데에 <너버스 비너스>가 더불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고!
덤!
느린 달팽이의 사랑
유하
달팽이 기어간다
지나는 새가 전해준
저 숲 너머 그리움을 향해
어디쯤 왔을까, 달팽이 기어간다
달팽이 몸 크기만한
달팽이의 집
달팽이가 자기만의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먼 곳의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걸
그가 잘 알기 때문
느린 열정
느린 사랑,
달팽이가 자기 몸 크기만한
방 하나 갖고 있는 건
평생을 가도, 멀고먼 사랑에 당도하지 못하는
달팽이의 고독을 그가 잘 알기 때문
유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