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 마당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다
저녁 종소리를 들었다
직장 문을 나서며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량들
시간을 다투듯 급하게 걸음을 떼거나
신호등 앞에 멈추어 서서 초조해하고 있는 사람들
머리 위를 지나 아스팔트에 깔리는 종소리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이가 없는 도시 한복판을
떠돌다 사라지는 성당의 종소리
그렇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누군가 이 소리 듣고 마음이 움직이거나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 분명히 있으리라 믿으며
울리는 소리가 반드시 있다
반드시 이 소리 듣는 이 있으리라 확신하며
막막한 허공으로 떠나보내는 소리가 있다
그렇게 매일 종을 치는 사람이
                                                     <슬픔의 뿌리>

도시와 종소리는 안 어울리는 것 같다. 종소리는 꼭 산천과 농토 위를 울려퍼져야만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도시에도 사람은 살고 있고, 희망 역시 존재하는 것. 이 속에도 '숨은 도인'은 많다. 도를 구하고, 사랑을 찾으면서 자기 그림자를 뒤돌아보며, 혹은 달팽이처럼 느릿한 걸음으로 사물을 살피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 우리는 듣는 이 없어보일지라도 매일 종을 치는 종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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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는가 싶더니 황사가 또 하늘을 덮습니다
세월 흘러도 늘 푸른 염결과 지조를 지닌 그대여
나는 그대가 이 봄에는 정향나무처럼
사람 사는 동네에도 뿌리내리기를 바랍니다
설한풍에도 변치 않던 그대 굳건함 믿는 만큼
훈풍 속에서 짙고 부드러운 정향나무처럼 살아도
그대 변치 않을 것임을 나는 믿습니다
소나무는 지나치게 우뚝하고 단호하여 근처에
다른 수목들이 함께 살기 힘겨워합니다
없는 듯 있으면서 강한 향기 지닌 정향나무는
사람의 마을에 내려와 먼지 속에 살면서도
저 있는 곳을 향기롭게 바꿀 줄 압니다
그런 나무처럼 당신도 낮고 깊은 향기로
사람들 사이에 꽃피기 바랍니다
지금 쓸쓸하고 허전하지만 우리가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은 그대들 때문임을 압니다
그대들이 골목골목 꽃 피어 세상이 풍요롭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 속으로 내려온 철쭉도 민들레
조팝나무도 내심으론 다 기뻐할 것입니다
                                                     <슬픔의 뿌리>

 

먼지 날리는 세상 속에서도 의연히 자기 향을 잃어버리지 않는 정향나무. 정향(丁香)이라고 나와 있다. 먼저 저 있는 곳을 향기롭게 바꾸기 전에 자기자신이 늘 향기로운 나무. 소나무의 의연함이 필요하던 시대는 설한풍의 시대였나? 이제 훈풍 속에서 오래오래 꽃피우는 시기가 되었나? 골목 속에 산다는 것이 더 힘든 시대라는 것은 살아보니 알겠다. 일상의 힘은 참으로 거대하다. 생활의 발견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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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꽃은 집니다
흐르는 강물에 실려 아름답던 날은 가고
바람불어 우리 살에도 소리없이 금이 갑니다
사시사철 푸른 나무로 살고자 하던 그대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대에게 꽃 지는 날이
찾아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대 이기고 지고 또 지기 바랍니다
햇살로 충만한 날이 영원하지 않듯이
절망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가지를 하늘로 당차게 뻗는 날만이 아니라
모진 바람에 가지가 꺾이고
찢겨진 꽃들로 처참하던 날들이
당신을 더욱 깊게 할 것입니다
슬프지만 피었던 꽃은 반드시 집니다
그렇지만 상처와 아픔도 아름다운 삶의 일부입니다
                                                                 <슬픔의 뿌리>

꽃이 지는 일이 슬픈 일인가? 그렇다. 단풍이 지는 것이 슬픈 일인가? 그렇다. 바람에 날리든, 저절로 떨어지든 꽃이 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따스한 봄날은 가고 무더운 여름, 싸늘한 겨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처참하던 날의 상처가 나를 깊게 할 것인가? 모른다. 처참함이 삶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긴 하지만 삶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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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을 오르며

                                                                        도종환
산을 오르기 전에 공연한 자신감으로 들뜨지 않고
오르막길에서 가파른 숨 몰아쉬다 주저않지 않고
내리막길에서 자만의 잰 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평탄한 길에서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잠시 무거운 다리를 그루터기에 걸치고 쉴 때마다 계획하고
고갯마루에 올라서서는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두 갈래 길 중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당황하지 않고
나무가지 하나도 세심히 살펴 길 찾아가게 하소서

늘 같은 보폭으로 걷고 언제나 여유 잃지 않으며
등에 진 짐 무거우나 땀 흘리는 일 기쁨으로 받아들여
정상에 오르는 일에만 매여 있지 않고
오르는 길 굽이굽이 아름다운 것들 보고 느끼어

우리가 오른 봉우리도 많은 봉우리 중의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가장 높이 올라설수록 가장 외로운 바람과 만나게 되며
올라온 곳에서는 반드시 내려와야 함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산 내려와서도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슬픔의 뿌리>

 

산을 오르는 것을 인생에 비유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이 짧은 시 안에도 그와 같은 이치가 가득하다.  인생의 메시지가 각 행마다 들어있다. 들뜨지 말며, 주저않지 말며, 조급하지 말며, 게으르지 말며. 누가 이런 인생의 함정들을 그냥 비껴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다 결점투성이인 사람들이다. 다만 인생의 이치를 제대로 알게 되면 그런 구덩이들에 빠지지 않고, 큰 상처 입지 않고 길을 갈 수 있지 않겠나. 내가 지금 마음에 쏙 드는 구절은 '산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라는 구절이다. 인생은 한번 뿐이라는 사실을 늘 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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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 꽃나무

                                                      도종환
꽃 피던 짧은 날들은 가고
나무는 다시 평범한 빛깔로
돌아와 있다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들과
나란히 서서
나무는 다시 똑같은 초록이다
조금만 떨어져서 보아도
꽃나무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된다
그렇게 함께 서서
비로소 여럿이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고
마을 뒷산으로 이어져
숲을 이룬다
꽃 피던 날들은 짧았지만
꽃 진 뒤의 날들은 오래도록
푸르고 깊다
                          <슬픔의 뿌리>

그렇군. 꽃피는 시절은 기껏해야 나무의 일년에서 몇 일일까? 손에 꼽을 정도의 나무도 있고, 몇달을 쉼없이 피는 나무도 있다. 대부분의 나무는 보름 안쪽의 기간 동안만 꽃을 피운다. 그리고 꽃잎을 날린다. 그 동안에 벌이며 나비들이 모여들어서 수정을 하고, 열매를 맺는다. 나무는 푸른 잎을 달고 몇 달을 난다. 그 시절도 끝나면 잎을 떨어뜨리고 열매도 떨어뜨린다. 곧 겨울이 닥친다. 잎지는 나무들은 온통 잎을 떨어뜨린채 벌거벗은 겨울나무로 추운 시절을 지낸다. 나무처럼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꽃피는 날들은 짦고, 초록의 시절은 긴' 것이 인간의 삶이다. 문득 생각한 것은 주역에 나온다는 '삼현일장(三現一藏)'이라는 문구다. 자연의 원리는 셋은 나타내고, 하나는 감춘다는 것인데, 인간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종환의 이 시도 입에 맴도는 시구가 있다. 꽃 진 뒤의 날들은 오래도록 푸르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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