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염소 비룡소 세계의 옛이야기 1
그림 형제 글, 펠릭스 호프만 그림, 김재혁 옮김 / 비룡소 / 2000년 7월
평점 :
품절


책 뒤 소개글을 보니 그림형제는 형인 야고프가 1785년에 태어나서 1859년에 죽었고, 동생인 빌헬름은 1786년에 태어나서 1859년에 죽었다고 나와있다. 이네들이 활약한 시대는 19세기 전반기인 셈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함께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이 유럽을 혁명의 시대로 몰아가던 그런 시절에 활동한 것이다. 그림형제는 당대의 약소국인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들이 시대적인 과제로 인식한 것은 독일민족의 부활과 통합이었다. 그들이 독일의 민담과 전설을 수집해서 책으로 펴낸 것은 그런 일을 통해서 독일민족의 정신을 부흥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따지자면 그들은 독일민족주의자인 셈이다. 그들이 펴낸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집>은 200년 가까운 세월을 흐르면서 세계 어린이들이 읽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그림동화는 안데르센 동화나 이솝우화와 함께 어린 시절의 필독서처럼 여겨진다. 내용을 알고보면 그림동화는 무섭고 황당한 내용이 많다. 이런 황당함은 안데르센이나 이솝우화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래동화에도 많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어린아이의 교육상 필요하지 않은 장면은 없애버리고 순화된 형태로 동화를 들려주려는 부모들도 많고, 거기에 부합하여 그런 종류의 책을 펴내는 출판사들도 많다.

펠릭스 호프만은 그림형제의 동화에 충실하게 그림을 그려냈다. 그는 스위스에서 출생했고 교육은 독일에서 받았다. 스위스가 사실상 독일문화권이라고 본다면 그는 그림형제의 동화를 그림으로 그릴 충분한 문화적인 자격을 부여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11년에 태어나서 1975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이 책은 1957년 판이라고 나와있다. 그림책으로서 5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남아서 한국어로도 옮겨졌다고 한다면 그림에 생명력이 있는 것일 거다. 그림책 안내서들에서도 호프만의 그림책들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가들이 나와있기도 하다. 그런 유명세에 의존하지 않고도 우리는 이 그림책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어보면 금방 그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아이들은 이 그림책의 원작인 늑대와 아기염소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우리나라 동화에서도 '해와달이 된 오누이'는 얼마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인가.

언뜻보면 이 그림책의 그림은 거칠어보인다. 빛깔도 어둡고 칙칙한 편이다. 만약 이 책을 이렇게 양장으로 잘 제본하지 않고, 비룡소출판사에서 내지 않았다면 그 가치가 좀 떨어졌을 것 같다. 막상 책을 처음 받아보았을 때는 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익숙한 그림을 찾는 사람의 태도가 여기서도 나온다. 그렇지만 책꽂이에 두고 여러번 책을 읽어보았더니 곧 그림에 익숙해지고, 이 그림의 독특한 맛도 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중에 나와있는 수없는 <늑대와 일곱마리 아기 염소>나 <늑대와 일곱마리 아기양>들에 비해서 보면 이 책의 그림은 독특하다. 정말 염소 같은 느낌이 든다. 늑대도 너무 흉측하거나 너무 귀엽지 않고 실감이 나서 좋다. 석판화로 그렸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엄마 염소는 숲 속에서 혼자 산다. 아기들이 일곱이나 있지만 밖에 일하러 나갈 때는 좀 봐달라고 부탁할 이웃조차 없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신신당부한다. 늑대는 변장을 잘하니까 조심하라고. 엄마가 아니면 절대로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아기염소들은 "엄마, 우리 모두 조심할게요. 걱정 하지 말고 어서 다녀오세요!"하고 엄마를 안심시킨다. 아기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열쇠로 잠긴 대문뿐이다. 짐을 담을 바구니를 메고 집을 나서는 엄마의 모습이 아주 작게 그려져있다. 우리전래동화인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는 이렇게 일하다가 오는 엄마를 호랑이는 잡아먹고 만다. 호랑이와 늑대의 차이인가? 엄마가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곧 늑대가 등장한다. 늑대의 목적은 하나다. 아기염소들을 모두 잡아먹어서 자기의 식욕을 만족시키는 것. 아기들은 잘 속지 않는다. 늑대는 목소리를 변조시키기 위해서 잡화상에서 분필을 하사 사서 삼킨다. 그랬더니 목소리가 예뻐졌다고 한다. 털이 북실북실난 시커먼 발을 감추기 위해서는 밀가루 반죽과 밀가루를 이용한다. 빵집에서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방앗간에 밀가루를 얻으러 가는 늑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재미있다. 방앗간 집 문 아래에는 고양이가 드나들고 있고, 밀가루 포대 주위에는 참새들이 서성대고 있다.

늑대는 아기염소들을 완벽하게 속이고 집안으로 쳐들어온다. 아기염소 일곱마리는 제각각 집안 구석구석에 숨는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는 엄마로 변장하고 들어온 호랑이는 오누이에게 밥을 해주겠다고 하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림동화에서는 문을 열자마자 달려드는데 우리전래동화에서는 왜 그랬을까? 오누이는 감나무 위로 올라가서 목숨을 건진다. 그러나 도끼로 감나무를 찍고 올라오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찰나에 오누이가 의지하는 것은 하느님이다. "하느님, 하느님. 저희를 살리시려거든 튼튼한 밧줄을 내려주시고, 죽이시려거든 썩은 밧줄을 내려주세요." 이런 기도로 오누이는 산다. 호랑이도 똑같은 기도를 한다. 호랑이의 기도에도 하늘은 응답한다. 호랑이가 탄 밧줄은 감나무 위에서 끊어지지 않고 하늘 중간에서 끊어지고, 호랑이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천벌을 받은 셈이다. 그림형제의 동화에서는 일곱째 염소가 살아남는다. 잘 숨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늑대는 아기염소들을 씹어먹지 않고 꿀꺽 통째로 삼킨다. 그래놓고 늑대는 나무그늘 밑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호프만이 그린 늑대의 잠자는 모습은 해학적이다. 팔을 머리 위로 쭉 뻗고 자고 있다. 엄마염소가 풀밭에서 늑대를 발견했을 때 모습이나, 가위로 배를 잘라냈을 때 모습, 돌멩이를 넣고 배를 다시 꿰맬 때 모습이 똑같다. 그만큼 늑대는 깊은 잠을 자고 있다. 어쩌면 엄마염소가 정말 조심해서 그 일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수술로 치자면 완벽한 수술을 한 셈이다. 낮잠자고 일어나서 배가 무거웠던 늑대는 비틀거리며 우물을 향해 간다. 배에 바느질 자국이 있는 불룩한 모습으로 독자를 향해 있는 늑대의 모습과 그 꼴을 창문으로 쳐다보고 있는 염소가족의 모습이 재미있다. 늑대는 마치 밤새 술이라도 마신 주정뱅이 같은 모습이다.

늑대가 우물에 빠져죽자 염소가족은 "늑대가 죽었다! 늑대가 죽었다!"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춘다. 얼마나 통쾌할 것인가. 압제자의 압박을 이겨내고 그들의 지혜와 용기로 늑대를 없애버렸으니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는 아기염소 일곱마리가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엄마 염소는 그 평화로운 광경을 쳐다보고 있다. 창문너머에는 둥그런 보름달이 떠있다. 이제 염소가족은 편하게 쉴 수 있다. 이 안식은 오로지 그들 가족의 힘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 의미는 더욱 크다. 염소 가족은 앞으로 닥치는 어떤 난관도 이겨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태계의 보물창고 연못과 습지 - 어린이를 위한 갈리마르 생태 환경 교실 2
르네 메틀러 지음, 김희경 옮김 / 키다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제목을 생태계의 보물창고라고 했는데 적절한 것 같다. 연못과 습지가 왜 생태계의 보물이 숨겨진 곳인지는 그 내용을 자세히 알아야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예전에 갯벌을 메꾸어서 땅으로 만들어야 할 곳으로 인식하였듯이 습지는 대부분 쓸모없는 땅으로 여겨져왔던 역사를 가져왔거든. 나 역시 어렸을 적에는 그랬다. 우리 마을은 바닷가를 접해있는 농촌이었는데,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습지가 여럿 있었다. 그곳을 지나갈 때면 우리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새소리들을 듣곤 했다. 그곳은 우리가 들어가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었다. 갈대가 우거져있는 곳인데다 물도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으니 꼭 뱀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요즘에야 겨우 그 갈대밭에서 울던 새소리가 개개비가 우는 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이 생태계의 자궁이요 어린이 놀이터인 줄을 누가 알았겠나. 어른들은 아무도 그런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마 그분들도 그곳을 그저 논을 만들지 못하는 버려진 땅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의 개발욕구는 끝이 없으니까.

프랑스인이 쓴 글과 그림인데도 전혀 낯설지 않다. 프랑스나 한국이나 자연은 비슷한 가 보다. 온대지방이라서 그런 것인지. 몇 개 동물이나 식물을 빼고는 거의 닮았다. 개구리 종류가 좀 다른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더구나 철새들은 지역에 매여사는 존재가 아니다보니 거의 비슷하다. 논병아리니 도요새니 하는 새들은 우리 나라 산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새들이다. 과연 새들은 전지구를 무대로 사는 동물이다보니 그런 것인것 같다. 철새가 부럽다.  여하튼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다니면서 자연을 느끼게 만들어야겠다. 산이나 강, 습지, 논과 밭에서 자라는 동식물을 아이들이 경험하고 어린시절의 친구로 사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요즘 시대의 어른된 자의 의무가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쿠슐라와 그림책 이야기
도로시 버틀러 지음, 김중철 옮김 / 보림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몇 해 전부터 제목만 알면서 읽고 싶었던 책이다. 뜻밖에 분량은 길지 않다. 부록을 빼면 겨우 200쪽 정도 된다. 그런데도 이 책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국제 장애인인의 해 기념도서 선정에서 보듯이, 장애아를 도우는 수단으로 책이란 것이 얼마나 쓸모있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쿠슐라가 태어난 나라인 뉴질랜드가 본받을 만하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도 덜하고 지원시설도 잘 갖추어져있다. 의사와 도서관이 체계적으로 부모를 지원한다. 다음으로 쿠슐라의 부모가 가진 강인한 정신력이 본받을 만하다. 의료기관에서 장애인이라고 진단해버리는 한 마디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온갖 시도들을 굴하지 않고 해보는 그 정신의  근원은 사랑이겠다. 쿠슐라 부모는 언제나 쿠슐라를 품에 꼭 껴안아 주었다. 혼자서 울게 내버려 둔 적도 없다. 부모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언제나 주려고 했다. 태어난 지 넉 달 만에 책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자라면서 온갖 장애가 나타나도 부모들은 포기하지 않고 쿠슐라에게 책을 읽어주고, 온갖 사랑을 베푼다. 거기다 쿠슐라의 친척들도 쿠슐라에게 해 줄 수 있는 온갖 도움들을 베푼다. 그런 전폭적인 사랑 덕분에 쿠슐라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지만 행복한 사람으로 자라나게 된다.

쿠슐라는 일반적인 아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을 몸으로 느낄 수 없다. 여러가지 장애를 가진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험의 공백을 쿠슐라의 부모들은 그림책 읽기를 통해서 채워낸다. 쿠슐라는 그림책 읽기를 통해서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세상을 배우게 된다. 쿠슐라는 보는 데서 놀라운 집중력을 보인다. 쿠슐라는 현실의 친구가 많지는 않지만 책 속의 친구가 많다. 다양한 인물들을 자신의 세계 속에 들어오게 하고 그 덕분에 행복한 삶을 누린다.

글쓴이의 이 말이 마음에 든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책을 읽는 아이들은 생각을 빨아들인다. 이처럼 열심히 읽다보면 아이들은 삶을 구성하는 복잡하고 모순되는 경험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미 아난시 열린어린이 그림책 6
제럴드 맥더멋 글.그림, 윤인웅 옮김 / 열린어린이 / 200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럴드 맥더멋. 이름 외우기가 어려운 작가다. 이제는 이름을 잊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태양으로 날아간 화살 만든 사람이 누구야? "하고 물으면 "글씨? 거 제랄드 머라고 하던데"하던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이제 맥더멋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되었다. 이 책 <거미 아난시>도 맥더멋의 책이 더 없나하고 찾아본 뒤 주문했던 책이다.  맥더멋의 또다른 걸작이라는 <까마귀>는 우리말로 옮긴 것이 없어서 영문판으로 구해서 볼까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어쩌다 맥더멋의 그림에 열광하게 되었나? 모두 우리 둘째 꼬맹이 때문이다.

맥더멋의 <태양으로 날아간 화살>은 칼데콧 상 수상작이라는 명성을 믿고 구입한 책이었다. 그런데 나는 처음 받아본 뒤 한번 읽고 나서 바로 책꽂이에 정리한 뒤 거의 손에 대지 않았다. 왠지 그림이 끌리지 않았다. 기존에 봐왔던 그림과는 너무나 다른 그림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피카소와 렘브란트를 두고 좋아하는 작가를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렘브란트를 고르는 게 나다. 그만큼 그림보는 눈이 초보적인 수준인지라 그림책도 주로 그런 쪽을 고른다. 존 버닝햄의 그림에 익숙해지는데도 시간이 좀 필요했다. 맥더멋의 그림은 피카소 그림처럼 느껴진다. 나에게는 비호감이었다.

어느날인가부터 우리 둘째 꼬맹이가 <태양으로 날아간 화살>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나는 한번 읽어준 뒤 그만두어버렸는데, 아내가 여러번 읽어준 모양이었다. 심심하면 그 책을 꺼내들고 읽어댔다.나중에는 그 내용을 거의 다 외워서 줄줄 읽는다. 글자라고는 자기 이름 석자 쓰는 게 전부인 녀석이 그림과 기억에 의존해서 책을 읽어대는 모습은 자못 감동적이다. 보고 있으면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 심정이 된다. 나에게 읽어달라는 책의 목록에도 <태양으로 날아간 화살>이 자주 들어갔다. 나는 그 책을 아이에게 읽어주다가 어느 순간 그 책의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칼데콧 상을 받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하학적인 문양과 함께 강렬한 색감이 깃들인 그림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나도 그 책을 읽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마치 주몽과 유리의 신화와 닮은 이야기의 내용도 새롭게 느껴졌다.  그 인연으로 이 책 <거미 아난시>도 사게 되었다.

<거미 아난시>의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 구조들 중의 하나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여러재주꾼들이 힘을 모아서 구한다. 마지막으로 보상을 받는다.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이야기양식들 중의 하나다. 단지 주인공이 거미라는 것이 특이하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신화라고 해서 낮추어볼 필요는 없다. 유럽이나 중국문명의 신화라고 해서 높게 보고,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의 신화라고 해서 낮추어보는 마음이 내 속에 있었음을 고백한다. 희한하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신기한 이야기들이 있고, 그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비슷하다. 인간이 사는 것이 대개 거기서 거기인 탓이다. 단지 기후가 다르고, 사는 장소가 다르다보니 등장하는 인물이나 무대가 좀 달라질 뿐이지.

아난시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다. 이름도 재미있다. 큰일났다, 길내기, 강물다마셔, 먹잇감손질, 돌던져, 방석이 자식들 이름이다. 꼭 아들이라고 하지 말고 '자식'이라고 하는 것도 좋은 해석이 아닐까 싶다. 아난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반드시 아들일 필요는 없으니까. 아난시는 집을 떠나 먼곳으로 떠난다. 그러다가 위험한 일을 당한다. 위험은 두곳에서 온다. 강물의 물고기, 하늘의 새. 이 위험을 해결하는 것은 자식들이다. 자식들의 도움으로 위험을 해결하고 그들은 다시 행복을 찾는다. 온 힘을 다 써서 아버지를 구한 그 가족 앞에 보물이 나타난다. 누가 주었는지는 모른다. 빛구슬이라고 나온다. 아난시는 빛구슬을 자식들에게 주려고 한다. 그런데 그 때문에 다툼이 일어난다. 서로 자기가 더 큰 일을 했다고 다투는 것이다. 이 때 세상 모든 것들의 신 '니아메'가 등장한다. 니아메는 그 구슬을 하늘 높은 곳에 놓아둔다. 밤이 되면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볼 수 있다.  

소개글에 보니 지은이는 조셉 캠벨을 만나면서 신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작업 상당부분이 세계 각지의 신화를 그림책으로 그리는 것이라고 한다. <태양으로 날아간 화살>은 푸에블로 족의 신화, <거미 아난시>는 아프리카 가나의 신화를 원작으로 한다. 모든 이야기의 원형으로 들어가다보면 우리는 신화를 만난다. 신화적인 이야기들의 원형을 탐구하기 위해서 캠벨을 읽어보아야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마침 맥더멋이 캠벨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무슨 인연인 것 같다. 신화는 소설이나 동화와 다르게 직접 현실을 가르키지 않지만, 삶의 배면에 깔린 어떤 것들을 환상적인 이야기속에 담아 보여준다. 신화와 전설을 다룬 그림책들은 아이들에게 인류의 정신세계에 깔린 원형들을 보여주는데 쓸모있는 도구가 될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인장 호텔 마루벌의 좋은 그림책 2
브렌다 기버슨 지음, 이명희 옮김, 미간로이드 그림 / 마루벌 / 199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선인장은 우리에게 낯익은 식물이 아니다. 예전에는 선인장을 키우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참 보기가 어렵다. 왜 그럴까? 도시 생활을 하다보니까 집에 키우는 식물은 상당부분 건강을 위해서 키우는 경우가 많더라. 광합성 작용을 하는 중에 수분과 산소를 방출하고 그래서 집안의 공기와 습도가 좋아지는 기능을 하게 된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 관찰이 턱없이 좁을 수도 있다. 어쨌든 예전에는 시골의 집집마다 있는 자그만 화단에 선인장 하나씩은 다 있었던 것 같다. 이것도 내 착각일 수 있다.

 

<선인장 호텔>의 선인장은 미국 애리조나 주 남부의 소노란 사막과 멕시코 북부에서만 자라는 사구아로 선인장이다. 다 자라면 어른 키의 열배 정도(15-20미터 정도)까지 되고, 수명은 200년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선인장의 어린시절을 살펴보면 참 재미있다. 쥐 수염에 붙어있다가 떨어질 정도로 크기가 작은 씨앗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싹이 트서 자라면 10년이 지나도 겨우 어른 손 한뼘 정도 크기에 불과하다고 한다. 25년이 지나면 다섯살 어린이 키만해진다. 오십년이 지나면 엄마 키 두배만큼 자라고 드디어 하얗고 노란 꽃을 피우게 된다. 그 때부터 피는 꽃은 한해에 딱 하룻밤만 핀다. 꽃이 지고 나면 열매가 달리는데 그것이 너무 맛있어서 사막의 온갖 동물들이 군침을 흘린다. 그 지방에 사는 파파고 인디언들도 그 열매를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키가 3미터 이상 자라면 드디어 그 곳에 온갖 동물들이 집을 짓기 시작한다. 딱따구리, 흰줄 비둘기, 난쟁이 올빼미, 박쥐, 곤충들, 사막쥐도 이곳을 삶의 거처로 삼는다. 그래서 '선인장 호텔'이다. 다자란 선인장은 키가 어른 키의 10배 정도, 몸무게는 8톤 정도 된다. 이 정도면 거의 고래 수준이다.

 

이 책의 내용을 글로 옮기면 기껏해야 A4용지 한장도 안 될 것이다. 내용도 그렇게 흥미를 끌지는 않는다.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무슨 대단한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잖는가. 그런데 그림이 기막히다. 그림과 글이 잘 어울려서 감동을 준다. 이게 그림책의 묘미다. 선인장에 붙어 사는 다양한 동물들을 선인장과 함께 그려놓으면 선인장은 손자 손녀가 50명쯤은 되는 할머니 같다. 오래된 나무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동을 똑같이 느끼게 된다. 더구나 선인장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산과 하늘의 파랑과 보라색이 뒤섞인 빛깔과 평원의 흙빛깔이 참 잘 어울린다. 선명한 대비가 느껴지기도 한다. 동물들이 싸우지 않고 그렇게 잘 어울려 살 것 같다. 개미에서 사막쥐, 방울뱀, 토끼, 여우, 늑대에 이르기까지 사막에 몸붙여 사는 동물들은 이 선인장 덕택에 그나마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 같다. 시아구로 선인장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늙어 죽어서도 덕이 사라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