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문제
이마 이치코 지음 / 시공사(만화)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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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 이치코의 초기 단편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외피가 소프트 야오이라는 치장을 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야오이물 특유의 과도한 감정 남발이나 탐미적인 색채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작가는 작품의 기본적인 영역, 플룻의 직조에 더 신경을 쓰면서 인물들의 개인사와 얽히는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대표작이라 할만 한 [백귀야행]에 와서 가히 점입가경이라 할 정도의 플룻 상의 복잡함과 관계에 대한 성숙한 통찰로 드러난다.

그런데 그녀의 작품군에서 드러나는 공통된 안타까움의 근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그것은 그녀가 정서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소프트 야오이물들의 게이들이나 [백귀야행]에서의 귀신들, 그리고 귀신을 보는 이들 모두, 자신들에게만 통용되는 질서와 세계를 갖고 있는 이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대다수 사람들이 사는 세계와는 조금은, 혹은 한참 유리된 세계 속에서 서로 간의 관계로, 혹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 할 '보통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상처 받고 치유 받기를 반복한다.

이 작품, [어른의 문제]는 메인스트림에 올라와서도 꾸준하게 병행 작업을 하고 있는 소프트 야오이 장르에 대한 작가의 친숙한 애정의 산물이다. [백귀야행]에서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여유있는 개그씬들을 통해 센스 있는 유머 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줬던 작가는 얽힐대로 얽힌 가족들이 등장하는 이 작품을 한바탕 소동으로 가득한 유쾌한 소품으로 만들었다.

언뜻 보면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 싶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에게 어긋난 형태로 이어져 있는 이 특이한 관계의 연속들이 일그러져 보인다거나 억지로 꾸며낸 것처럼 보이지 않고 오히려 대단히 활기 차고 즐겁게 보일 수 있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더없이 따뜻하다는 점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게이든 원혼이든, 소외된 그들이 내재하고 있는 비극을 세심한 안타까움으로 치환할 줄 아는 작가의 정감 있는 시선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복잡하게 꼬이는 플룻은 여전하지만 그 복잡함은 잘 만든 그녀의 단편들이 그렇듯, 어지럼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 또한 미덕일 것이다. 결국은 어떤 형태로든 각자의 해피엔딩을 갖게 되는 이 콩가루 가족 이야기는 애정과 관용, 그리고 가족애가 가진 힘에 대한 달콤한 신뢰가 만들어내는 즐거운 승리를 매력적으로 변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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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소녀 3
후쿠시마 사토시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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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어른이 된 이들에게 소년과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본다는 것은 결국 지난 시간, 지내왔던 공간에 대한 회고 어린 사고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것과 같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기억을 불러 내며 비록 자신, 당사자는 아닐테지만 인식적인 측면에서의 경험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결국은 같은, 소년과 소녀라는 두 조합이 만들어내는 묘한 화학 조합을 동일화, 간접 체험하게 만든다는 것을 얘기한다.

소년과 소녀는 세상에 대해 아직 덜 경험한 상태이고 그것은 그네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하나 같이 성장 드라마의 자장 속으로 집어넣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야기 속의 소년과 소녀들은 무지함을 호기심으로 치환하고 어떠한 경험을 습득함으로써 살아남아서 늙어갈 여지를 마련하게 된다. 그 경험이 어떻든 결국 소년과 소녀들은 후회하거나 이해하게 된다. 혹은 잊게 된다.

후쿠시마 사토시의 '소년소녀'에는 많은 소년과 소녀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 어떤 아이는 바보이고 어떤 아이는 보통의 꼬마이며 어떤 아이는 너무 일찍 늙어버렸다. 유쾌함과 슬픔이 혼재된 이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선 시간에 대한 회한, 경험과 기억에 대한 기쁨과 비판, 근미래의 아이들, 초현실주의적 유머와 비극 등등이 피카레스크 양식으로 풀어지고 있다. 그것은 아이들이 세상에 의해 어떻게 상처를 받고 어떻게 상처에 맞서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단순히 옛날 이야기일 수는 없기에 우리는 이 작품 속을 부유하면서 다양한 시대와 공간에서의 아이들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것은 묘한 동지의식과 동시에 초월적인 보편성의 양상을 보여준다.

'소년소녀'라는 직설적인 제목을 달고 닳디닳은 화두를 이끌어가는 작가의 솜씨는 능숙하다. 복잡다양한 각 에피소드들은 별개로 떼어놓고 봐도 어지간한 단편 소설을 넘어서는 감수성과 구조, 사려 깊은 시선을 드러내고 있다. 단순히 지난 날이 아닌 현재, 혹은 미래의 현상일 소년과 소녀들의  기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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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10
엔도 히로키 지음 / 세주문화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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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를 배경으로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건 창작의 영역에선 어디에서나 환영 받지 못할 작업입니다. 그것은 일단 실현 여부에 따른 작품의 진정성이 훼손될 우려를 안고 들어가는 것이고 또 그런 가상의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현대'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나아갈 방향성에 대한 정당함을 동시에 갖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고답적인 사고관을 갖지 않더라도 패러렐 월드라는 손쉬운 방법론으로 일련의 비판을 깡그리 무시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것이 요즘 상황이긴 하지만 '에덴'의 엔도 히로키는 정면 승부를 택했습니다.

작가는 '에덴'에서 대부분의 근미래를 다룬 작품들이 국가관의 부정 성향, 정치성의 의도적 결여, 혹은 밋밋한 수준의 인식을 보여줬던 것과는 정반대으로 내셔널리즘과 세계 정부, 초국가적 경제-정치 연합, 민족주의와 종교 분쟁들이 전쟁과 돌림병의 한복판에서 소용돌이 치는 미래로 직진해 들어갑니다. 제목과는 딴판으로 음모와 배신이 넘쳐나는 수라도인 미래를 지배하는 법칙은 인간이 지금까지 써왔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던 권력집단간 파워 게임의 약육강식입니다. 그리고 그 점에 관해서 작가는 소름 끼칠 정도의 비정함을 꾸준하게 유지합니다. '에덴'의 세계는 10권에 이른 지금, 다시 한 번 전염병이 창궐하고 거대 권력의 구심점 없는 표류 속에서 국지적인 갈등은 나날이 첨예화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개인들은 너절하게 죽어갑니다.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은 우리가 우리들의 일상이 아닌 신문 르포 기사들이 보여주는 냉정함과 결부되어 작품의 현실성을 묘하게 합리화시켜 줍니다. 하지만 제삼자로써 유지할 수 있는 냉정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리의 일상이었을 수도 있는 이야기이자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지옥과 관련된 흔하고 익숙하지만 슬프게도 잘 잊어먹는 우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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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킨 - 판타지의 제왕
마이클 화이트 지음, 김승욱 옮김 / 작가정신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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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화이트가 쓴 톨킨의 삶엔 열렬한 사랑이나 모험, 돌발상황, 비극과 같은 의미의 단어들이 어울리지 않는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열심히 공부를 한 끝에 교수가 되고 학계의 권위자가 된 사람. 그리고 만년에 이르러서야 이후 잊혀지지 않을 문학 작품의 작가가 된 사람. 이 전기는 중간계라는 풍성한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낸 사람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담담한 삶을 보냈는지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겪어내야 했던 시간 속으로 들어가보면 그의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었으며 반지의 제왕을 출판할 때까지 (실제 상황에 있어서든 정신적으로든)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도 그의 삶이 안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반발하듯이 가지고 있었던 보수적 정신-안정에 대한 열망과 사회적 지위의 획득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가 보였던 노력, 그 지위를 놓치지 않는 견실함, 그리고 톨킨 자신이 놓지 않고 있었던 사생활 노출에 대한 결벽증적 인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원형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 작품을 비판하는 축에 섰던 수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처럼 반지의 제왕은 플룻에서 볼 때 마치 고대의 신화와도 같이 너무나도 고전적이고 단순한 이야기 구조 안에서 선과 악은 명확하게 선이 갈라져 있고 인간 간의 복잡한 관계와 감정에 대한 성찰은 묘사되질 않으며 심지어 서투르기까지 하다. 하지만 보수주의자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 중세 영어의 애호자였던 톨킨이 그려내려했던 세계는 전쟁과 섹스와 기계가 모든 이들의 사고관을 지배했던, 자신이 겪어내야 했던 '현대'와 같은 그런 세계는 전혀 아니었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내려진(특히 그가 살아온 '현대'와 결부되는) 모든 종류의 비유와 은유에 관련된 비평을 결벽증처럼 거부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철저하게 순수한 작품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길 원했다. 그것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품어왔던 이상향의 구현인 동시에 역설적으론 존 로널드 류엘 톨킨이라고 불렸던 한 인간에 대한 타자의 긍정을 무의식중에 바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이미 타락해버려 더없이 부자유스러워진 세상에 대응하는 고전주의자 톨킨의 방식이었다.

활달하고 사교적이었던 동시에 고집 쎄고 폐쇄적이었으며 고대 신화에서 영감을 얻은 방대한 이교의 이야기 속에 자신의 크리스트교적인 신앙의 흔적을 끼워넣을 수 있었던 이 사람은 환상을 통해 자유를 얻으려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축복이겠지만, 그가 구축해낸 환상의 세계는 이제 그의 작품을 읽는 수많은 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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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 -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만화애니메이션총서 18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만화애니메이션총서 18
변병준 지음 / 길찾기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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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세스 안나'의 래핑을 뜯고 안을 펼쳐보았을 때, 놀랐다. 그 안에는 따뜻한 색감으로 칠해진 눈 크고 보들보들하게 생긴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표지의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모노톤의 어두움을 간직한 채로 황량하고 쓸쓸하며 말라비틀어진 고목들의 향연인 도시가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이미지-소녀. 소녀는 표지의 그 따스함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녀는 말라 있었고 죽 찢어진 눈에는 힘이 없었으며 움직임은 내내 정적이었다. 소녀의 얼굴은 그 몸뚱아리처럼 삐뚤빼뚤하게 그려지고 있었고 거기서 가장 티 나고, 동시에 텅 비어있는 것 같은 눈, 그 눈은 제 자리에서 내내 공허한 빛을 내고 있으면서 소녀에게 괴기스러운 아우라를 부여하고 있었다. 배수아의 원작만큼이나 바싹 말라있었던 이 작품은 그 모든 형상들이 말라붙은 도시를 상징하기 위해 나아가고 있는 듯 싶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소녀의 이미지가 항상 서 있었다.

'프린세스 안나'가 도시의 소녀에 대한 쓸쓸한 초상이었던 것처럼 표지에서부터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청록색 공간의 소녀가 그려진 단편집 '미정' 또한 그 중심에는 도시의 소녀에 대한 작가의 매혹이 서려있다. 모든 단편에서 여전히 쭉 찢어지고 공허한 눈을 한 채 표정이 없는 소녀들에 대한 직간접적인 묘사가 드러나고 있고 그녀들은 하나같이 팜므파탈의 기운을 가지고 있다. 소녀들은 파멸과 복수, 혹은 아주 단순한 형태의 매혹을 상징하고 있고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거나 보통 사람들의 인식 위에서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 단편들 속에서 그녀들은 언제나 문제의 시작과 끝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건 결국 도시에서 살아가는 삶에 의해서다. 도시의 딸들인 소녀들은 바싹 마른 도시의 이미지의 한 축인 바, 그 황량하고 말라 비틀어진 도시라는 형상은 소녀를 통해 구체화된다. 변병준 작품의 이미지의 매혹은 바로 그 지점에 고착되어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지점의 자장권 안에선 변병준은 완성의 지점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수록된 '연두, 열 일곱'은 57페이지의 분량으로 전작인 '프린세스 안나'를 뛰어넘는다. 이미지로 완성되는 공간에 비해 너무 말이 많았던 전작보다 훨씬 간결해진 표현으로 우리는 소녀가 매개가 되어 드러내는 무수한 상처와 도시인의 고독에 대한 연민 어린 응시를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의 발전 가능성은 다른 단편들, '너의 노래'에서의 보다 효과적인 동어반복, 'Utility', '신일맨션 202호'에서의 유머 감각을 동반한 냉소적 시선의 이미지화로 확인할 수 있다.

단편의 모음으로 보다 풍성해진 모습을 보여준 '미정'의 감수성은 하나의 가능성이었던 '프린세스 안나'라는 실험에서 성공적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데뷔한지 벌써 9년째이지만 그는 언제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 작가였다. 그것은 '미정'을 본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해당되는 얘기지만 다음 작품에선 그의 스타일의 완성을 보고 싶은 것 또한 당연한 생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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