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티시즘
김영애 지음 / 개마고원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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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말하자면 저자가 머릿말에서 밝힌대로 이 작품은 해설서다.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사용했던 방법론처럼, 대상에 대한 평이한 서술이 개개의 큰 주제에 맞춰서 풀이되고 있는 이 책은 중요하게 언급하는 대부분의 미술작품을 현대미술에 맞추고 있다. 이것은 페미니즘이라고 불리는 여성성의 자각이 하나의 운동으로 갖춰지기까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던 예술 전반의 상황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언급되는 미술들이 비록 현대예술이 주종이지만 그뿐만 아니라 예술적 계보도를 탐색하기 위해 과거의 작품들에까지 소급되 올라가는 걸 감안하자면 일련의 남성 예술가들에 의해 창조된 과거의 작품들이 가지는 원초적인 남성 욕구 지향적인 에로티시즘의 발현들을 '페미니즘'이란 시각에서 제대로 다뤄본다는 건 무척 힘든 일이라는 것은 예상된 바였다. 그래서 페미니즘+에로티시즘이란 뜻에서 만들어진 제목은 너무 과욕이 아니었나 싶다. 작가가 여자일 뿐이지 페미니즘적 시선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을 통해 예술이 다뤄지는 것은 마지막장에 이르러서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품에서의 에로티즘적 코드들이 등장하고 그에 대한 해설이 덧붙여지지만 그 시선이 과연 '페미니즘적'이라고 하는 특화되고 차별화된 양상을 보여줬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그것은 예술에 있어서 에로티즘을 다룰 때 필연적으로 건드려야 하는 여성의 신체의 영역들에 대한 문제제기란 것이 굳이 페미니즘의 틀을 빌려오지 않아도 가능한, 페미니즘 이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에서 발견되는 것은 페미니스트적 태도가 희박한  해체와 탈구조주의에 대한 익숙한 담론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목할 것은 한계를 인정한 저자의 태도일 것이다. 그것은 해설서의 방법을 택한 책의 방향성으로 증거되고 있는 바다(동시에 이것은 페미니즘적 태도란 측면에서 독이 되었다). 에로틱한 미술들, 그리고 그 틀에서 본 현대 미술에 대한 도해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동시에 알아먹기 쉽게 풀어낸  이 책은 그 성격 까탈스러운 예술품들에 비해서 읽기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흥미와 즐거움을 부정하기 힘든 예술에 대한 이야기와 삽화로 가득한 이 책은 적어도 정보 제공이라는 측면에서의 가치를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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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논 갓 리틀 - 제35회 부커상 수상작
DBC 피에르 지음, 양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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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컬럼바인은 너무도 많이 얘기되서, 달리 이야기할 거리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분명히 그렇게만 바라보면 이 책에서 보여주는 10대들의 세계는 너무 반복되서 회자되던 것이기에 썩 지루하게도 느껴질 수 있겠다. 우리는 래리 클락의 선견지명적인 작업을 통해서 생생하게 찍어낸 미국 십대들의 삭막한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래리 클락이 <키드>와 <켄파크>에서 만들어낸 인상적인 풍경들은 자연스럽게 컬럼바인에 만들어진 지옥의 배경을 장식한다. 1995년에 <키드>를 접한 몇몇 사람들은 <키드>에서 묘사되는 세계가 환타지와 센세이셔널리즘이 결합된 영역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다. 도덕주의자들에게 10대는 괴물이 됐다. 


매 구절마다 욕설이 튀어나오는 <버논 갓 리틀>에서 우리는 래리 클락이 응시한 세계가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약, 폭력, 왕따, 탈선 등의 친숙한 소재들과 매스미디어의 지저분한 생리와 인간의 이기심, '오늘과 별 다를 바 없는' 내일에 중독된 나른한 중년의 삶과 같은 구조화된 폭력과 실존적 무력함에 대한 이야기들이 화자 버논의 지저분한 욕설에 실려서 랩을 하듯 속사포처럼 읊어진다. 잠깐, 랩이라고? 우린 이걸 어디서 봤더라? 아하, 에미넴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인간만상의 추태란 추태는 다 보여주는 제리 스프링거쇼도 언급해야겠다.


에미넴의 메인스트림 습격과 제리 스프링거 쇼의 인기가 컬럼바인 시즌인 1999년에 겹쳐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에미넴은 자신의 삶을 말그대로 쇼로 만들어서 이슈를 재생산해내고 그 쇼의 내용은 제리 스프링거쇼가 보여주는 노골적인 자기폭로와 일치한다. 이걸 누가 바라느냐고? 물론 돈벌기에 환장한 매스컴과 관련산업이다. 그럼 누가 그 돈을 내는데? OJ 심슨이라는 전례가 매스컴의 기능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던져줬지만 결국 그것을 소비하는 것은 일반 대중이었다. 이것은 고대시대 때부터 인간 사회에 음침하게 존재했던 희생양 의식의 장엄한 패스트푸드화다.


OJ 심슨 사건의 카타르시스는 뻔뻔한 살인자가 벌건 대낮의 심판에서 해방된다는 이야기에 있다. 심슨은 파산 상태에 이르면서까지 최고급의 변호사들을 선임했고 그들이 한 일은 사건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사건 바깥에 대한 딴소리를 확장시키는 일이었다. 과연, 재판은 심슨이 살인을 했느냐 말았느냐가 아니라 그가 흑인으로서 백인경관에게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고 그것은 보다 확대되어 심슨 주변의 가족관계에서부터 애완견의 혈통에까지 이르는 온갖 주변부적인 것들을 스캔들화시키는데 몰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말그대로 뭉개져버렸다. 이 결과는 말그대로 사회에 대한, 정확히는 시선에 대한 조롱이었다. 거대한 조롱. 그러니, 우리는 에미넴이 씹어대는 인물들에 대해서, 자기 엄마와 전처까지 아우르는 그 노출증에 대해서 굳이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 게다가 에미넴은 신나고, 대신 욕도 뱉어주지 않는가. 우린 그에게 욕 잘 한다고 돈까지 준다. 그래서 에미넴을 시인으로 생각하는 버논 리틀 또한 씹고 또 씹는다. 우리는 익숙한 것들이 익숙한 컨셉으로 조롱 당하는 걸 진지하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지루해보인다면 여기서 보여지는 악의 축인 매스컴의 지랄 맞은 본성이란 게 이미 007에서조차 악역으로 써먹을 정도로 익숙해져버린 소재이기 때문이리라.


미국 10대의 일상에 대한 집중도와 흐름을 풀어나가는 유머감각을 생각해볼 때, 작가는 래리 클락의 영화들보다 소설적인 강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묘사는 센스있고 유머감각이 넘치며 그러면서도 디테일을 잃지 않는다.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잘 만든 헐리우드 영화를 보듯 균형있는 흥미를 지속하며 스무스하게 흘러간다. 그것은 분명히 이 이야기의 판권이 팔릴 곳을 계산하고 그것이 어떻게 운용될 것인가를 예감한 작가가 집어넣은 의도적인 개그들이다. 대놓고 얘기하자면 이 소설은 한마디로 동화다. 비록 욕설이 쏟아지긴 하지만 그 구조는 신물이 날 정도로 성장소설의 전례를 차곡차곡 밟아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부적인 측면에서 이야기의 흥미성과 묘사에서의 감각이 만들어내는 쾌감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 자체는 지겨워죽겠다.


그러나 질릴 정도로 뻔한 구조나 결말에 대한 논란(소설이 소년의 통과제의라는 신화적 의식을 구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동화라는 본분의 성깔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마련했을 이 결말은 명백하게 조롱이다. 막판에 쏟아지는 똥shit으로 인한 숭고한 기적들)이 어떻게보면 뻔뻔스러운 작가에 의해서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건 이 이야기의 시선이 욕지거리로 뒤덮여서는 미국사회의 단면들을 대놓고 욕하는 것에서 우리가 놓쳤던 것, 모든 사건의 원인과 과정, 바로 암흑의 핵심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컬럼바인 사건은 파악이 안되는 부조리의 상징으로 그 자리에 남아있다. 우리는 시체와 죄만 보고 있다. 그래서 버논이 정작 중요한 것은 얘기하지 않으면서 오직 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부분에서만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한 것은 정작 암흑의 핵심을 보지 않으려 하는 이들에 대한 비판이었다. 9.11 이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처럼 세상은(특히 부시의 미국은) 거대한 스펙터클을 동원해서 희생양을 만들고 죄를 쌓는다. 그리고 마치 OJ 심슨처럼 빠져나간다. 우리의 버논 갓 리틀께서 지지리 재수가 없었던 것처럼, 그의 죄가 끊임없이 가공된 것처럼 세상은 죄를 만들고 희생양을 찾아낸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로 책임져야 할 이들을 고발하고 그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동화다. 왜냐하면 그네들은 그들의 죄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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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성냥갑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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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보자면, 국민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드물은 이탈리아 출신의 추리소설 작가인 줄로 알았던 에코는 나에게 글쓰기에서의 유희라는 걸 처음으로 가르쳐 준 양반이었다. 중학교를 다닐 때 나왔던 <연어와 함께 여행하는 방법>(이후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란 제목으로 개정 확장판이 나온)은 말그대로 내 꼭지를 돌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웃겨줬다. 그것들이 무척 비범한 유머였다는 건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거니와 그 책을 통해서 움베르토 에코는 나에게 관조하는 입장에서 웃기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것은 단단한 지식적 여유를 가진 자만이 사용 가능했던 개그의 영역이었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범시대적인 가치를 끊임없이 일깨우는 장엄한(!) 지적유희였다.(커트 보네것에게서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에코는 확실히 그보다는 우아한 개그를 구사한다. 고약하게 얘기하자면 부르주아적인 것이겠고.) 동시에 이 책이 보여주는 성과들은 글쓰기에서의 지적유희가 마땅한 바탕이 없이 수사적인 영역에서의 얼치기 복제만으로 이뤄졌을 때, 그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한심한 모양새로 드러나는지 대차대조가 가능했던 모범적인 텍스트이기도 했다.

레스프레소에서 연재하는 칼럼에서 뽑아낸 <연어와 여행하는 방법>은 비이탈리아권 독자들을 생각하고 편집이 이뤄졌기 때문에 그 소용범위가 생각외로 넓었지만 몇년이 지난 다음 개정판으로 나온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는 이탈리아 내의 문화-정치적 에피소드들이 더해지면서 주석의 필요성이 중요해졌다.(굳이 그런 조건이 아니더라도 알다시피 이 할아범의 책은 주석에 눈이 팔리는 일이 익숙해져야 한다) 이후, 레스프레소의 칼럼들 중에서 뽑아낸 2차 재활용본이라 할만 한 이 책은 이탈리아의 역사와 정치, 문화적 경황들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이는데 주저하질 않았고, 이것이 이 책이 비이탈리아-유럽권 독자들에게 난해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점일 것이다. 과연,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한니발>에서 멋지게 촬영된 피렌체와 시오노 나나미의 마초이즘적 작업, 언제나 요란스러웠던 베네통과 틴토 브라스의 포르노영화들을 통해서나 접한 나같은 사람은 이 책에 깔린 주석만으론 성에 차지가 않는다. 주석에다가 주석을 또 달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렇게 난감한 순간들에도 글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나로 하여금 발정난 개처럼 돌아 다녔을 시절에도 시선을 서가로 잡아두게 만들었던 저자의 심원한 내공과 여유로운 유머다. <미네르바 성냥갑>은 스스로 패스티쉬에 역점을 두었다고 얘기한 전작보다는 전체적으로 정석적인 칼럼의 양상을 보여주는 글들이 주를 이루지만 글쓰기에서의 유희가 만들어내는 탁월한 설득력과 즐거움을 잊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 책에 대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바로 그 톡 쏘는 맛을 상상하며 이 책을 접하는 것이겠지만 어쩔 수 없이 작용하는 지리적인 격차 때문에 그 기대는 조금 낮춰줬으면 좋겠다. 움베르토 에코도 이 책을 완전히 해독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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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눈 뜰 때
장정일 지음 / 김영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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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젠가 장정일은 인터뷰에서 왜 자신의 소설을 종교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에서 받은 영향은 적지 않은 것이며 그것이 작품 속에서 내재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과연, 그는 첫 소설인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에서 그 스스로도 불만이라고 한 크로닌적인 구원의 이야기를 다룬다. '아담이 눈뜰 때'는 제목에서부터 구약 세계로 화두를 밀어넣고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은행원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된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는 아예 재즈교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담이라고 하는 종교적 키워드가 의미하는 것은 태초, 그리고 순수함일 것이다. 야훼는 아담부터 창조하고 이후 이브를 만들어낸 다음, 지식의 나무에의 접근을 막음으로써 그 두 피조물이 무지함과 무감함을 통한 순수의 세계에 머물러 있길 바랬다. 이 '아담이 눈뜰 때'에서 장정일이 차용해 오는 이미지는 아담의 순결함에 대한 것이고 그것은 순수에 대한 강박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경박해져가는 시대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위한 것이었다.
민주화 운동이 가지는 의미는 단일후보화 실패에 따른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자발적으로 망가져버렸고 세상은 패스트푸드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프리섹스와 단발마적인 감각으로 가득한 90년대 초에 순수를 끌어들이는 장정일은 그 코드로 60년대 히피즘의 세계를 한국땅 안에 펼쳐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익숙한 히피즘의 아이콘들-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 지미 핸드릭스, 유치하게도 60년대의 3J라 명명되는 그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죽음으로 순수를 성취해낸 이들에 대한 매혹이 순결을 담보한다고 주장하는 소설 속 인물들은 그에 따른 타나토스적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자기파괴적인 그들의 행동은 그를 통해 정신적 순결성을 지킨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그것은 소설 속에서 후일담적인 영역을 차지하는 '비겁한' 형에 대한 아담의 비판에서도 발견된다.

형은 한다면 하는 완벽한 이기주의자다.... 간장에 밥을 비벼먹던 국민학교 시절부터 이 나라에서 달아나고 싶어했다는 형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할 형의 모습과 쓰레기 리어카를 끌고, 요령을 흔들면서 지하 상가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도무지 내 심정 속에서 용해가 되질 않았다....
-25P

그러나 속도의 천박함이 주는 감상에 절어버리길 거부하는 이들은 자본의 힘, 거대한 권력의 힘에조차 순수하다고 비웃어 줄 정도로 무지하다.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던 60년대의 3J라는 아이콘이 레코드 회사의 전략적 상품으로써 형성됐고 정작 히피즘 운동을 겪지 못한 우리나라에 수입되어 일종의 성역화된 환상으로 발전했다는 걸 인식 못한다. 이것은 비단 음악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작품 내에서 쉬지 않고 비판되는 '포스트~'의 열풍 또한 서구에서 70년대에 끝난 이론을 80년대 말에야 일부 비평가들에 의해 수입되어 회자되었던 것 아닌가. 여기엔 문화식민지적 슬픔이 있다. 또한 이것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양상이 속도전에 가까운 강박 관념을 가지게 된 근거를 마련해준다.

(2)
열 아홉 살의 아담은 자신의 생을 관통할 릴리스와 이브를 만나게 된다. 아담의 바람난 아내가 될 운명인 릴리스는 은선이고 이브는 현재다.
은선은 '생리를 한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압적이었던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대학 입학이라고 하는 기성 사회의 통과 의례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자신을 옭아매던 속박들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담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던 속박을 풀어제낄 소도구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일탈에 대한 반대급부로 기성 사회의 인정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꽉 막힌 고등학교 생활의 탈출구로 여겼고 성공적으로 편입했다고 여겼던 기성 사회, 그 상징적인 현장인 대학은 고등학교와 다를 바 없는 또다른 억압의 현장이었고 그 속에서 그녀는 생명을 잃은 베낀 시의 창작을 통해 그들과 한자리에 서게되지만 결국 배반당하고 적응하지 못한다.

"들어가고자 한 대학에 들어갔었고, 시인이 되었어.... 모두들 박노해니 백무산이니 하는 시집들을 보거나 김남주나 김지하 시집들만 보는 거야. 꼭 고등학생들처럼 말이야. 게다가 집체까지 들고 나와서 나 같은 건 저리 가라는 거야."
-116P

아담의 이브인 현재는 아담의 시선에서 뭉크의 '사춘기'의 주인공인 여자 아이와 동일시된다. 그래서 현재는 그 자체로 결벽증적인 세계, 순수한 세계를 상징한다.

"그런 것들은 듣지 않아요. 요즘 음악은 아주 타락했으니까."
-37P

현재는 분출되는 욕구의 명징한 상징이자 비타협적 순수함을 표상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직 고등학생인 그녀는 대입으로 상징되는 통과의례를 견디지 못한다.

그녀의 섹스 또한 순수 고독의 형식이다. 그녀의 섹스는 사랑을 위해서나, 출산을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사랑과 출산을 위해 쓰여지는 섹스란, 섹스 그 자체엔 이미 불순스런 것이다.
-46P

자아와 세계 사이에서 충돌하는 그녀의 의식은 극단적으로 나아가 자살로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현재가 가진 '사춘기'에 집착하는 아담은 현재를 자신의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하고 그녀를 '사춘기'의 그녀로 취급하는 페티시즘적 행동을 보인다. 이것은 역설적으론 그녀를 우회적으로 포기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여기서 아담이 보인 행동은 그녀를 필요로 하면서도 그녀에게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이중적인 자세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그래서 현재와의 정사는 시간이 갈수록 화자인 아담이 자신이 증오하는 이들, 돈으로 사람을 살 정도로 속도전의 세상에 물든 이들과 얼마나 닮아있는가를 반증한다. 결국 그-아담에게서조차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현재는 스스로의 의지로 목숨을 끊는다. 그래서 그녀가 60년대의 영웅들과 정확하게 오버랩되는 순간, '비겁하게' 살아남은 아담은 자신이 찾던 정신의 낙원이 가짜였음을 알게 된다.

그녀가 절망에 처하였던 그 때에, 나는 야비한 방법을 써서 그녀의 관심을 내게서 끊도록 유도했다. 나는 울지 않기로 했다. 내가 눈물을 흘리면 두 눈에선, 네온이 흐를테니까.
-108P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큰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가짜 낙원에서 잘못 눈을 뜬 아담처럼. 내 이브는 창녀였으며, 내 방은 항상 어둡고 습기가 차 있다. 어쩌다 책이 썩는 냄새를 없애려고 창문을 열면, 네온의 십자가 아래서 세상은 내방보다 더 큰 어둠과 부패로 썩어지고 있다. 나는 내가 눈 뜬 가짜 낙원이 너무 무서워서 소리내어 울었다.
-109P


(3)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인 등가 교환의 법칙에 따라 아담은 두 사람을 만나서 섹스를 하게 된다. 그 첫 번째로 코스모폴리탄인 여자 화가는 그 자체로 가속도의 세계에 대한 비판을 보여준다. 재밌게도 그 표현은 섹스를 통해서다.

그녀의 다리는 무척 길었다. 나는 경부선 고속도로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긴 시간을 들여, 그녀의 발등에서부터 두 다리 사이까지를 입술로 물었다....
그녀는 내 허리를 그녀의 긴 두 다리로 꽉 부여잡고 있었다.
-55P

하지만 세상의 속도전과 경박함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던 이 커플은 음악사에 대한 무지를 뻔뻔스레 드러낸다.

"맞아. 요즘 가수들은 기껏해야 골반이나 흔들 줄 알지, 너도 나도 새까만 선글래스를 끼고 말이야. 사내 자식들이 꼭 시스터 보이처럼 해가지고는 색정광처럼 신음을 흘리지. 이렇게."
-52P

저 대사는 그들의 영웅들이 자신들의 선조로 삼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처음 음악사에 등장했을 때 기성 세대들에게 들어야 했던 비난과 다를 바가 없다. 경계짓기의 어리석음은 이렇게 우회해서 이들의 가치 준거라는 게 새로운 세대를 감지하지 못하는 기성 세대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진부하다는 걸 알려준다. 이들은 진짜, 진짜를 찾아다니지만 그 결과는 오독이었다. 이것은 앞선 비판, 세상에 대한 무지-어쩌면 작가의 무지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바이다. 아무튼 그녀와의 공감대 형성 및 섹스의 댓가로 아담은 뭉크 화집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가 유난히 좋아하는 '사춘기'의 부분은 뜯겨져 있는 것이었고 이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현재, 살아있는 '사춘기'의 소녀에게 페티시즘적 집착을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두번째로 아담이 등가교환을 위해 만나는 중년 게이와의 정사는 작가 자신이 가진 소년원에서의 경험이 반영된 터라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특화되고 있다. 게이와의 정사가 보다 정신적인 교감이 필요하다는 건 우스운 얘기다. 다만 그 과정의 부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아담은 이 정사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턴테이블에의 욕구가 이뤄낸 결과이고 그 때문에 스스로의 위선을 발견하게 만드는 열쇠가 된다. 그래서 아담은 현재가 자신에게 그대로 해달라고 해서 자신이 당한 것을 그대로 행하라고 명령받을 때,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 깨닫게 된다.

나는 내키지 않았다. 스스럼 없음을 가장하여 나는 그녀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힌 건지도 몰랐다.... 솔직을 가장하여 곧이곧대로 내 치부를 다 이야기 한다는 것은, 나는 이런 놈이니 알아서 하라는 식의 과시 밖에 아니며, 결국 나한테 너는 그렇게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다. 비밀이 필요한 곳에서 비밀이 옳게 지켜지지 않으면, 경박함밖에 남는 것이 없다.... 그리고 거기에 부응하는 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이기주의자다.
105P~106P

(4)
현재의 죽음 이후 아담은 살아남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에게 속죄를 하고 자신이 도피하던 세상으로의 진입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지강헌의 유명한 탈주극을 보게 되고 자신이 앞으로 살아야 할 시스템인 자본주의를 깨닫게 된다.

어떤 사건이건 자본은 그것을 센세이셔널하고 상업적인 것으로 바꾼다.... 모든 의미를 희화화하고 무의미하게 만든다. 사건은 충분히 소비된 다음, 잊혀진다. 다른 흥미를 찾아, 개발해야 하니까 '무전유죄, 유전무죄' 따위는 더 이상 연구거리가 되지 못한다.
-113P

이렇게 우회해서 그는 자신의 영웅들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착취당했는가를 깨닫게 된다.(다만 그 이후에 있어선 틀렸다. 자본은 한 번 잡은 먹음직스런 상품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확대 재생산을 꾀한다. 소비될 자산은 한정되어 바닥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획일화되고 무의미한 세상이며 작중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탬버린 남자로 형상화되는 미래이다.
서울로 올라가서 그런 획일화된 세계가 그대로 재현된 것을 본 아담은 두통을 느끼고 의미없이 도시를 방황한다. 그리고 배설의 욕구를 느껴 창녀와 섹스를 하게 되는 아담은 돈과 육체의 교환이라는 지극히 1차원적이고 물질적인 거래를 망설이지 않고 되려 그 시스템 자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욕구에 비해 그의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질 않지만 아담은 창녀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망가진 이들 간의 교감, 혹은 상처 받은 이들이나 이해할 수 있는 위로. 다소 천박하긴 하지만(표현상이든, 그 뻔한 도식성으로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엔 그가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순수, 결국은 공허하기만 했던 그 표상이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를 통해 아담은 그의 형이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이기주의자가 됐던 것을 극복한다.

방황의 끝에서 그제야 낙원의 뒷문에 서게된 아담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 중 마지막 것인 타자기를 가지게 된다. 타자기는 뭉크 화집이나 턴테이블처럼 훼손된 욕구의 상징이 아니다. 드디어 생산의 수단을 갖게 된 아담은 글을 쓰리라고 다짐한다. 과거 문학 속의 청춘들(생존자들)처럼 고통스러운 통과의례를 마친 아담은 유년기적인 의식의 유치할 정도로 노골적인 기호들로 가득 찬 세계를 벗어나 보다 늙고 침착해졌으며, 비로소 초연함이라는 미덕을 얻게됐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과 탄식이 곁들여진 너절한 절망을 겨우 끝나고 스스로 짐을 짊어지게 된 자아가 '길안에서 택시를 잡는 것'처럼 수행해야 할 고난에 찬 앞길의 시작이기도 하다. 성서의 아담과는 달리 혼자서 길을 걸어가게 된 그의 죄는 무화과를 무화과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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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신과의 유희 - 바깥의 소설 29
나카무라 신이치로 지음, 유숙자 그림 / 현대문학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이것은 옛것의 귀환이다. 아니, 아니다. 아무튼 이 작품은 1989년에 쓰여진 것이니까. 그 시절은 이미 충분히 오래 전 아니던가.(윌리엄 버로우즈는 60년대에 '벌거벗은 점심'을 썼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작품을 읽으면 자꾸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가 떠오른다.

70살을 맞이한 노년의 화가가 화자인 이 소설은 화자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며 여자와 삶, 예술이라는 일관된 코드가 화자의 육체를 통해 꾸준하게 현현하는 그리 멀지 않은 죽음, 허무, 종말이라는 코드와 어떻게 갈등하는가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과거는 종종 현재가 되고 그것은 그 영향을 현재에까지 늘려놓음으로써 화자의 삶에 영향을 준다.

이 작품이 서머셋 모옴이 '달과 6펜스'를 썼던 시절에나 어울릴 법 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열거한 저 코드들이 보여주는 뻔뻔스러울 정도의 도식성 덕분이다. 이 작품은 예술 상업 소설이라고 불리웠던 서머셋 모옴의 저 유명한 작품처럼 예술의 신성성과 그와 얽히는 작품적 긴장을 이어나가기 위한 장치로 섹스와 삶, 죽음이라는 도식화된 코드들을 방정식 맞추듯이 써먹고 있다는 점에서 동류라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우리는 중간쯤만 가도 화자가 죽음에의 영향을 떨치고 삶과 예술에 대한 의식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리라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동시적인 영역에 놓이게 만드는 브릿지인 인생유전 에피소드의 힘이 유난히 힘이 딸리는 것 때문에 품을 수 있게된 잡생각 중 하나이다.

'달과 6펜스'를 즐겁게 읽은 나로선 이 작품에 애정이 안 생기더라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실리콘 인형을 묘사하듯 부실하게 묘사되는 소녀가 하나 나오는데 화자(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70살이다)와 숨바꼭질 같은 애정질을 하는데다 인생유전상 얽혀있는 관계라는 설정이다. 70살의 이런 낭만이라니, 내가 어찌 이 작품을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웬지 엉뚱한 시절에 태어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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긁적긁적 2005-01-28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키드 런치..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구만; 네놈이 크로넨버그의 네이키드 런치가 야하다고 해서 밤새 NHK를 봤던 기억이 새롭군 ㅋㅋ 그 기괴한 타자기가 장정일의 보트하우스에서 그렇게 나올줄이야..ㅎㅎ

hallonin 2005-01-29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트하우스도 읽어봤냐. 의외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