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SA가 공유해 주신 이미지는 트라이앵글적 신학 사유를 통한 트리니티를 객관적으로 이야기 할 좋은 소스가 됩니다! ^^ 감사합니다~




20130526 오직 그에게(계1:4-6)” 242/241장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금주는 또한 교단적으로는 1907년 교단창립일이 있는 주간이자 제107년차 교단총회가 있는 주간입니다. 특별히 STU 100주년 기념관이 open 되는 28일 행사는 보다 아름다운 행사가 되도록 위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의 위격이 ‘각각이면서도 하나’인 기독교 신학의 진수이자 신앙의 고백이며 신비에 속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성령에 대하여 믿기도 하고, 알고 있기도 하며, 그 신앙을 고백하기도 합니다만, 일상에서 이러한 신앙고백 혹은 신학적 논리가 무슨 상관인가 질문하기도 합니다. 사실, ‘삼위일체주일’이라는 자체도 제정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것이 범 국가적인 기념일도 아니며, 모든 성도들에게 관심 있는 주일도 아닌 것이 사실이겠으나, 우리는 오늘의 이 기념일이 갖는 ‘가치’와 ‘의의’에 대해 중요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성령의 실체를 단 한번이라도 만나보셨습니까?

 

우리 중 누구도 이에 대해 객관적으로 물리적으로, 물질적으로 확답할 수 있는 분은 없을 줄 압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말씀이 공허한 메아리며 성령의 역사하심이 피상적인가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은 분명히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정녕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중심에 계시거니와,

‘오늘’ 이곳에 우리가 함께 있음이 이를 증거하십니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하심입니다.

 

세상에 많은 존재가 있지만, 이 모든 ‘존재’는 그 존재됨을 가능하게 한 ‘그 어떤 존재’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도 우연히 되는 것은 없어요. “그래서 집마다 집 지은이가 있듯이 만물을 지은이는 하나님이시다(히3:4)” 하고 고백도 하거니와, “나는 스스로 있느니라(출3:14)”하신 하나님의 자기존재 현현 사건은 단순히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 존재 증명 정도의 의의만이 아니라, 피조물을 향하신 그리고 하나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自存 하심에 대한 확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자존하시는 신존재 증명에 대한 피조물에의 기대’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있습니다. 한 형제는 지혜와 지식이 특출하기도 하지만 형제애가 부족합니다. 한 형제는 다소 덜 지혜롭고 지식도 짧지만 형제애가 강하고 가족애도 넘칩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 예기치 못한 분열 조짐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불편한 관계가 부모님께도 알려졌습니다. 서로가 자기는 의로운데 상대가 그르다고 다툽니다. 급기야 그 아버지께 대들 듯이 큰 소리로 얘기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희를 낳으신 것 맞긴 맞나요?”

 

여러분이라면 이러한 때에 무어라고 답하시겠으며 그 심정은 또한 어떠할까요? 그 아버지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내가 네 아버지다. 내가 너를 낳았다” 그 한마디면 되는 것 아닐까요? “내가, 언제 어디서 누가와 어떤 something이 있었는데 시간적으로 얼마가 지나자 네 어머니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울고 소리 지르더니 얼마 후 네가 태어났다. 네 이름은 ㅇㅇ이며 그 이름의 뜻은 ㅇㅇ이고 그 때의 날씨는 어땠고 기온은 ㅇㅇ였다.” 뭐 이런식으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야 할까요?

 

네 물론 현대 문명시대에서 정확한 것을 요구하는 합리주의적 사고를 지닌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답변을 기다릴지 모르나 아버지께서 “넌 내 아들(딸)이야!” “내가 너를 낳았어” 이 한마디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 한마디를 못해서, 그 한 마디를 못 들어서, 그 한 마디를 꼭 들어야만 하겠다는 심리, 아버지면 아버지로서 무한 책임을 지라는 공박심, 아버지도 완전치 못하면서 아버지의 기대치를 강요만 한다고 하는 이유 없는 반항심 등 어쩌면 이러한 아버지에의 이질감으로 인해 현대인들의 父子관계는 전에 없이 서먹해 지는 것은 없는지 한 번 스스로와 주변에 물어보세요.

 

어머니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내가 너를 낳았단다. 넌 내 아들이야” 라는 한마디는 어쩌면 아버지의 그 한마디보다도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어찌 그것을 숨길 수 있겠어요? 요즘은 자궁착상을 인위적으로 쉽게 하여 인공적 출산이 가능해 진 세상이지만, 어머니의 태로부터 출생한 인간의 출생에 있어 “아니요” 부정할 사람은 우리 중 누구도 없는 줄 알며, 혹여라도 필요에 따라 인간출산을 조절하려는 과학적 현실주의, 생명공학적 합리주의, 바이오 산업의 경제우선주의가, 창조 신앙과 무관히 창조 경제니 창의경제니 하는 시각에서 고정화 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참으로 僞된 사람의 신 바벨탑 문화이자 반드시 무너질 ‘한계적 문명’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과학은 하나님 안에서 겸손히 善用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론적 증명이나 그 존재 증명을 위한 수많은 신학적(특히 조직 신학적) 이론 등은 ‘이미’ 성서와 더불어 우리 주변에 산적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어떤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소유와 유지’에 대한 더욱 더 간절한 사모함이 각자각자 에게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를 위해 ‘정기적인 예배모임’ 참석, ‘기도회’ 참여 ‘성경 읽기’와 ‘성서연구 프로그램 참여’ 및 ‘성경 필사’ 등 ‘개인의 경건 생활’ 없는 믿음에의 기대는, 가능은 하지만 참 어렵고, 자칫 지나친 주관화 맹목적이고도 이탈 가능한 정통 신앙으로 부터의 괴리로, 이단화, 사이비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존재와 목회자의 가지를 성도 여러분 자신이 인정하고 긍정하시는 것 아닌가요? 목회자와 신학자 등 설교자를 위해서도 많은 기도 있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동의하시고 긍정하신다면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긍정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긍정이 전제 된 믿음’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의 사유 자체에는 ‘絶對神’, ‘創造主’에 대한 原初的 本能으로써의 믿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알았기에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행 17 :25)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행17:25)로 고백하고 확증하였다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적 신앙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는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사 44:24)’ 하심으로, 느헤미야를 통해서는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는 여호와(느9:6)’로 묘사되고 있거니와(느헤미야서에서의 고백은 저자 느헤미야가 아닌 5절의 등장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 사람 예수아, 갓미엘, 바니, 하삽느야, 세레뱌, 호디야, 스바냐, 브다히야 등이었고 이때는 이스라엘 공동체적 회개운동의 시기였습니다), 시편 기자(시119:91, 146:6)나 예레미야(렘10:16)등도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히3:4)” 함으로써 시원스레 표현하고도 있는 것입니다.


시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시146: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렘10:16 

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 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결국 이 천지만물의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임마누엘 하신 이는 예수그리스도이시니 이는 하나님의 자기 존재 증명을 ‘肉化된 하나님’으로 친히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결정적 자기희생’에 다름 없는 것입니다(마1:23, 28:20). 생각 해 보세요. 마태에 의해 이 하나님의 언약이 예리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그렇지, 아기 몸으로 탄생, 엄청난 사역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 하셨으니, 사실 우리 예수님! 참 피곤하시지 않겠어요? 우리가 무엇이기에 근본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람들과 같이 되셔서......(빌 2:5-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되 피상적으로 이론적으로 지식적으로가 아닌 성령께서 강화 감동 주시는 은혜와 은총을 사모하심으로써 ‘全人的인 믿음’, ‘體驗的인 믿음’, ‘변함없는 믿음’의 성도로서 ‘받은 바 구원의 은혜를 잘 보존’해 가시기 바랍니다(히2:3).

 

셋째 성령의 존재 하심입니다.

 

방금도 성령의 역사하시는 은혜와 은총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잘 간직하시라 하였습니다만, 성령의 존재하심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속 신앙인들의 신내림이나 굿을 통한 강신제 혹은 강신술 같은 주술행위도 아니구요. 이 역시 참 주관적이자 피상적인 개념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긍정하는 바, 감지할 수 없고, 체득할 수 없는, ‘비체험계의 실존’에 관한 인정은 이미 과학계나 일반 생물계 또는 생체계에서도 사실화 된 줄입니다. 그래서 일반자연 과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이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경건한 신앙인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자연과학자라도 믿음이 없이 행하다 보면 자칫 교만과 그 순수 과학 기술을 이익의 수단화 삼아 부정부폐에 탐닉하고 경제적 손익에서만 빠져 동포도 겨레도 함부로 생각하는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聖靈(the Holy Ghost, the spirit of God. Holy Spirit)은 ‘성령론’을 통해 다루어도 끝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인격체이므로 짧은 시간 내에 이를 다 표현키는 어렵습니다. 그 분의 신적인 속성, 인격성, 사역의 내용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경 및 성도에 대한 사역, 나아가 교회에 대한 사역 등이 그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 강림과 성령이 충만함 등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성도 각자의 경건 생활과 더불어 해석이 요구되는 일상이므로 우리는 금일, 그 성령의 명칭들을 다음 구절들을 통해 간략히 읽음으로써 ‘말씀을 읽는 작업’과 함께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체험하시기 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신’ 이라는 표현입니다(창1:2).

둘째, ‘주 여호와의 신’ 이라는 표현입니다(사 61:1).

셋째, ‘아버지의 성령’ 이라는 표현입니다(마10:20).

넷째, ‘은총과 간구하시는 심령’ 이라는 표현입니다(슥12:10).

다섯째, ‘진리의 영’ 이라는 표현입니다(요14:17).

여섯째, ‘성결의 영’ 이라는 표현입니다(롬1:4).

일곱째, ‘생명의 성령’ 이라는 표현입니다(롬8:2).

여덟째,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표현입니다(롬8:9).

아홉째, ‘양자의 영’이라는 표현입니다롬8:15).

열 째, ‘아들의 영’이라는 표현입니다(갈4:6).

열 한째, ‘영광의 영’(벧전 4:14).

열 두째, ‘대언의 영’(계19:10).

열 셋째, ‘주의 성신’(시51:11).

열 넷째, ‘보혜사’(요14:16).

 

할렐루야!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인간의 지식과 경험을 초월하셔서 우리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를 인정하고 긍정하며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수 있는 믿음의 부여자附與自는 “성령”이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모여 함께 드린 신앙고백, 한 성경, 한 찬송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증거가 바로 성령님의 하나 되게 하심인 것을 믿습니다.

 

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하나 되셔서 하나로 역사하시는 복된 은혜와 섭리를 늘 기억하시면서 여러분 각자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범사에 승리하시는 복된 믿음의 가족으로 날마다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목을 “오직 그에게”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본문 삼고 드린 말씀이 낯설으셨다면, 오늘 증거된 말씀 전체가 오직 그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아륻 f예수를 우리에게 보내 주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이를 우리에게 믿음으로 작용하시는 성령님에 대한 말씀인 것을 확신하시모, ‘전 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추구하는 우리 모든 복된 심령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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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 성장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 5月 가정의 달에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예배자로 저희를 인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거룩한 믿음은 사람에 의한 것도 아니요, 사람이 준 것도 아니며, 사람을 통해 받을 수도 없는,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놀라운 영적 은혜와 복인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믿음의 사람됨’을 다시 한 번 확인 하면서, 이 땅에 육신으로 거한 동안도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으며 실천적 삶을 살다가,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설 때 “잘했노라.” 칭찬 받는 저희 되기 원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날마다 우리 속에 거하시사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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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사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마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슥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벧전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성경 전체 버전으로 비교합니다.

 

계19: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시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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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신경숙 짧은 소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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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읽는 책! 시나브로 읽는 책! 느끼며 읽는 책! 몇 번 더 읽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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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2015-07-11 0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나 본인이 쓴 글 맞어? 그나 저나 요 책. 어디다 두었지? 한 번 더 보면 좋을텐데...... 잡음 등은 잊고.
 

우주의 지붕이요 만물의 그림으로 宇乾坤土精龍松梅鳳幽碧曲煙恩

시간, 계절, 시절의 품으로 時未宵曉季春秋復芳老

사람을 생각한다 人在答見風谷快死好心息窮廳惑欲惡客

사색하는 인간 思知哲問慧

창조인 喜覺笑愛戱創詩陶讀享賞才拙

사람의 문명살이를 생각함 主眞美雅味食祀觀蠱極質學敎書傳癖難

사람이 고매해 질 때 文廉淸悔憂安無中簡德道正沖膳恕

타인과 나의 성찰 吾名他鑑交關由

어린이 됨의 존재 艸嬰玄泯禪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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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1             “계명을 지키고 계신가요?” (요15:12)                517/518장

 


 ‘誡命(commandment)’ 이란 우리 성도의 생활규범이며, 우리 기독교는 ‘주권자요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명령’으로써의 戒律과 ‘그에 대한 순종’의 관계로 출발합니다. 유교적 개념의

‘順天者興逆天者亡’ 의 논리도 이 양자택일의 명령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이 계명 가운에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출 20:2-17)으로써, 이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것으로 시내산 에서 주신 것입니다. 첫 네 계명들은 敎義, 禮拜 등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계명이고, 다음 여섯 계명 들은 人間 사이의 도덕, 의무를 규정하고 있지요. 이 십계명은 처음에는 석판에 새겨져 법궤(언약궤)에 보존 되었으며, ‘모세의 율법’이라고도 합니다.

 

한편 신약성서에서의 계명은 사랑의 실천인데 구약과 신약의 계명은 그 형식과 수여 과정에서 서로 다른 점은 있으나, 그 본질에서는 같은 것이니 구약의 계명도 본래의 바탕은 ‘사랑 (對神愛對人愛)’이며 신약의 그것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량의 표현이 석판의 계명과 그 계명의 준수를 위해 보내신 예언자, 선지자, 사지, 제사장, 왕과 짐승의 피였다면, 신약의 사랑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그리고 그 위에서 흘리신 피와 땀방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그리스도인인 우리 성도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그 사랑의 표현으로 주신 성서를 통한 가르침과 교훈과 의지적 요청에 성실히 응답하는 실천적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분문을 보십시오, 앞서 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였다(요5:10)고 하시면서 이와 같이 “너희도 내(예수그리스도) 계명을 지키면 내(예수그리스도)안에 거하리라(요5:10)”하시면서 “이것을 너희 (우리, 오늘의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이름은 내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5:11)” 하셨습니다. 결국 오늘 당신 속에 기쁨, 평강, 희락이 존재한다면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잘 지켜 행하고 있음이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계명에의 준행에 다소 게으름이 있다 보아도 큰 물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언한 내용을 잇대어 이 ‘계명’이 곧 ‘사랑’일진대 오늘날 여러분은 “사랑을 잘 지켜 행하고 있는가?” 하는 직설적이면서도 간접적인 고도의 질문(High Question)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곁에 계신 분들께 지금 한번 물어보세요.

“계명을 지키고 계신가요?”

“사랑을 실천하고 계신가요?”

 

이제 다시 본문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계명 = 서로 사랑하라

The Lord's Commandment = Love one another

 

간단하지만 위와 같은 공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으로 삼은 요15:12을 중심으로 15장 전체에서 언급하고 계신 이 말씀은, 지금 예수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으로 명명되고 있는 ‘ 마지막 성찬 ’의 자리에서 이르신 말씀입니다.

 

가룟유다는 제 길로 나갔고, 남은 제자들은 지금 언급하고 계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어쩌면 어수선할대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주님은 “Love are another!" 하고 언급하시면서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예수그리스도)게 주신 계명이요, 이것이 내(예수그리스도)가 너희들 (제자들, 오늘의 우리 성도들, 예수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는 Commandment라” 하고 계신 것 입니다.

 

우리 말 ‘계명’은 자주 듣는 용어이기에 그냥 계명, 계명 할 수 있을지 모르나 Commandment 의 직역은 ‘命令’을 의미합니다. 명령은,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You must do it)’의 개념인 것입니다. 즉, 우리 성도의 사랑을 실천함은 must doing 이란 것입니다.

 

13-17절을 보세요, 우리가 주님의 계명 곧 사랑을 실천함으로 성립되는 것은 主從의 관계가 아닌 친구, 벗 즉, 우정 관계로의 등급 업그레이드가 되는 것입니다.

 

근본 하나님과의 벗이 된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등급 올리기’ 라는 것이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 등급 승급을 위해 안달을 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하물며 인간의 근본 나눔인 사랑의 실천으로 神과 우정관계로 승급한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그렇다고 神이 되기 위한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이기에 실천하는, 지극히 보편적 사랑 실천은 우리에게 있어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 모두 사랑하며 살아 가십시다. 할렐루야~

 

특별히 요15:16을 보세요. 이 말씀을 읽노라면 요한복음 5;5에서 보이는 38년된 환자에의 치유사역을 떠올리게 됩니다. 당시 38년된 환자는 ‘자력구원 확률’이 거의 없었습니다.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요5:6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신 예수그리스도 앞에서의 이 환자의 답변은 불가능의 긍정이었습니다(요 5:7)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 나이다”

 

바로 그때 주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 하셨고 그 환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갔습니다(요5:9). 38년간의 不動席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 치유 사역에서 6절을 주목하게 됩니다. 먼저 5절에 의하면 분명 당시 상황은 38년 고착화 된 환자 앞에 서신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환자를 향하신 주님의 반응은 그 누운 것을 ‘보셨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애정과 관심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자를 보고, 그 아픔을 알고,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부분을 묻는 이 행위는 분명 사랑의 동기이자 실천행위를 위한 기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계명을 지키고 계신가요?” 입니다. 이 내용은 “사랑을 실천하고 계신가요?” 하는 질문과 동일하다 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주님의 계명을 지키시겠는지요?

당신은 우리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시겠는지요?

 

누가 이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하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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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우주], [고전의 힘].


이 녀석들이 블로거를 향해 손짓 한다.

어여 나를 데려가 달라고.


저들의 함성이 극에 달해 또 한 번 빚을 내려는 유혹이 속에서 꿈틀거린다.


설상가상 02.587.1955이라는 번호에서 한 영성은 우리은행을 들먹이며 무슨 금융삼품을 선전하려 한다. 이에 "지금 제게 상품 소개 하시는건가요?" 하고 뭊디고 전에 끊어 버리는 당돌함에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 하려 하였더니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란다. 이런~


이걸 국정원에 걸어 경찰청에 걸러 아님 법무부나 한국인터넷 진흥원을 통해 묵사발을 내?


이도 저도 다 덮어 두는 것은 그래도 그 일을 통해 무엔가 오늘 하루를 살아 가는 방법이려니 하고 다만 더 큰 부정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이래 저래 낱말의 우주도 고전의 힘도 좀 더 기다려야 할 판이다.


사고픈 책 마음껏 사 보는 能 없음이 어제나 오늘이나 그대로니,

그래도 마음 편함은 예의 그 부정스러운 돈벌이 혈안자들의 고통은 겪고 있지 않음이라.

늦으면 늦은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그렇게 시나브로 구하여 보아도 문제는 없잖아?


봄!


가물던 대지는 수일 전 5mm정도의 비에 다소 숨통 틔더니,

오늘은 내일 오전까지  전국적으로 예보 된 비 소식에 참 마음 든든하다.

봄 비는 곧 내 심령의 가뭄도 해갈케 해 주는 신묘함이 있으니,

이는 아마도 바람난 처녀들의 가슴이나

설레는 총각들의 가슴이나

뭇 선남선녀들이 펄펄 나는 새들의 날개짓과

암수 한쌍 나비들이 춤추는 계절의 전형적인 평상심이리라.


다만 번개가 요란할 듯 하다니,

길 가는 행보도 조심 조심하여 

이 비가 그치면 새로이 생기 돋을 본 대지에 한 조각 귀한 풍경화 속 주인공이 되시라!


블로거의 상기 두 권의 책 리뷰가 속히 이 곳에 記 되기를 기대 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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